무거운 여자가 되면 31. 식이장애에서 벗어나기(4)

생각하다식이장애

무거운 여자가 되면 31. 식이장애에서 벗어나기(4)

김현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빅투아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온통 하얀 색인 방이었다. 약 냄새가 진동했다. 그제서야 빅투아르는 늘 자신을 ‘후려치기’하는 작은 목소리와 자신은 뚱뚱한 실패작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의사가 부모님과 함께 들어와 마치 그 자리에 빅투아르는 없다는 듯이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빅투아르가 사춘기의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빅투아르는 자신은 그런 증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의사는 그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빅투아르는 차분하게 이건 단지 실수였으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딱 잘라 말했다.

넌 전혀 괜찮지 않아, 빅투아르. 넌 전혀 괜찮지 않다고! 

그 병원에서 딸을 데리고 나온 빅투아르의 부모는 그를 살뜰하게 보살펴줄 클리닉을 찾느라 고심한 후, 그 중 가장 적절해 보이는 클리닉에 빅투아르를 입원시켰다. 담당 의사가 무슨 일로 여기 왔느냐고 묻자, 빅투아르의 뺨에는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렸고 부모님이 빅투아르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이윽고 빅투아르는 이제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체육 활동이나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이 클리닉에서 빅투아르는 너무나 오랜만에 웃게 되었고, 그 웃음소리는 가족들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만들었다. 자신과 똑같이 비쩍 마른 환자들을 보면서 빅투아르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아버지를 꼭 껴안은 다음 그 순간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석 달 동안 클리닉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검사로 확인한 그의 상태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무월경, 저혈압, 상당량의 탈모 증상, 70대 노인 수준의 골밀도. 영양사와 요리를 의논하고, 스케치를 하거나 춤을 추면서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을 새롭게 짜 맞추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제 모델 일을 그만두게 된 빅투아르는 자신이 벌어들인 모델료를 정산하게 되었는데, 타고 다닌 모든 택시비, 미용실, 컴포짓 카드를 만들기 위한 사진 촬영, 워킹 수업, 이동시의 비행기표, 자동차, 각국의 통화료, 호텔 숙박비, 과일 식사비, 포트폴리오와 컴포짓 카드 인쇄비도 모두 자신의 부담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패션쇼가 끝난 후 디자이너들이 골라 보라며 제공한 브랜드 제품은 선물이 아니라 ‘현물 급여’였다. 그런 저런 모든 비용과 수수료를 제하고 결산한 금액은 초라했다. 빅투아르는 수만 유로를 벌어 들였지만 마침내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은 1만 유로(1,250만원)이 전부였다. 그 모든 스트레스를 참아내고,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주리게 한 데다, 작은 목소리의 학대를 견디고 손에 남은 돈은 고작 그뿐이었다.

거식증은
전혀 하찮지 않다

일러스트 이민

모델계에서 다시 돌아오라는 러브콜이 계속됐지만 빅투아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르본느에서 공부했고, 전부터 꿈꾸던 런던음악연극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이제는 더운 날에도 혼자 벌벌 떨 만큼 춥지 않고 월경도 규칙적이며 뇌도 잘 작동한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폭식을 하는 식의 후유증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자신이 컨트롤하는 자기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66사이즈를 입고 64kg의 몸무게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적은 <죽을 만큼 아름다워지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니 빅투아르가 죽지 않아 너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어린 빅투아르가 식이장애나 인생에 대해 뭘 그리 고민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으로 만날 사람은 거식증 경험을 <하루에 사과 하나>라는 에세이집으로 발표한 엠마 울프다. 울프라는 이름이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그렇다, 엠마 울프는 <자기만의 방>으로 영원한 명성을 얻은 버지니아 울프의 조카 손녀다. 그 덕에 울프 가족 구성원들에게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권장되었고, 엠마 역시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0년간 유능한 출판사 기획 편집자로 근무하다가 최근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사과 하나>는 거식증이란 다이어트를 하려는 멍청한 여자들이 자신에게 심하게 굴다가 걸리는 하찮은 병이라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부숴 버린다. 그는 서른 둘이 되었는데도 아직 거식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싫고 시시각각 스스로와 전투를 벌어야 하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엠마는 신문에 자신이 거식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어떤 것은 실패했느니 연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열광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차마 타인에게 내가 식이장애를 안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앓고 있는 여성이 그토록 많았던 것이다. 엠마가 가장 상태가 좋지 않았던 21살 때는, 불과 35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47킬로그램 정도 되는데, 21살 시절을 떠올리면 피하지방이 없어서 늘 추위에 덜덜 떨었던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침대에 누우면 매트리스와 뼈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해 줄 살이 없어서 아팠고, 의자에 앉으면 꼬리뼈가 배겼으며 어디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멍이 들어 온몸이 시퍼런 멍투성이였다.

거식증에 걸리면 외모가 급격히 변하니 모든 사람들이 환자의 몸매와 체중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고 쓴 엠마는 그들의 오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 외모에 집착하느라 거식증에 걸렸다고, 완벽한 몸매를 위해 살을 빼다 생긴 부작용 정도라고 오해를 한다. 그러나 엠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거식증 환자들이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사람만큼 매력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엠마는 스스로 비쩍 말라 섹시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식증 환자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오히려 거식증에 걸리면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기 위해 여기저기 나다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접촉이 두려워지고, 인간적인 교류 역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뼈만 앙상한 몸을 보이기 싫어 섹스는 커녕 연애에 대한 일말의 욕구도 사라져 버린다. 실제로 포동포동한 여성이 심하게 마른 여성보다 성관계에 대한 욕망도 높고 성생활 역시 만족스러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소한의 음식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다 보면 재미있게 놀거나 성생활을 즐긴 에너지가 남지 않는 것이다.

관리형 거식증

일러스트 이민

엠마는 거식증의 첫 증상 중의 하나가 육체와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라고 썼다. 엠마는 월경이 끊긴 지 10년이나 넘었다. 그러면서 ’관리형 거식증’이 유행한다고 지적하는데, ‘개말라’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그런 ‘관리형 거식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업도 아이도 있고 정상적 생활을 하고 있지만 살이 찌지 않도록 먹는 것을 철저하고도 강박적으로 관리하는 그런 여성들 말이다. 저체중 상태에 있으면 무월경, 불임, 불면증, 골다공증 같은 녀석들이 잽싸게 찾아오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 아니니 대부분의 환자는 이런 신호를 무시한다.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것도 거식증 환자들의 특성인데, 어떤 부위의 근육도 발달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들은 빅투아르가 살을 빼기 위해 허용된 유일한 운동인 걷기를 미친 듯이 하면서 자신은 택시를 탈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엠마는 6시에 일어나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계속 달렸다. 비축할 필요가 없는 몸 속 연료들과 함께 지방과 근육까지 같이 태워 버렸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7-8km 정도를 절대 빼먹지 않고 달렸다.

몇 년 전 만나게 되어 사귀고 있는 애인 톰은 그런 엠마에게 달리기를 좀 멈추고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달라고 부탁했지만 엠마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는 것을 먹어 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서 그게 뭔지 모른다. 톰은 엠마에게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행위인 줄 알지 못했다. 엠마는 음식을 한 입만 먹으면 자신이 주접스럽고 추악하게 느껴졌다. 거식증을 오래 앓아 온 엠마는 음식이 있을 것 같은 자리를 피하는데 온 신경을 다 써서, 그의 언니는 그를 ‘음식 피하기 선수’라고 부를 정도였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동료들과 식사를 하며 우정도 쌓고 일 관계의 정보를 얻기가 쉬운데, 엠마는 스스로 그 모든 자리에서 자신을 격리시켰다. 몸무게가 느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몸무게가 느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모두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빅투아르를 그토록 괴롭혔던, 내 귀를 찌르듯 쏘아붙이던 그 ‘작은 목소리’가 엠마에게도 오랜 친구이자 적으로써 함께 하고 있었다. 막상 거식증을 자기 인생에서 떼어 내려고 결심하자, 10여년 이상 함께 지내온 거식증과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졌다. 엠마의 작은 목소리는 너는 일말의 존재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너는 허기에 반응할 자격이 없고 먹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속삭였다.

이 작은 목소리 이외에도 식이장애 환자들이 발병 초기에 공통점으로 겪는 증상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다음 주에 과연 버지니아 울프의 조카손녀는 어떻게 되었는지와 함께 내가 지금 원고지 1200매 짜리 장편소설 작업을 하다가 어떻게 가벼운 거식증을 앓게 되었는지 수치심과 자기혐오를 무릅쓰고 진솔하게 써 볼 예정이다. 가능하면 식이장애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전하여 이 기나긴 식이장애 편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럼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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