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다가 어떻게 내가 멧돼지가 되었는지 궁금하실 것이다. 그건 한 마디로 ‘망혼’ 때문이었다.
30대가 되자마자 아버지가 간암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어차피 개척교회 목사이셨던 아버지는 가계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 전공을 살려 시나리오를 계속 쓰고 싶었지만 순진한 부모님이 말 잘 하는 사람들에게 속아 피라미드, 즉 다단계 판매에 끌려 들어가는 바람에 몇천 단위의 빚을 져 그것을 상환하기 위해 원치 않던 회사에 입사해 삼 년이나 일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태 주고도 워낙 열심히 일을 해서 자취방 전세금 정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교회 사정이 어려워 그 돈을 빌려 달라고 하실 때 어차피 그 돈이 나에게로 돌아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빌려 드렸고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교회 건물에 대한 등기를 잘못하시는 바람에 건물은 경매 매물이 되고, 내 돈은 100원도 못 건지게 되었다. 그래도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신 분을 원망해 봤자 허무할 따름인데다 그간에도 부모님에게 요리조리 경제적 도움을 드렸기 때문에 그냥 뭐 그러려니, 싶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나에게 선물한 것은 그렇게 돈에 대해 ‘돈은 원래 나에게 없다가도 없고 또 없다가 또 없는 것이다’라는 식의 초탈한 태도인지도 모르겠다.
인사이더
어머니와 나는 방 두 개짜리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한참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많이 돈을 벌지 못하는 대신 소비를 거의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남던 중이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활발하게 에세이를 썼지만 한국의 글 값이 너무나 작아 겨우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나도 이제 30대이니 홀어머니를 이것보단 잘 모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이 들어 여러 가지 궁리를 했다. 그러다 어느 공기업의 공채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경쟁률이 워낙 높아 합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 합격 통지를 받았다. 무척 기뻤다.
나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요즘처럼 자퇴가 흔치 않던 나의 십대 시절에 고교를 자퇴하고 공교육에 대한 경험과 비판을 <네 멋대로 해라>라는 첫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이후 나는 계속해서 내가 ‘인사이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 곳인데 고등학교 하나 제대로 마치지 못한 정신상태로 어떻게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있겠느냐’는 사람들의 비난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는데, 그러한 주장에 맞서 나도 어엿이 사회에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국립대학에 들어갔고, 석사 학위도 받았고, 이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니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졌다. 애써서 얻은 번듯한 직장도, 일직선으로 달려나갔던 결혼도 그런 몸부림의 하나였다.나는 더 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야, 남들 보기에 그럴싸하게 살고 있어, 나도 정상인이야.
그루밍
공기업이면 반공무원이니 일이 편하지 않을까 했는데 날마다 행정업무에 시달리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극단적으로 좌, 우뇌의 발달 정도가 다르다고 서울대학교 병원 정신과에서 판정 받은 적이 있는 나는 처음에 기안서를 다루면서 100000만원에서 어디에 쉼표를 적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실수에 실수를 하느라 야근이나 주말 출근을 안 할 수가 없었는데, 그것만도 괴롭건만 그 공기업에 새로 취임한 대표님이 평소에 나를 아껴 주던 어른이라 유착의 의혹까지 받았다. 내가 부정입사를 했다는 직원들의 투서도 몇 건이나 들어왔다고 한다.
내가 일하던 홍보팀의 팀장은 나이에 비해 일찍 출세가도를 달리는 여성이었는데, 내가 일찍부터 일하면서 쌓아온 인맥을 홍보팀 업무에 활용하는 것을 매우 꼴사납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유착에 대한 의혹을 누구보다 제일 먼저 다른 직원들에게도 아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뭘 해도 아니꼬워했고 그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고 모두 표현해서 아주 곤란했다. 나도 얼마든지 그를 미워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 쪽에서도 그를 미워해 버리면 전형적인 ‘여적여’ 프레임이 될까봐 그럴 수 없었다. 아이러니는 그가 여성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었다.
대표님은 나를 갑갑해하셨다. 도대체 왜 입 다물고 당하고만 있느냐, 너도 미친 척 맞서 싸우라고 충고했지만 내가 대표님을 등에 업고 이런다고 사람들이 생각할까봐, 그래서 혹시라도 대표님께 흠이 갈까봐 그러지 못하고 끙끙 혼자 참기만 했다. 능력 있는 페미니스트인 대표님에게 나 때문에 어떤 흠집이라도 난다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남편을 만난 것은 내가 한창 그렇게 숫자와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스마트한 일 처리로 사내에서도 유명했었던 그는 남모르게 나를 살짝살짝 도와 주었고, 내 분수에 넘치는 일자리를 얻어 괴로워하고 있던 나에게 그 도움은 보석처럼 귀중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일종의 그루밍이 아니었나 싶다. 이 회사에 너를 도와 줄 수 있는 건 나뿐이야, 하는. 그가 의도적으로 그루밍을 했다기보다는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그루밍을 당하고 싶어했던 것도 같다. 그토록 하루하루가 어렵고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회사 생활에서 그의 사소한 도움도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소중했다.
그렇게 업무에 도움을 받으면서 서로에게 호감이 생겨 말 그대로 ‘열애’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만나온 남자들 중에서 대단히 잘난 축에 드는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그에게 푹 빠져 버렸다. 이것도 아마 ‘인싸’가 되고 싶은 무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도 남들처럼 번듯하게 살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쓸데없는 오기. 그는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는데,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어느 날부터 나는 그에게 결혼하자고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 좋아서 함께 살고 싶은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에게 ‘나도 남들처럼 잘 살 수 있다’는 나의 콤플렉스를 채워 주는 부분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서울 소재의 괜찮은 대학을 졸업하고 그럴싸한 공기업에서 인사고과 1위를 달리는 유능한 사원, 노후 대책이 잘 되어 있는 시가, 못생기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은 단정한 용모. 이 정도라면 나의 ‘남들만큼 살고 싶다’는 은밀한 소망을 충분히 이루어 줄 만한 인재인 것 같았다. 결국 나의 열렬한 구애로 입사한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그 결혼식도 죄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