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여자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짜증스럽다. 한때 40kg도 나가지 않아 가시처럼 말라도 보았고, 딱 좋다며 날씬하다는 칭찬을 들은 시절도 있었고, 90kg에 가까운 거구이기도 했던 나는 한국 여성이 도달할 수 있는 무게에 한 번씩은 다 가 본 것 같다. 그러면서 무거운 한국 여성이 얼마나 살아가면서 하루하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속으로 꿀꺽 삼키고 살아가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47KG일 때의 한국과, 86KG일 때의 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무거운 여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많이 배웠건 그렇지 않건, 능력이 있건 그렇지 않건 누구나 대놓고 멸시하는 불가촉천민이었다. 그 구체적인 예들을 보자.
이를테면,
무거운 여자가 마트에서 장을 본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가 카트에 무엇을 담았는지 비판자의 눈으로 스캔한다. 신선한 과일, 채소 등이 담겨 있다면 그들은 그가 자정 쯤에 혼자 라면을 두어 개 끓여서 흡입할 것이라며 단정하며 ‘저런 것만 사는데 왜 살이 찌지?’ 라며 의아해한다. 만약 그의 카트에 라면, 냉동만두, 즉석식품이나 과자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면 그들은 딩동댕! 하고 종이 울린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저런 걸 먹으니까 살이 찌지, 하고 준엄한 심판관 같은 표정으로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린다. 보통 체중의 여자가 카트에 단 것, 즉석식품, 맥주, 만두 같은 것을 아무리 실어도 아무도 그 카트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마트 쇼핑의 묘미는 갓 구워낸 음식을 시식하는 재미에 있다. 여남노소를 불문하고 노릇노릇 갓 만든 음식을 시식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독 무거운 여자가 시식 줄에 서서 기다리거나 시식 음식을 받아 입에 넣는 장면을 본 사람들은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린다. 저렇게 살이 쪘으면서 먹는 욕심 내는 것 좀 봐! 정작 무거운 여자는 그 손톱만한 시식 조각 한 입 맛만 보려고 했던 건데 말이다.
여럿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무거운 여자가 음식을 사양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실컷 먹으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그들은 무거운 여자는 일단 덩치가 큰 것 자체로 자신들에게 미안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무거운 여자가 먹고 싶은 것까지 다 먹고 또 먹는 즐거움까지 죄책감 없이 누리려고 하는 광경은 도저히 그들의 비위로는 참아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들의 생각에 무거운 여자는 마땅히 징벌을 받아야 할 여자이다. 무거운 여자는 무엇보다 일단 살을 빼야 하지만, 그런 노력조차 하고 있지 못한 여자는 수치라도 느끼고 부끄러움에라도 시달려야 마땅하다. 그런 노력을 할 형편이 못 된다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사회를 향해 늘 스스로 내가 뚱뚱해서 미안해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야 겨우 봐줄까 말까 한 상황이다. 그런데 어디 실컷 먹고, 또 좋은 음식을 잘 먹어서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안색을 할 수가 있는지! 그래서 보통 체격의 여자가 이 음식 참 맛있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많이 먹어, 하고 접시를 끌어다 주지만 무거운 여자가 이건 참 맛있다, 하고 감탄하면 사람들은 그만 좀 먹어, 하고 접시를 빼앗아 버린다.
그래서 회식자리 같은 곳에서도 무거운 여자들은 저는 많이 먹었어요, 배 불러요, 하고 실은 뱃속에 거지가 들어앉은 듯 배가 고파와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음식을 정중히 사양한다. 그게 살도 빼지 못했으면서 여러 사람 눈에 보기 싫도록 바깥에 나다녀서 죄송한 무거운 여자가 취해야 할 겸양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무거운 여자들은 아예 회식자리에서 고기 굽는 불판과 집게의 담당자를 자처하기도 한다. 보통 체격의 여자가 고기를 굽고 있는데 무거운 여자가 구워진 고기를 먹고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을 무거운 여자는 누구보다 빨리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거운 여자는 일부러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한 가득 띄우며 고기를 자신이 굽겠다고 가위와 집게를 쥐고 나선다. 그것이 그가 그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다.
무거운 여자가 옷을 사러 가면, 점원이 아주 귀찮은 표정으로 접객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접객이라기보다는 훠이훠이하고 내쫓는 행위에 가깝다. 그 브랜드의 옷을 맵시있게 차려입은 판매원은 쌀쌀맞은 경멸을 담은 눈으로 이렇게 쏘아붙인다.
죄송한데 저희 브랜드에 손님 사이즈 옷은 없거든요?
없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뚱뚱한 여자는 쓸쓸히 샵을 나선다. 몇 년 전부터 여성복의 사이즈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한 의류 회사의 남성 CEO는 왜 큰 옷 사이즈를 출시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노골적으로 ‘못생기고 뚱뚱하고 매력 없는 여성들이 우리 옷을 입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제 사람이 옷을 입는 시대가 아니라 옷이 사람을 입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유분방하게 살던 늘씬한 미녀 모델과 과체중이며 외모에 전혀 관심 없는 삶을 살던 여성 변호사가 몸이 바뀌어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그려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드롭 데드 디바>에서 주인공은 패션지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하고 그 옷을 사기 위해 샵을 방문하지만 판매원들로부터 자신들의 옷은 8사이즈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며 냉대를 받는다. 결국 주인공은 법정 싸움에서 승리해 다양한 여성들의 사이즈를 존중해서 옷을 제작하여 판매하도록 의류 회사가 시정 조치를 받도록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지마켓이나 쿠팡 같은 쇼핑 웹사이트도 처지는 비슷하다. ‘빅사이즈’라고 검색해서 들어가 보면 일단 옷이 예쁘질 않다. 빅사이즈면서 예쁘길 바라는 게 양심 없는 행위라면, 적어도 옷 같은 옷을 팔아야 할 게 아닌가. ‘박시해서 누구나 입어도 여리여리한 핏을 자랑할 수 있어요^^*’ 라고 의류에 대한 설명이 써 있는 티셔츠는 웬만한 시멘트 푸대자루만한 몸통에 파이프로 낸 구멍처럼 볼품없는 소매가 달려 있는 아주 끔찍한 물건으로, 소비자에게 조금이라도 미적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면 차마 돈 받고 팔 생각은 양심상 하지 못할 물건이다.
기승전살빼
그뿐 아니라 만약 무거운 여자에게 취미가 있다고 하자. 무슨 취미가 됐던 간에 운동 등 살을 빼는 것과 관련된 취미가 아니면 백 퍼센트 조롱이 따라온다. 뭐? 꽃꽂이? 꽃이 밥 먹여 줘? 그 돈으로 살이나 빼! 기승전결 살 빼라는 이야기로 끝난다. 화초를 키우면 뭐 먹을 수 있는 거 키우냐? 하는 조롱이 뒤따른다. 보통 체격의 여자가 연애를 하면 사람들이 축하를 해 주지만 무거운 여자가 연애를 하면 사람들은 신기해한다. 어떻게 용케 그런 재주가 있었네? 그리고 상대 남자를 대견해하기도 하고 가엾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남자는 무거운 여자와 사귀어 ‘준다’는 이유만으로 엄청난 올려치기를 받을 수 있다. “아휴, 남자가 보살이네 보살! “ 우리나라에서 흔해 빠진, 열 몇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은 그런 올려치기를 전혀 받지 못한다. 잘 되서 결혼까지 갔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무거운 여자와 결혼하기로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두 사람이 어떻게 어울리는지, 두 사람이 세운 인생 계획은 어떤지를 궁금해해야 하겠건만 흔히 들리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그럼 결혼 전에 얼른 살 빼야겠네? 걔 완전 큰일 났다.
그런데 그 몸에 들어가는 드레스나 있겠어?
생판 모르는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드레스가 터지면 어떡하냐는 이야기부터 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무거운 여자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칭찬에 가까운 말은 ‘맏며느리 감이다’라는 말인데, 여성을 갈아 넣어서 유지되는 가부장제에서 ‘맏며느리감’이라는 표현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다. 넌 노예 노릇 참 잘 하게 생겼다, 부려 먹기 참 좋아 보인다, 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뿐인가. 무거운 여자는 차를 몰고 나와도 뚱뚱한 x이 차는 왜 끌고 나와서, 하고 욕을 먹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빈 자리가 나서 앉으면 저렇게 편안한 걸 밝히니까 살이 찌지, 하고 욕을 먹고 다른 사람들처럼 간혹 매콤한 떡볶이 생각이 나서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먹으면 저런 걸 먹으니까 살이 찌지, 하는 시선을 받는다. 사실 무거운 여자는 배고프다는 소리도 잘 할 수가 없다. 마른 여자나 무거운 여자나 살아 있는 존재니까 모두 배가 고픈 건데, 무거운 여자가 배가 고프다는 소리를 꺼냈다간 넌 먹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무거운 여자를 욕한다. 무거운 여자들은 매일 숨쉬고 있는 매 순간마다 혐오와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