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의 뚱뚱한 사람
나는 어릴 때부터 만화를 무척 좋아했다. 10대 때부터는 케이팝과 아이돌 산업에 관심이 많았고 영화도 물론 좋아해서 시간이 날 때는 채널을 가리지 않고 보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 뚱뚱한 여성은 만화나 영화에서 조연으로나 잠깐 나왔다. 연예인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그 마저도 '요요 현상' '다이어트 비법' 과 함께 헤드라인에 실리거나 아침 프로그램에 초대 받았다. 날씬한 사람이 뚱뚱해지면 추락 운운하며 전후 사진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해 비교했고, 그가 감량에 성공하면 이전의 커리어를 회복하는 게 아니라 건강식품 및 운동기구 광고로 소진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온전히 뚱뚱한 사람이 뚱뚱한 채로 자신의 캐릭터를 갖고 장기적으로 활발하게 일 하는 모습이 노출된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뚱뚱하지만 예쁜' '뚱뚱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등의 단서가 의무처럼 붙으며 '저런 애들이 시집을 잘 간다, 사랑 받는다' 같은 설명이 칭찬이랍시고 붙는다.
물론 예쁜 사람은 어떻든 예쁘니까 그러한 외모가 선호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지만 '뚱뚱하지만' 이라는 불필요한 단서와 '누군가에게 종속되어야 목표를 이루는 여성' 이라는 설명은 상당히 별로다.
뚱뚱한 사람은 연애를 해도 '진짜 사랑'. '상대가 너무나 사랑한다' 등의 부연 설명이 붙는다.
'그러기 힘든데 쟤네는 진짜 좋아하나 보다', '저렇게까지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노력하니까 사랑받는다' 가 뒤에 괄호로 붙어있는 듯하다.
뚱뚱한 사람에 대한 편견을 애써 숨기거나 희석하려는 시도들이 보일 때가 있다.
옷과 화장에 관심이 많은 뚱뚱한 연예인을 보며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다'
'뚱뚱한데도 꾸미려고 노력하는 자기관리에의 의욕이 멋지다'
'뚱뚱해도 당당하게 꾸미는 게 정말 멋지다.'
와 같이 말하는 순간들 말이다. 물론 자신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독특하고 자신감 있는 패션 취향은 편견을 깬 사람이 했을 때 더 돋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중간중간 있는 함정을 느낄 때가 있다. 뚱뚱한 여성을 향한 위와 같은 말들은
"저 사람 봐, 저 사람도 저렇게 꾸미는데."
"솔직히 저 사람도 저만큼 하는데 안 하는 사람들 게으른 거지."
같은 말들로 쉽게 변할 수 있다. 그 사람은 그저 관심이 많아서, 혹은 뚱뚱하다고 안 꾸미는 건 싫어서 가능한 한도 내에서 행동할 뿐인데 어느새 뚱뚱한 사람들의 대변하는 대표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을 기준으로 주변의 뚱뚱한 사람들을 독려하거나 혹은 다그치기도 한다.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칭찬하며 실재하는 편견을 가린다
뚱뚱한 사람을 차별하거나 비웃지 않고 지나치게 칭찬하는 것으로 자신의 편견을 가리려 하기도 한다. '멋지다. 당당하다. 분명히 찾으면 저렇게 크고 예쁜 옷 있는데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등의 말들을 한다. 위험한 신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편견 없는 사람' 타이틀을 획득하는 동안 편견들은 바뀌지 않은 채 뚱뚱한 사람들에게 과도한 심리적 무장과 평균 이상의 뷰티 케어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뚱뚱한 사람은 그냥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당당해야' 하며 '멋지고 사랑스러워야' 하며 '찾으면 어딘가 그 사이즈 옷이 있으니 찾아서 입어야' 하게 된다. 상황에 걸맞게 입고 꾸미는데도 편하게 입은 날에는 '너도 좀 꾸며봐' 같은 말을 듣곤 한다. 잘 꾸미는 뚱뚱한 연예인이 나오면 나 들으라는 듯이 힘주어 칭찬하는 말이 큰 소리로 이어진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 편견을 깨고 자유롭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멋지고 대단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띠는 대표성을 기준으로 삼고 ‘편견 없는 나’ 에 취해, 혹은 뚱뚱한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너도 노력하라' 고 비교하거나, 평균체중인 사람들이 입는 만큼 편하게 입었는데도 뜬금없이 '자신감을 가지라' 는 말을 하는 사례를 참 많이 봤고 겪었다.
자신감과 센스가 멋진 사람에 대한 단순한 호감과 칭찬이 아니라 '뚱뚱한데도 저만큼' 이라는 단서를 지나치게 의식한 말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지나치게 대표성을 부여해서 다른 뚱뚱한 사람들에게 노력과 긴장 상태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뚱뚱한 사람과 영화나 만화 등에서 캐릭터로서 뚱뚱한 사람의 액션 사이에서 이질감을 느낀 적이 없는가? 나도 참 자주 들은 말인데 '넌 뚱뚱한데도 다른 뚱뚱한 사람이랑은 다르다' 라는 말은 두 가지의 편견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뚱뚱한 사람 역시 건강, 체격, 체질, 목소리는 물론 각자 겪는 불편이 다 다르다는 개성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미디어에서 만든 뚱뚱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뚱뚱한 사람은 어떻게 그려지나.
- 음식을 입가에 묻히며 와구와구 지저분하게 먹으며 음식이라면 눈을 뒤집고 달려든다.
- 자신의 몸을 잘 컨트롤 하지 못해 물건을 다 부수거나 사람을 치며 불편을 끼친다.
- 굵고 둔한 목소리를 내거나 말을 어눌하게 한다.
- 사고방식과 언행이 둔하다.
- 예민하고 복잡한 캐릭터가 별로 없고 성격이 단순하게 그려진다.
어릴 때부터 접한 만화 속 뚱뚱한 캐릭터들도 그랬고 크면서 본 영화에서도 그랬다.
특히 뚱뚱한 분장을 했을 때 분장에 목이 짓눌리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목소리를 지나치게 거북하게 내며 만화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뚱뚱한 사람의 신체적 개성을 무시한 채 편견 속 캐릭터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컨텐츠 속 뚱뚱한 사람의 목소리, 행동, 언어 구사 등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아마 주변의 뚱뚱한 사람에게 '너는 좀 덜하지 않냐' 든가 '너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 않느냐' 라는 말을 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은연중에 컨텐츠 속 뚱뚱한 캐릭터와의 괴리를 인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몸은 내게 속해 있기에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고 나의 감각은 뚱뚱해졌다 해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살이 쪘다는 이유로 신체를 컨트롤하지 못해 물건을 부수거나 목소리가 두꺼우며 사고방식이 둔하고 성격이 무조건 무딜 것이라는 모든 편견은 개성을 무시한 채 왜곡된 이미지다.
당장 현재 각광받는 뚱뚱한 연예인들만 봐도 미디어에서 구현하는 뚱뚱한 캐릭터와 얼마나 큰 거리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 속 소수자들은 기존의 편견으로 뭉쳐있거나 혹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모든 좋은 것을 떠안기도 하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단지 몸이 뚱뚱하거나 통통하거나 말랐을 뿐인 독립적인,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진 캐릭터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몰개성적인 캐릭터라이징은 차별 받는 속성을 가진 사람에게 족쇄가 되기 쉽다.
참 쉬웠던 말들
말은 모든 게 쉽다. 비만은 질병 고위험군에 속하는 성질이긴 하나, 통통한 체형인 사람들도 쉽게 ‘운동 좀 해, 살 좀 빼, 꾸미고 다녀’ 라는 말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하다.
나는 단지 편하게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맛있게 식사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야식이나 간식을 먹는다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그만 좀 먹어라, 좀 꾸며라, 운동 좀 해라’ 따위의 말들을 들어야 했다. 혹은 운동을 지속적으로 하는 와중에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건강을 염려해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지만 뚱뚱하니까 당연히 체력이 떨어지고 분명 혈당이나 혈압, 생리 등에 문제가 있을 거라 넘겨짚고 ‘건강 관리를 하라’ 거나 ‘살 좀 빼야겠다’ 는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몇 번이나 듣는 건 반갑지 않다. 친한 사이에도 조심스러운 말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단순히 참견하고 싶은 마음’ 을 ‘그 쪽을 걱정해서’ 라 가장해서 상처를 준다. 덕분에 나는 내 몸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만 떠안게 되었다.
한 번은 다이어트 관련 책을 보다가 ‘고칠 수 없는 장애를 가졌거나, 흉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살이 쪘을 뿐인 당신’ 이라는 구절에 얼어붙기도 했다. 비만인 상대를 독려하기 위해 다른 이를 비교군으로 두는 무례함에 너무도 놀랐다. 스스로가 가진 조건과 환경을 체크하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다잡는 것과 다른 이를 낮은 기준점으로 삼고 우월감이나 안도감을 갖는 것으로 자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설령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더라도 입문서 등 정보를 제공하는 컨텐츠가 조언이나 위로랍시고 위와 같은 태도를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정상’ 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 역시 표준, 평균에 진입하기 위해 긴 세월을 노력했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나와 비만, 체질 등 신체의 역사와 나는 단 한순간도 분리될 수가 없었다. 질병 위험도가 높을 수도 있고 신체적,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 많았지만 이 성질을 가진 ‘나’ 에 대한 자기애 역시 존재하기에. 성질의 부정함과는 별개로 그 성질을 담은 그릇인 나를 그 성질에서 온전히 분리할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정상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나 말고도 수 많은 평균/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평균에 편입되기 위해 피땀 흘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위험하고 아프고 불편한 것이 해소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당장 어떤 성질에서 분리되기 힘든 사람 모두를 정상의 틀에 맞추기보다 그들의 삶에 대한 시선을 먼저 고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시스템과 제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상, 평균, 표준’ 에 가깝게 너를 만들어가자!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당장 그 정상, 평균에 함입되지 못하고 함입되기 위한 과정에서도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혹은 함입되지 않기로 한 사람을 위한 지금의 존중.
‘고쳐야 할 성질’ 이라 부르기 전에 그 사람이 현재 그 성질을 지니고 겪는 삶을, 그 삶을 살게끔 그냥 내버려두는 것.
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기에 나는 많은 기사나 칼럼 등에 ‘뚱뚱한 사람을 피하라!’ 등의 슬로건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건강하지 못한 식/음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주변인들에게도 비슷한 권유가 있긴 하지만 피하라는 권유 자체가 뚱뚱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오랜 차별 기제 중 하나였기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외양만으로 섣불리 건강상태가 나쁠 것이며 분명 식습관이 문제일 것이라는 추정을 받고, 그렇기에 주변인들과 라이프 스타일이 겹치지 않게끔 기피 당해야 한다는 것은 그간 뚱뚱한 사람이 충분히 겪어 온 차별 중 하나일 뿐이다.
튼 살 있는 애들이 왜 반바지를 입는지 모르겠어.
어떤 사건을 겪으며 강한 충격을 받으면 충격을 준 말이나 이미지만 남고 나머지는 증발하거나, 반대로 그 때 들었던 음악이나 냄새까지 강렬하게 기억한다.
이 경우는 전자였다. 누가 말 한 건지, 어디였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 계절조차 기억이 안 난다. 갑자기 반바지 이야기를 했으니 여름이겠거니 막연히 추측할 뿐이다.
튼 살은 그냥 성장과 변화가 몸에 남긴 흔적일 뿐이다. 원하면 지울 수 있지만 원하지 않으면 지우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솔직히 보기 좋은 건 아니지.”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비슷한 의견을 많이 접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보기 좋지 않은 것’ 이라고 합의된 것들은 가려지고 숨겨져야 하는가? 일종의 흉터라고 볼 수 있는 튼 살을 비롯, 신체 일부의 부족, 흉터, 계절에 따라 가리는 것이 곤란한 부분의 흉터 등은 모두 ‘누군가가 보기에 좋지 않은 것’ 이니 숨겨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마 잘 알 것이다. 단지 ‘보기에 흉하고 나쁘기 때문에’ 타인의 신체 자유를 구속하고 스스로 점검할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반대로 ‘어쩔 수 없었던 상황’, ‘고통스럽거나 슬프거나 감동적인 사연’ 을 담은 흉터는 ‘아름다운 훈장’ 등의 수식어를 지닌 채, '정상적인 구성원'의 칭찬과 박수 아래 ‘자랑하고 드러내도 될 것’ 을 허락 받기도 한다. 신체에 관한 자유를 누군가에게 감정적인 울림을 준 후에야 허락 받는다는 것부터 “솔직히 보기에 나쁘다.” 라는 말이 공허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저 “솔직히” 의 힘은 막무가내여서,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솔직히 보기 안 좋은 건 사실이니 수술을 하든지 안 보이게 하라.” 는 오지랖은 질기게도 살아남는다.
몇 초에서 몇 분 스칠 사이일 뿐인 낯선 이를 위해, 혹은 긴 시간 함께 하며 흉터 따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사이의 누군가를 위해 신체에 남은 흔적을 가려야 할 이유는 없다.
내버려 두든, 문신을 하든, 옷으로 가리든 그 어떤 선택도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다.
‘튼 살 가리기’ 보다 더 어려운 미션을 받은 기억이 있다.
“땀을 흘리지 마라.” 는 것이었다.
도저히 삽시간에 내가 이뤄줄 수 있는 주문이 아니었다. 나는 더위를 타는 타입이고, 여름에 몇 시간 걷다 보면 당연히 땀이 나기 마련이다. 당시의 계절과 내 옷차림 정도는 기억이 난다. 비가 오는 한여름이었고 나는 청치마에 흰 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습기와 더위에 이마에서 비 오듯이 땀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그러자 누군가가 “넌 진짜 땀 좀 그만 흘려.” 라고 했다. 한 여름에 흐르는 땀조차도 어떻게든 안 나오게 컨트롤 해야 하는 것인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빠졌고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그 날 내내 땀과, 땀을 비롯해 ‘보이면 부끄러운 것’ 으로 여겨지는 몸의 털들이나 내 민낯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동행과의 기억도 지워졌다.
땀이 많은 체질이어서 언제나 궁금했다. 땀을 흘리지 않지만 바쁘게 움직일 수 있는 모델들, 나와 체격이 비슷하지만 땀이 나지 않는 체질인 사람,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 얼굴 땀이 적은 사람 등이 어떻게 사는지 그렇게 살면 조금 살기가 수월한 지 너무나 궁금했다. 내게 땀은 언제나 장벽이었다. 대인관계를, 외출을, 구직을, 야외 활동의 많은 것을 방해했다. 심리적 위축은 당연했고 마치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문 것처럼 이 심리적 위축이 다시 식은땀을 불러오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위축된, 어딘가 이해하기 힘든 나의 행동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지만 이렇게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하나하나 설명하자니 스스로 너무 구차한 요소들이 몸과 마음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내가 가진 특질만큼이나 이 특질을 가만 두지 못하는 주변인들의 손가락질과 날카로운 말들이 나의 생의 경로 곳곳에 함정을 파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