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연대기(下) : 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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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 연대기(下) : 천국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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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천국은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삶이 궁금할 때가 있다. 나와 비교당하는 수 많은 날씬한 여성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새로 바뀐 놀이터 그네에 엉덩이가 끼어 아프진 않을까. 손잡이가 달린 버스 좌석에 앉을 때 불편하지는 않을까. 여름에 얇은 카디건을 걸쳐도 덥지 않을까. 이렇게 더운데 땀이 나지 않을까.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한 엘리베이터에 타도 아무렇지 않을까. 뷔페에서 밥 먹을 때, 동료들과 식사를 할 때 눈치가 보이진 않을까.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직장에서 별 난관 없이 옷을 걸칠 수 있었을까. 만원버스를 타고 어떻게 서서 장거리를 갈 수 있을까. 허벅지 사이에 흉터가 있지는 않을까. 여름엔 워터파크에, 겨울엔 슬로프에 가는 건 어떤 것일까 나와 다른, 내가 겪는 모든 곤란한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편하게 행동할까 너무나 궁금했다.

간혹 내 앞에서 피부를 잡아당기며 ‘살이 쪄 고민’ 이라며 푸념하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너무나 예쁘고 마른 여성 연예인에게 통통하다거나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도 했다. 몇 십 킬로그램을 빼고 싶어하는 나보다는 그래도 10 킬로그램 안 쪽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저 표준 체격인 사람만큼만 돼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큰 고민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다.

몇 년 전 운동에 한창 취미를 붙여 열심히 한 결과, 운동 기량 상승과 체중 감량을 동시에 해낸 적이 있다.

32인치 바지도 수월하게 들어갔고 상의도 소위 프리사이즈를 편하게 입을 수 있을 정도의 체격이 되었다. 그러나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의 큰 엉덩이와 두꺼운 허벅지가 ‘아쉽다’ 며 더욱 뺄 것을 권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정도면 됐다’ 라는 인증을 받지 못했다. 아무리 빼도 아무리 내 몸이 바뀌어도 나를 향한 지적은 계속될 예정이었다. 곧 있으면 ‘너무 빼서 가슴이 없어졌다’ 거나 ‘상체만 말랐다’ 거나 ‘얼굴살이 빠져서 늙어 보인다’ 등의 말들이 날아들 참이었다.

표준에 거의 이르렀으니 이제 나도 편해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한국 여성의 신체는 그 어디에도 쉴 곳이 없었다. 다만 뚱뚱하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니었다. 표준체중인 사람도, 가녀린 체형의 사람도, 비만인도 다시 그 안에서 얼마나 비율이 좋은지 얼마나 가슴이 적당한지, 몸이 어떻든 간에 얼굴엔 적당한 살과 ‘어린 이미지’ 를 얼마나 담고 있는지, 크기와 상관없이 굴곡이 얼마나 예쁜지 등을 끊임없이 시험 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옷 세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나는 구매한 적 없는 올인원 속옷이 덤으로 왔다. 내 속옷 사이즈에 맞춰서 상당히 큰 사이즈였는데도 시험삼아 입으니 편히 앉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올인원 속옷은 배와 힙을 조이고 강제로 내 허리에 곡선을 넣었다. 일상 생활은 커녕 잠시도 입을 수가 없어서 바로 벗어서 ‘언젠가 편하게 입으리’ 라는 다짐과 함께 옷걸이에 걸쳐서 책장 옆면에 걸어 두었다. 올인원 속옷이 시선에 걸릴 때마다 생각이 많아졌다. 당시 주문했던 내 팬티는 ‘헴 팬티’ 였다. 바지를 입어도 팬티 자국이 보이지 않게 해 주고 장시간 활동해도 엉덩이에 자국이 남지 않는다는 속옷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신체란 무엇인가. 뚱뚱하건 아니건 여성은 브래지어 끈 위나 아래로 튀어나온 살 없이, 미끈한 배와 허벅지, 털이 없는 팔과 다리, 적당히 봉긋하지만 젖꼭지는 없는 가슴을 가져야 한다. 평면 이미지에 자주 구현되는 매끈한 곡선을 현실의 여성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그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와이어가 든 후크 네 개짜리 브래지어를, 올인원 속옷을, 헴라인 팬티를, 제모를, 다이어트를, 승모근/종아리 근육 퇴축술을 하고 근육의 발달을 점검한다. 설령 위에 나열된 대부분의 조건을 ‘의상’ 으로 커버했다 해도 ‘여성미’ 를 해치는 승모근, 대퇴근, 이두박근 등의 근육 곡선을 감추기 위해 별도의 시술을 거친다.

근육의 발달 역시 ‘여성적인 근육’ 에 한해서 ‘멋지다’ 는 도장을 겨우 받는다.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이미지의 여성 연예인은 핫팬츠에 힐을 신는 광고에서 끊임없이 ‘종아리가 아쉽다’ 는 지적을 받았다. 정체를 맞춰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승모근을 보니 여자 아이돌은 아니다’ 따위의 말을 들어야 했다. 잘 발달한 대퇴근에 동물이 숨어 있다며 합성 이미지가 돌아다녔다. 근육이 발달한 여성에게 ‘무섭다’ 혹은 ‘정기가 빨려 죽겠다’ 등의 성희롱과 조롱이 끊이지 않는 사회이다.

내가 표준체중에 진입한다 해도, 아니 혹은 마른 체형이 된다 해도 내게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니 여성 누구에게도 없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이상향을 목표로 부여 받은 뒤 괴로워하고 있었다.

“뚱뚱하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이 있었다. 각자의 아픔을 나누고 말하고 누군가가 대신 화 내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위로를 나눴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걱정 말아라, 너 같은 체형의 여자가 ‘취향’ 인 남자도 분명 있다.” 고 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의 상처와 고민과 트라우마는 누군가에게는 페티쉬로 소비될 만한 소재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뚱뚱한 사람이라는 ‘존재’ 가 아니라 소수의 남성이 선호하는 페티쉬에 맞기 위해 어떤 특정한 때를 기다려야 하는 퍼즐 같은 것인가? 나의 상처는 ‘너도 수요가 있다’ 는 등의 말로 위로받아야 하는가? 왜 사회적으로 ‘매력이 없던 여자’ 로 구분되던 특징으로 인해 차별받은 기억을 꺼내자 그것을 ‘매력적인 수요’ 로 소비하는가? 너무 당황해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했다.

다만 뚱뚱한 여성 뿐인가. 안경, 작은 가슴, 유부녀, 장년층 여성 등 ‘여성성이 부족하다’ 고 규정지어진 여성들이 다시금 ‘모에’ ‘페티쉬’ 로서 소비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나. 단지 취향의 문제라면 왜 나는 나의 모욕에 대한 성토에도 ‘너 좋다는 특이한 남자도 있을 거다.’ 라는 말을 위로랍시고 받아야 하는가? 표준에서 벗어난 특징을 가진 ‘인간’ 이 받은 상처에 관해서는 왜 얘기하지 않는가? 왜 내가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해서 속상해 하는 여자’ 가 되었는가? 나는 내 신체 이미지에 대한 고민과 그로 인해 받은 상처마저 ‘남자’, ‘남자의 기호’ 로서 설명되어야 하는가?

차별 받는, 표준과 다른 특징을 가진 사람의 어두운 고민마저 아주 단순하게 수동적, 성적 기호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본 것은, 사회가 정한 매끈한 S자 곡선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과 당장 그에 미치기 힘든 여성들에게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잘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죽였다.

사실 살면서 깊은 상처를 남긴 몇몇을, 두고두고 마음 속에서 몇 번이나 죽였다. 본문과 같은 주제를 두고 나눈 다른 이와의 대화에서 내가 꽤 잔인한 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상대는 단지 ‘많이 미웠다. 욕 나왔다.’ 정도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죽여버리고 싶지는 않더냐?’ 물었더니 그런 생각까진 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상상만이지만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 나쁜 사람이 맞다. 어쨌든 복수하고 죽이는 상상을 자세히 오래도록 자주 했으니까. 어떤 때는 나는 왜 뉴스에 나오는 누군가들처럼 단순히 화가 난다는 이유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강한 모욕을 받았는데도 신체적 보복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지 고민하곤 했다. 고민의 카테고리가 조금 이상했지만 ‘분노’ ‘물리적 위협’ ‘보복’ 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그들과 나 사이의 간극을 재곤 했다. 단순히 내가 겁이 많아서 일수도, 그만큼 화가 나지 않아서 일수도, 끝내 못난 행동이 비집고 나오지 못하게끔 최후의 벽이 내 마음 속에 있어서 일수도 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환경,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다.

나는 심장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아픔에 시달리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 울거나 일상생활 대부분을 거대하게 비틀어버린 경험을 제공한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다양하게, 여러 번 죽였다. 미안하기도 그렇지 않기도. 나는 단순히 화풀이로, 혹은 살기 위해 그래야만 했다. 혹은 나 혼자 치러야 했던 각종 비용들이 너무나 아깝고 억울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래서 억울만 남은 못난이인가 아닌가 확신할 수 없지만, 당시의 나쁜 상황 자체보다 내게 주어진 주제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살고 있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뚱뚱한 사람이 하는 변명이겠지만, 나는 지금 뚱뚱함에서 나라는 자아를 분리할 수 없는 매일을 살아야 한다. ‘평균 체중의 나’를 ‘진짜 나’로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나는 가짜니까 많은 욕구를 견디고 참고 눌러야 하는 삶은 잔인하다.

뚱뚱한 내가 ‘과정’ 일 뿐이면 주변은 단지 ‘과정’ 일 뿐이니까 내게 끊임없이 평균에 나를 맞출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나중의 ‘진짜 나’ 가 아닌 지금의 ‘가짜인 나’ 를 향해 잔인한 말을 쉽게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뚱뚱한 나’ 로서 사는 현재를 지우게 된다.

시대별로 선호되는 체형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하거나 추구되어야 할 지향점은 아니다. 그 선호의 지속기간 또한 변화무쌍하며 무엇보다도 사람은 일생에 거쳐 많은 변화를 겪는다. 누구나가 평면 이미지에서나 구현 가능한 비율 좋고, 땀도 털도 셀룰라이트도 튼 살도 튀어나온 살도 없는 매끈한 20대 초중반 모델의 몸을 가질 수는 없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자신의 신체에서 자아를 분리할 수 없다. 매 순간이 지금의 자신이다. 일정 체형을 목적삼아 지금의 몸을 과정이나 수단으로만 삼게 만드는 사회의 압박은 혹독하며 그것을 혼자 헤치고 나아가라는 주문 역시 잔인하다. 단순히 체형을 떠나서라도 사람은 그저 각자의 삶을 살 뿐이다. 개성을 중요시하는 시대에서 신체적 몰개성을 요구하는 아이러니와 매일 싸워야 한다.

내 신체에 대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권리는 없다. 나는 누가 뭐래도 지금의 몸으로 살고 있고 살 수밖에 없다.

난 앞으로도 다양하게 변신하겠지. 모두가 그러하듯이.

모두 그저 각자의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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