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먹으면 되지

생각하다임신중단권

약 먹으면 되지

문여일

세 번의 복용

처음 사후 피임약을 복용한 것은 스물 한살 때의 일이다.

"콘돔 빼고 몇 번 왔다갔다 하기만 하면 안 돼?"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을 했던 당시의 남자친구는 나의 첫 성관계 상대였고, 나는 그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콘돔 없이 삽입했고 얼마 안 있어 덜컥 겁이 난 나는 얼른 빼라고 말했다. 어디선가 쿠퍼액으로도 임신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는 정말 몇 번 왔다갔다 하기만 했기 때문에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설득했지만 나의 불안함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산부인과로 향했다. 마치 벌을 주듯이 남자친구도 끌고 다녔다. 산부인과 의사는 내게 ‘그러면 안 된다’며 한 소리 했다. ‘그래, 이러면 안 되지.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 꾸중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두 번째로 약을 먹었던 것 역시 그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약 반년이 흐른 후였던가. 이번엔 서로 술에 취해 관계를 가졌는데, 그날따라 질외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럴리가 없는데. 예감이 좋지 않았던 나는 그에게 혹시 콘돔을 중간에 뺀 것이 아니냐고 다그쳐 물었다. 

그는 처음엔 아니라고 우기다가 ‘나 진짜로 임신하면 어떻게 할거냐’는 말에 결국은 시인했다. 너무 화가 난 나는 굳이 함께 산부인과를 가주겠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혼자 처방전을 받고, 혼자 약을 사먹었다. 그것이 내가 두 번째로 사후 피임약을 복용한 이유였다. 생리불순이 찾아왔다. 그와 당장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사후 피임약을 먹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몇몇 친구들이 처방전을 받기 위해 함께 병원에 가달라고 부탁하고, 약을 살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때만 해도 그랬다. 나는 한 마디씩 충고를 하곤 했다. 남자가 요구를 하면 단호하게 거절하라고.

세 번째로 사후 피임약을 복용한 것은 웃기게도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남자친구는 발기와 사정에 문제가 있었다. 자주 힘을 잃었다. 초박형 콘돔을 쓰든 뭘 쓰든 그랬다. 그는 원래 그렇다고 말했지만, 혹시 내 탓도 있는게 아닐까하는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관계 도중 가끔씩 질구에 콘돔 없이 그의 성기를 가져다 대곤 했다. 약간씩 밀어 넣기도 했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전혀 들어간 게 아니라고 우겼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마다 평소와는 강직도가 다르길래 역시 콘돔은 없는 것이 좋은 건가 싶었다. 그 몰래 경구피임약 복용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루는 그가 삽입구에 성기를 밀어넣는 행동을 꽤나 여러번 반복해서 했고 평소와 다르게 좋아하는 게 신체적으로도 느껴지길래 가만두었다. 내가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아 왠지 모르게 항상 미안하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사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몇 시간 안 있다가 약을 사러 나갔다. 경구피임약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건강에 좋지 않다며 말리는 것을, 계획없이 임신하는 것보다 낫다며 꾸역꾸역 먹었다. 

그는 사후 피임약 먹었으니 이제 콘돔 없이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배려도 없고 뇌도 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 며칠간 부정출혈(생리기간이 아님에도 하는 출혈)이 있었다.

사후 피임약

응급 피임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약은 복합 호르몬제다. 우리나라에 가장 처음으로 수입된 사후 피임약은 '노레보정'으로, 2001년 수입되었다. 쉬즈웰산부인과(신촌) 이연은 전문의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사후 피임약의 종류는 2가지이다. 둘 모두 내막을 유지시켜 임신시 착상을 돕는 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의 기능을 억제시킨다. 따라서 프로게스테론이 기능을 못하게 되면서 자궁내막이 탈락하고, 착상을 방해하여 임신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원리인 것이다.

사후 피임약의 효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72시간내에 복용해야 한다. 대략 ​ 24시간내 복용시 95%, 48시간내 85%, 그 이후 복용시 60-70% 정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보다 늦게 출시된 약제의 경우는 120시간내 복용시 피임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며 복용시간이 늦어도 피임효과에는 유의한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쉬즈웰산부인과(신촌) 이연은 전문의는 “어떤 약제든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내에 복용하는 것이 좋다. 또한 개개인에 따라 혹은 생리주기나, 사전 피임약과의 연계복용 여부에 따라 권고할 수 있는 약제가 다르니 피임 없이 성관계가 있었다면 가급적 빨리 병원에 내원하여 본인에게 맞는 사후 피임약을 처방받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또한 한 번의 생리주기에 1회 이상 복용하면 피임효과를 볼 수 없다는 점 역시 유의해야 한다.

물론 호르몬제이다 보니 부작용도 있다. 가장 흔한 것은 메스꺼움, 가슴통증, 아랫배의 묵직함, 생리주기의 변화, 부정출혈 등이다. 사후피임약을 복용한 열 명 중 세 명은 출혈을 경험할 정도로 부작용은 흔하다. 게다가 약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후 피임약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처방전이 꼭 필요하다. 이연은 전문의는 “일단 병원에 내원하여 본인의 생리주기 및 산부인과적 과거력을 살펴, 사후피임약이 필요한지를 상담 받은 후에 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 간혹 사후 피임약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질 경우, 다른 피임법이 있는지 상담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약을 세 번 복용하면서 개인적으로 사후 피임약에 대해 공부했다. 내가 먹는 것이고, 내 몸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니 어떤 약인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남자친구들은? 그들이 사후 피임약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건강에 안 좋아.’ 말고 그들이 사후 피임약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콘돔 없이 관계를 가지자고 졸랐고, 나의 불안함은 신경쓰지 않은 채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으며, 심지어는 관계 중 몰래 콘돔을 빼기까지 했다. 나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내 주변 친구들 중 ‘콘돔 잠깐만 빼면 안 돼?’라는 요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 약 먹으면 되지

실제로 피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과 남성의 말이 가지는 힘은 다르다. ‘콘돔 빼자’는 요구가 한번쯤은 졸라볼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상대가 이와 같은 요구를 하는 동시에 여성은 ‘혹시 내가 만족스럽지 않은가’하는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워낙 많이 들어온 콘돔에 대한 불만도 이에 한 몫 한다. 마냥 그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물론 여성이 스스로의 만족감을 위해 콘돔을 착용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경우 경구(사전)피임약을 복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자신 몸의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방법 중 하나인데다 사후 피임약에 비해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경구피임약을 챙겨먹는다고 해도, 성병 예방을 위해서는 콘돔을 착용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 역시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이 약의 복용이 인체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통일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경구(사전)피임약을 두고 논란이 많다. 또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약을 챙겨먹어야 하는 수고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피임 방법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으며, 함께 고민해주는 파트너를 만나기란 쉽지 않을테다. 그러니 눈꼽만큼도 신경 써주지 않는 남자친구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이 호르몬제를 꼬박꼬박 챙겨먹는다는 게 억울하다.

그래서 약을 먹지 않으면 실랑이는 다시 시작되고, 불안함에 나는 또 다시 사후 피임약을 먹는다. 이 과정에서 ‘남자친구’의 입김은 얼마나 작용했을까. 아무리 양보해도 50%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부인과에서 의사에게 혼나는 건 나다. 약을 먹는 것도 나고 부작용을 감당하는 것도 나다. 친구에게 한소리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나다.

‘사후 피임약’ 관련 논문을 검색해봐도, 여학생, 임산부, 가임기 여성, 미혼모 등 여성의 사후피임약에 대한 지식, 사용 태도 연구가 대부분이다. 사후 피임약의 일반약 전환에 대한 기사에서는 항상 이런 논문이 활용된다. 논문 조사 결과를 언급하면서 덧붙이는 말은 ‘여성들이 피임을 더 가볍게 생각할 것’이라는 우려다.

그러나 이런 점을 지적하기 전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여성들이 피임약을 먹는 선택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연 ‘약 먹으면 되지~’하는 ‘여성들의’ 안일함이 그 이유인가? 아니다. 오히려 피임 실천의 과정을 짚어보면, 권력관계의 우위는 남성에게 있다. 이런 점에서 사후 피임약에 대한 연구는 그 대상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남성의 사후 피임약 관련 지식이나 인식 태도를 연구하는 것이 먼저다. 여자친구에게 ‘콘돔 미착용’을 권한 적은 얼마나 있는지, 그것이 여성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가는 알고 있는지, 사후 피임약이 여성의 몸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인지하는지, 등등.

이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는 감히 ‘여성의 사후 피임약에 대한 가벼운 태도’ 따위를 운운할 수 없다. 모두 아는 사실이겠지만 섹스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참, 이건 알고 있었는지? 피임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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