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는 이민자의 나라다. 원주민 마오리가 살던 땅에 유럽인이 이주해왔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해외에서 태어난 많은 사람이 뉴질랜드로 향한다. 작년 한 해 동안 뉴질랜드의 순 이민자 수는 약 5만 명이고, 뉴질랜드에서 매년 태어나는 아기의 숫자는 약 6만 명이다. 순 이민자 수와 출생자 수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이대로라면 여기서 태어난 사람과 여기로 이주한 사람의 수가 비슷해질 것이다. 순 이민자가 아니라 뉴질랜드에 이민해 들어온 사람의 수만 따지면 작년 기준으로 15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가기도 할 테니 조만간 이민자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이민자의 수와 꼭 같지는 않겠지만, 뉴질랜드 땅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의 비중은 이미 인구의 27%를 차지하고, 이 땅에 유럽인과 마오리 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아시안은 인구의 15%다.
외국인으로 살기
저마다 각자의 사연으로 뉴질랜드에 온다. 나는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하지 못했을 경험을 하고, 시야가 넓어지는 걸 느낄 때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으로 사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다면, 시민권에 따르는 여러 법적 권리가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내가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의 권리가 사각지대에 있다는 문제를 알고도 내 이슈가 아니라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꼭 즐겁고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다. 다시 못할 경험이지만 그런 경험을 꼭 해봐야 하는 건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마치 허니문처럼 이 나라의 모든 점이 사랑스러운 시간도 금세 지나간다. 살다 보면 한국이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게 느껴지는데, 굳이 왜 여기까지 와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다.
뉴질랜드의 이력서에는 나이와 성별을 쓰지 않고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런 고무적인 사실에 감탄하지만 이내 이름에서 어느 정도 출신국과 피부색, 때로는 성별까지 짐작할 수 있고, 경력을 통해 나이대를 어림잡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쓰는 언어와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차별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영어를 못 하고 원하는 직군에 인맥이 없으면 여전히 취직에 불리한 건 마찬가지다. 렌트할 집을 구할 때도 보증할 추천인과 안정적인 직업 및 어느 정도의 소득이 필요한데, 그러한 자원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태어난 백인일 것이다. 물론 이곳에 인종 차별이 있다고 해서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화장실과 숙박시설 내 몰카로 불법 촬영을 하고, 여성들이 매일같이 맞거나 살해되는 한국과 비교할 수는 없다. 적어도 내 위치에서는 단순히 장단점이 있다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이곳이 백번 낫다. 그렇다고 내가 쉽게 뉴질랜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곳에 왔다고 해서 명예 백인이 되거나 키위들의 성품을 닮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한국 사회의 이슈가 아득하게 느껴지고 실재하는 위협들에 무감각해질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키위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한국인도 키위도 아닌 제3의 이방인 정체성이 탄생한다. 그런 이유로 힘들게 영주권을 받아놓고 향수병에 한국으로 ‘역이민’을 하는 사람들과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민 2세대들이 탄생한다. 이들은 뿌리를 찾고 싶어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각자의 이야기
뉴질랜드는 미세먼지가 없고 하늘이 맑고 산이 푸르고 어디에서나 바다가 가까운 나라다. 누구나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 아닐까? 한국처럼 경쟁하며 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삶의 질을 보장받을 수 있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 환경도 좋고, 영주권을 가진 내국인이라면 대학 등록금도 저렴하다. 빈곤층과 노인에 대한 복지도 잘 되어 있다. 노후에 받는 국민연금으로 어느 정도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집이 없으면 월세도 보조금이 나오므로 불안과 걱정도 덜하다. 감기나 몸살에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빠르고 편리하지만, 뉴질랜드는 큰 병에 걸렸을 때 비용 걱정 없이 치료와 간호까지 받을 수 있는 나라다. 사람이 어디에서나 만족하지 못하는 건 비슷한지, 사실 나는 여기가 좋고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오히려 태어난 국가로 돌아가거나 이곳 생활에 도무지 만족하지 못해 다른 나라로 가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봤다. 그중 몇몇 친구들의 사례를 소개해보겠다.
내년에는 한국에 살고 싶어. 한국은 정말 놀라워.
A는 프랑스 출신 백인 여성이다. 몇 년 전 프랑스의 경기가 침체해 미래가 없다는 생각에 다른 곳에 살고 싶어 이민 길에 올랐다. 20여 년 간 금융권 직장에서 일한 경력으로 영주권을 받고, 뉴질랜드에서 남편, 아들, 고양이 한 마리와 생활한 지 4년 정도 되었다. A는 지역 영어 공부 모임에 참여하며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취미로 빵을 굽는다. 뉴질랜드에서 출신국의 경력을 살려 사무직에 취직했지만, 최근에는 일을 그만두고 취미였던 베이킹을 정식으로 배워 베이커로 파트타임 잡을 구해 일한다. A는 휴가를 받으면 주로 여행을 다녔다. 뉴질랜드 국내 여행도 많이 다니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나라들을 여행한다. 최근에는 몇 번의 여행을 통해 한국에 반했고, 뉴질랜드의 삶도 좋지만 언젠가는 깨끗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고 편리한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한국에서는 열차가 오기로 한 시각에 정확하게 도착하고, 밤늦게까지 거리가 안전하고, 서비스가 우수하고 음식이 훌륭한 식당이 많고, 택배가 쉽게 분실되지 않는다는 점에 매우 감탄하면서 말이다.
한국에는 학원이라도 있지, 여기는 무조건 과외야.
한국에서 온 B는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녔다. 일찍 결혼해 커리어를 포기하고 결혼과 육아를 담당하다가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남편을 설득해 뉴질랜드로 왔다. 기술직이었던 남편의 경력으로 영주권을 받았고, 두 딸과 이곳에서 3년째 생활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남편의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독박 육아를 했으나, 이곳에서는 남편도 오후 네 시 전에 퇴근하므로 육아와 집안일을 분담할 수 있다. 시댁의 간섭과 각종 집안 행사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B는 여기 온 이후로 한국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그럴 틈이 나지 않았다. 뉴질랜드는 땅이 넓어서 학군 내에 있는 학교여도 거리가 멀어서, 아직 버스를 탈 줄 모르는 아이들을 운전해서 등하교시킨다. 아이들 학교생활을 위해 챙겨야 할 것도 많다. 큰딸의 합창 공연을 관람해야 하고, 둘째의 릴레이 달리기 시합에도 참석해야 한다. 급식이 따로 없어서 매일 도시락을 싸야 하고, 학부모 회의도 많다. 부모의 참여가 요구되는 행사도 많아서 이번에도 특별 활동 시간에 한국어 클래스를 직접 맡아서 진행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둘째는 뉴질랜드에서 자라서 신발을 잘 신지 않는다. 대회가 있을 때가 아니면 답답한 운동화는 벗어 던지고 맨발로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그런 아이를 볼 때면 이민을 오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교육비가 많이 들고, 과외 선생님의 집까지 일일이 아이들을 실어 날라야 할 때면 오히려 한국에서보다 부모 노릇이 수고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14세 미만의 어린이를 혼자 두는 게 불법인 뉴질랜드에 방학은 어찌나 많은지 맞벌이를 하는 부모들은 학교 방학 때마다 휴가를 내기까지 한다. 한국처럼 심하지는 않지만, 이곳에도 명문 학교가 있다. 좋은 학군을 포함하는 지역은 집값도 더 비싸다. 일부 과목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사교육이 필요한데, 학원이 없어 개인 교습 밖에 선택지가 없다. 비용도 비싸지만, 딸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차 안에서 두시간을 멍하니 기다리는 일도 고역이다. 여기는 대부분의 정보가 영어로 되어 있기에, 쉽고 편리하게 교육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한국 엄마들 사이의 네트워크도 포기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받아온 가정통신문을 들여다볼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 뉴질랜드의 경제 규모가 크지 않아 아시안이고 이렇다 할 특기도 없는 자녀들의 취직도 걱정이다. 여기가 아니라 호주로 갔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여기 재미없어요. 나중에 한국 가서 살 거예요.
역시 한국에서 온 C는 레즈비언이다. 한국에서는 외식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오래 일하다가 뉴질랜드에서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매니저 자격증을 땄다. C는 이곳에서도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하루에 8~9시간씩 일하며 바쁘게 지낸다. 오직 생계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이 일할 필요가 없지만, 혼자 살아서 집에 있으면 마땅히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고 쓸쓸한데, 출근하면 오히려 동료들도 만나고 밥도 잘 챙겨 먹어서 활력이 생긴다. 데이트 앱에서 만난 한국 출신 레즈비언들과 연애를 몇 번 했고 처음에 왔을 때 셰어하우스에서 함께 살던 한국 친구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한국으로 돌아갔다. C는 뉴질랜드에서 10년 이상 생활했고 영주권과 시민권까지 받았지만, 이곳 생활은 외로워서 나중에는 꼭 가족들이 있는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고 마음 맞는 친구들도 사귀기 어려워 이 나라에는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다. 또한 이곳에서 아무리 오래 일했다 해도 일터에서 아시안이고 영어를 잘 못 한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날도 많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에 취직한 친구들이 부럽다. C는 특별한 취미 생활을 하지는 않고 쉬는 날에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 뉴질랜드에 온 뒤로 계속 일을 많이 해서 지금은 비싼 렌트비를 내고 넓은 집에 살며, 매일 배달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지만, 여전히 생활이 지루하다. C는 이곳은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면 정말 할 게 없는 나라라고 말한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내년에는 유럽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려고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뉴질랜드에서는 워킹홀리데이가 한국에서만큼 인기 있는 게 아니어서, 비자를 얻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래도 한국에 가면 비자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요.
D는 한국에서 태어나 십 대 때 부모님을 따라 뉴질랜드로 왔다. 학교에 잘 적응한 편이고 키위 친구들도 많지만, 정서가 맞지 않아 한국에서 온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린다. 가끔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기서 태어난 백인들보다 유학이나 워킹 홀리데이로 온 한국인들과 더 생각이 잘 통한다. 비교적 어릴 때 와서 영어도 잘하고, 학교 공부도 꽤 하지만 졸업하고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뉴질랜드에서는 청소년 때도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꽤 있어서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해봤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다. 뉴질랜드의 학교는 중고등학교여도 100% 출석해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 학교를 빠지고 시티로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할 만큼 영화를 좋아하지만 일이 되니까 또 달랐다. D는 한국 뷰티 산업에 관심도 많고 쇼핑도 좋아해서 지난 방학 때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여행을 계기로 졸업 후에는 한국에 돌아가 살고 싶어졌다. 이민 후 처음으로 가본 한국에는 싸고 예쁜 물건도 많고, 자연만 있는 뉴질랜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멋진 곳이 많았다. 홍대나 명동에는 밤늦게까지 놀 수 있는 곳도 많고, 백화점이나 놀이공원도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놀랐다. 특히 끝없이 연결되어 있고 수많은 식당과 옷가게가 입점해있는 지하상가나, 전체 건물이 모두 통로로 이어져 있어 비를 맞지 않고도 역 하나 정도의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은 뉴질랜드에서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D는 즐길 거리도 많고 일자리도 많은 한국을 두고, 청년들이 자꾸만 뉴질랜드로 유학이나 워홀을 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D는 이곳에 온 지 8년도 넘었지만, 사실은 서류상으로 아직 외국인이다. 부모님이 취업비자로 뉴질랜드에 와서 영주권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가 끝나면 더는 부모님의 비자 아래 있을 수 없고, 이 나라에 더 머무르고 싶다면 별도의 비자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D는 그동안 다른 친구들과 달리 늘 비자 때문에 고민하고 불안했던 생활이 지겹고, 이곳의 단조로운 일상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홀가분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어릴 때부터 뉴질랜드에 와서 한국 생활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낯설고, 간단한 일상 대화는 가능하지만 어려운 대학 수업을 한국어로 들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게다가 그동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랐기에, 특유의 상하 관계가 두드러지고 경쟁도 심하다는 한국 사회가 막연히 두렵다.
여기서는 외국인 노동자라서 서빙밖에 못 하잖아.
역시 한국에서 온 E는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가 눌러앉은 경우였다. 한국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재충전 휴가를 왔다가 뉴질랜드에 반했다. 영어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해서 워홀 기간에 일하던 카페에서 신뢰를 받아 워홀이 끝나고도 취업비자를 받아 체류를 연장했다. E는 그 카페에서 약 4년 동안 일했다. 바쁘고 규모가 큰 카페여서 비자를 지원받기는 수월했지만, 그만큼 노동 강도가 높아 힘들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업무의 특성상 일이 많을 때는 숙련되지 않은 사람이 매끄럽게 처리하기 어렵고, 오래 일한 E가 빠지면 그 빈자리가 크다. 그 때문에 E는 내내 바쁘고 힘든 시간대에 주로 배치됐다. 업무의 숙련도에 따라 임금이 조금씩 오르긴 했지만, 임금이 낮은 직군이라 아직 영주권을 받을 임금 조건을 충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조건을 충족하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기엔 이민법이 매년 바뀌는 통에 그마저도 불투명해졌다. 상황이 악화하자 사랑에 빠진 듯 뉴질랜드를 찬양하던 마음도 점점 옅어져 갔다. E는 이게 사랑이라면 콩깍지가 드디어 벗겨지고 있는 거라고도 말했다.
E는 반복되는 뉴질랜드 생활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것도 숨 쉬듯 당하는 인종 차별도 지긋지긋했다. 20대 내내 세계 여러 나라로 어학연수를 다니고 여행하며 지냈던 E는 이렇게 즐길 거리가 없는 나라는 처음이라고 말한다. 결국 E는 ‘나는 이곳에 평생 살지는 못하겠구나.’ 하며 뉴질랜드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E의 사연의 결말은 조금 놀랍다. E는 뉴질랜드를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고 남편과 둘이 몇 년간 지냈다. 그러다 한국 생활에 다시 싫증을 느끼고 아이를 낳아 키울 만한 나라를 찾기 위해 이민을 알아보다가 또 한 번 뉴질랜드를 선택한 것이다. 이 나라가 재미는 없지만, 평화롭고 조용해서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기에는 딱이기 때문이다. E는 이번에는 남편과 함께 뉴질랜드에 와서 이민을 위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영주권을 받게 된다면 아이를 낳을 생각이다.
여기 온 건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야.
아들한테 미안한 것만 빼면.
한국에서 온 G는 아이를 낳고 영어 교육을 위해 뉴질랜드로 왔다. 이곳에서 아들, 딸과 남편과 반려견과 함께 지낸다. 가족 모두 영어는 못하지만 남편이 한국에서 요리를 했던 경력을 활용해 관광 산업이 발달한 뉴질랜드에서 취업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었고, 온 지 약 3년 만에 영주권도 수월하게 받았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부족함 없이 지낸다. 한국에서라면 꿈도 못 꾸었을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 그러나 G도 처음부터 이곳 생활에 만족했던 건 아니다. 네 가족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말도 안 통하는 나라에 온 것이라, 일단 저지르긴 했지만 처음 몇 달간은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G는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 외식업에 종사하느라 휴일도 불규칙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의 도움 없이 어린 아이 둘을 키우는 시간은 고통이었다. 조금 자란 뒤에 맞벌이를 시작했는데 아들이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사고를 치고 다녀 금세 일을 그만두었다. 어느 날 남편이 지인을 통해 뉴질랜드에 일자리를 얻었고, 아들을 앉혀놓고 외국 나가서 살고 싶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길래, 큰 기대 없이 도피하듯 이민 길에 올랐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고 외국에 나가 살아본 적도 없는 데다가 자신감도 없었던 G는 혼자서는 커피 한 잔 사 먹으러 나가지도 못하고 아이들과 함께 방 안에만 있었다. 풀과 나무가 흔들리는 것 외에는 변화가 없는,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창밖 풍경을 몇 시간째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남편은 여기서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일을 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남편의 일자리도 자리를 잡고 나서는 조금씩 일상은 안정됐지만, 이번에는 학교와의 커뮤니케이션도 문제였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학부모여서 하나하나가 힘들었고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시간이 흐르며 한인 교회도 나가서 정보도 얻고 아는 사람도 조금 생기면서 영어 때문에 더는 주눅 들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다 자란 아이들이 연말정산이나 자동차 보험 같은 정보도 대신 알아봐 주고 영어로 오는 전화도 받아준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고맙고 미안하다. 특히 영어를 못하는 부모 때문에 어린 나이에 자동차 수리나 식당 예약과 같은 일상 업무를 도맡고, 가족끼리 함께 놀러 가도 문제가 생기면 늘 먼저 나서서 수습하며 철이 빨리 들었던 아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G는 아들을 위한다고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아들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느낀다. 한국에서처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고를 치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잘하던 과목도 영어로 배우느라 흥미를 잃고, 일상에 적응하느라 진로 고민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네이티브 친구들의 영어 실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어릴 때부터 다양한 활동을 하며 자신의 흥미를 찾는 이곳 친구들과 달리 한국에서 지내며 정해진 커리큘럼만 배운 탓에 진로 결정이 늦어져 수강 신청과 이수 과목이 꼬여 상급 학교 진학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엄마가 이곳 입시와 교육에 관한 정보도 부족해서 다각도로 고민하며 진로에 다양한 선택지를 제시해주지 못했던 점도 늘 미안하다. 뒤늦게 필요한 과목의 과외를 붙이기는 했지만, 또래 친구들은 중학교 때부터 꾸준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걸 알고 있어서 늘 마음이 조급하다. 그러나 아들에게 미안한 점만 제외하면 이곳 생활에 싫은 점은 없다. 강이 보이는 한적한 카페 야외석에 앉아 커피를 마실 때면, 이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절대 돌아가기 싫어. 집에서 얼른 결혼하라고 난리야.
중국에서 온 레즈비언 여성인 H도 뉴질랜드의 삶에 만족한다. H는 유학생으로 뉴질랜드에 왔다가 학업을 마치고 이곳에서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고 영주권을 준비하며 지낸다. 휴일에는 뉴질랜드 곳곳을 다니며 여가를 즐긴다. E는 오클랜드의 웬만한 맛집은 다 꿰고 있고, 중국식 요리점이나 중국어로만 제공되는 큐레이션 서비스나 음식 배달 서비스도 이용할 수 있기에 유독 정보가 많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들을 만나 늦게까지 하는 한국 술집이나 중국 술집에서 술자리를 갖는 것도 좋아한다. 서핑과 같은 수상 스포츠도 좋아해서 여름에는 퇴근하면 바닷가로 달려가고,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는 꼭 한 달씩 중국에 가서 가족들을 만난다.
뉴질랜드에 중국 출신 이민자의 수가 늘어나며 중국어 사용자에게 좋은 기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H는 중국 교민들끼리는 서로 협력하며 영주권을 받게 해주려고 최대한 편의를 많이 봐주는 편이고, 실제로 승인도 많이 나고 있기 때문에 영주권을 받지 못할 두려움은 별로 없다고 한다.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집에서 충분히 금전적으로도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지금은 영어 공부와 업무에 집중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여행을 다니고 즐겁게 보낸 시간이었기에 후회는 없다. 이곳에서 영주권을 받아 중국인 및 여러 이민자를 대상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하는 꿈이 있다. H는 이곳 생활에 만족하지만, 나중에 영주권을 받는다면 뉴질랜드와 호주는 교류가 잘 되고 있고 이주도 어렵지 않으니 호주에 가서도 살아보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과 아이돌과 댄스를 좋아하는 H는 이곳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여자친구를 만났고, 함께 한국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해보니 한국에서도 살아보고 싶고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도 싶지만, 중국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중국에 돌아가면 부모님으로부터 결혼 압박을 받아야 하고, 가족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는 것이 싫다고 한다.
충분히 고민하고
시도하라
여행도 한 번 가보지 않은 나라에 덜컥 살겠다고 도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다행히 나는 뉴질랜드와 잘 맞았지만,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수많은 비용을 낭비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는 워홀로 왔다가도 일 년의 짧은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뉴질랜드는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외로울 수도 있는 나라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평화로운 일상일 테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민을 통한 내 미래가 위 사람 중 누구의 모습이 될지, 아니면 누구와도 닮지 않은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이민을 선택하지만, 그들의 이민 생활은 모두 서로 다르다.
물론 그렇기에 내 이야기 또한 정답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다. 가끔은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자원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선택한 길에 몇백만 원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몇천만 원이 필요해서 전략을 바꾸기도 하고, 살다 보면 영어가 늘 줄 알았는데 전혀 늘지 않는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그랬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해볼 수 있을 만큼은 자원이 있었기에 도전할 수 있었고, 두려워서 망설였다면 더 후회했을 것 같다. 지금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는 생각에 내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충분한 고민 후에 시도한다면 어쩌면 나의 삶의 방식에 잘 맞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