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이민갈까? 4. 차원이 다른 외로움

생각하다뉴질랜드워킹홀리데이

언니, 우리 이민갈까? 4. 차원이 다른 외로움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어느 날 마침내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즐거운 신혼여행을 마치던 날, 파트너는 떠나고 나는 뉴질랜드 땅에 남았다. 이민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니 참아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행 비행기가 출발하던 그 순간, 나는 모든 게 막막해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사람과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면 세상에 없는 기분이 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는 매일 꼭 붙어있지도 않았고, 바쁠 땐 겨우 통화만 할 때도 많았다. 그때랑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참 달랐다. 헤어진 것도 죽은 것도 아닌데도 곁에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거나 힘들어도 절대로 당장 달려와 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없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연고도 없는 외국 땅에 갑자기 살기로 했으니 친구도 가족도 없는 게 당연한데, 이런 외로움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봤다. 한국과 뉴질랜드는 약 9,946km 떨어져 있다. 반경 약 일만 킬로미터 이내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삶을 당장 내일부터 홀로 감당해야 했다.

무섭고 막막해서

입술을 깨물어도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살면서 해외 유학도 출장도 한번 가본 적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에 열흘쯤 있었지만, 그동안 영어를 한마디도 안 했던 걸 깨달았다. 식당에서 음식을 시킬 때도 나는 늘 주문을 슬쩍 떠넘겼다. 우리는 한국에서도 늘 그랬다. 나는 주문이 복잡해 보이는 밀크티를 애초에 먹지 않았고, 파트너는 괜찮다는 나를 위해 억지로 대신 주문해줬다. 나는 언제나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머리를 자를까 자르지 말까, 사소한 것 하나까지 애인에게 의지했다. 이런 의존성이 문제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다. 바꿔보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오랫동안 익숙해진 습관이라 잘 안 됐다. 파트너는 일상에서 나를 돕는 걸 기뻐했고, 나는 이대로 있는 게 편해서 자꾸 도돌이표였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숙소에 돌아와 한참을 울다 용기를 내어 아래층 카페에 내려갔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랬는지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직원이 아이스냐고 몇 번 되물었고, 나는 더 작아진 목소리로 소심하게 여러 번 대답했다. 그때는 뉴질랜드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별로 없다는 걸 몰랐다. 훗날 여기서 만난 친구는 ‘커피를 아이스로 먹는 건 콜라를 뜨겁게 먹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했을 정도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래서였는지 그날 나는 말로만 듣던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직원이 한참을 고개를 갸우뚱하며 건넨 그 커피는 그냥 뜨거운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반쯤 채운, 종이컵까지도 다 젖은 커피였다. 한국이었다면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겠지만, 말 못 하는 외국인이었던 나는 그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들고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얼어 죽더라도 커피를 아이스로 마시는 한국인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이후에 여기 살면서 의사소통을 잘 못 해서 생긴 수많은 일에 비하면, 그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지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먹게 된 것뿐이었지만, 그날은 고작 그 일이 나를 더 절망하게 했다.

혼자가 될까 봐 혼자가 되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냥 두려워하는 수밖에 없다. 만약 상어가 쫓아오고 있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힘껏 잡아먹힐 사람이다. 어차피 잡아먹힐 거, 가만히 앉아서 잡아먹히기보다는 한시 빨리 직접 결정하는 게 낫다. 뉴질랜드행을 결정하던 시기에 나는 많이 우울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혼자를 선택했다. 결국 혼자 남겨질 것 같아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서 황급히 선택해버렸다. 그 결과로 이제 정말 어쩔 수 없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모든 걸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 혼자 결정하고 책임지는 일의 연속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언제나 외로웠다. 다른 방식으로 지독하게 외로웠다. 각자 바빠지면서 가까웠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예전처럼 시간을 잊은 채 현재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늘 혼자 뒤처져있는 것 같았다. 다들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잘 알고 있는데 나만 그걸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비참하고 씁쓸한 감정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끊임없이 어딘가에 속하려고 하다 결국 좌절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나는 획득할 수 없는 정상성을 획득하기 위해 늘 분투했다. 학교 다닐 때 알던 친구들은 하나둘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 커리어를 쌓아가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오랜 친구들이어서 내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랑 비슷한 삶을 택한 사람은 없다. 페미니즘을 배우며 만난 친구들은 용감하게 신념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학자나 법률가가 되고, 작가나 시민 사회 활동가가 되어 각자의 필드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혹은 비슷한 꿈을 꾸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러나 나는 그 무엇도 자신이 없었다.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지만 많은 업무를 병행하며 연구실에 살다시피 할 자신은 없었고,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과감하게 생업을 놓고 많은 시간을 투자할 용기가 없었다. 직업 활동가가 되고도 싶지만, 남편도 없이 적은 월급으로 생활할 자신이 없었고, 적당한 회사에 다니며 돈을 모으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예민한 인간이었다. 일상에서의 감수성 온도가 너무도 다른 공간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현실과도 타협할 수 없고, 그렇다고 꿈을 위해 정진할 수도 없으니, 더 나이를 먹으면 어떻게 살게 될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좋은 친구들이 늘 함께 해주고 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했고 페미니즘 공동체도 만났고 축복받은 사람이지만, 그게 내 노후를 보장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도 문득 외로워지곤 했다.

질투와 욕심

한국에서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가 수치스러웠다. 나이에 걸맞은 가방을 갖지 않으면 신경이 쓰였고,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출근할 수가 없었다. 계절이 바뀌면 제모를 해야 했고, 발의 각질을 제거해야 양말을 벗고 다닐 수가 있었다. 그 모든 게 강요되는 꾸밈 노동인 걸 이미 진작 알았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시선을 감당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맞서 싸울 에너지와 건강한 정신조차 갖지를 못했다. 대단한 사람 말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되기가 너무 어려웠다. 가만히 있을 뿐인데 자꾸 뭘 안 하는 유별난 사람이 됐다. 취직을 안 해도 걱정거리가 되었고, 결혼을 안 하면 또 금세 튀었다. 연애를 안 하거나 여행을 안 가는 것까지도 이유가 필요할 정도였다. 그 모든 걸 따라가기 너무 벅찼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것저것 권유하는 주변 분위기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나는 자아를 물어뜯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내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비교하고 또 좌절했다. 질투가 많아서 내가 갖지 못한 것만 눈에 보였고, 욕심이 많아서 아무것도 타협할 수가 없었다. 이번 판은 내가 졌고, 이 사회에서는 약간 패배자고, 더는 잘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런 삶에 만족하기에는 너무 많이 노력했는데, 조금 더 나은 삶을 갖기에는 아직도 멀었다. 되고 싶은 나와 될 수 없는 나의 간극을 계속 느끼며 살아간다. 잠깐이라도 잊으려 들면 온 세상이 나에게 그걸 지속해서 다시 인식하게 만든다. 차라리 공기를 읽지 못하는 편이 낫다.

삐딱한 조바심, 한국식 외로움

모든 게 똘똘 뭉쳐 삐딱한 조바심이 된다. 예쁜 봄이 와도 좋은 날씨를 단순히 즐길 수가 없다. 수많은 해시태그가 떠오르고 나도 빨리 어디에 가서 벚꽃 인증사진을 찍어야 할 것 같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설레는 사랑이 이제 없는 내가 안쓰러워진다. 우울할 때는 좋아하는 책도 읽을 수가 없다. 이토록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는 재능과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성실한 성품을 가진 작가에게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하루하루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자꾸 커진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걸 아는데, 속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말만 그렇지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며 네일아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느끼다가, 페미니스트 친구들을 만나 다시 손톱을 칠한 걸 후회한다. 신자유주의의 주문을 성실하게 이행하며 살고자 영어 학원을 등록했다가도, 같은 시각 친구들이 모두 페미니즘 강의에 가 있는 걸 보면 내 선택이 후회된다. 그런 내 우유부단한 성격까지도 지긋지긋해져 숨기고 싶다. 한국에서의 외로움은 뭘 해보려고 해도 자꾸 나만 안 되는 외로움이다. 어느 경계 어디쯤에서 자꾸만 탈락하는 외로움이다. 불행한 나를 보면 웃음을 삼킬 얼굴들이 떠올라, 드러내놓고 울지도 못하는 삭막한 외로움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어떻게 거기에서 살 생각을 다 했느냐고들 한다. 사실 바닥에 있었고 그냥 물을 엎지른 기분이다.

여기 온 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아직 모른다. 그냥 이미 벌어진 일이다. 결정했기에 별 생각 없이 와버린 것처럼, 이미 와버렸기에 또 별 생각 없이 계속 살고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처럼 똑같이 일하고 넷플릭스 보고 트윗하며 산다. 차이점이 있다면 약속이 한 개도 없다는 것뿐이다. 덕분에 일주일 빨래를 모아도 일할 때 입는 유니폼 외에는 티 하나 바지 하나 정도만 나오고, 몇 달간 퇴근하면 목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가끔 내가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으면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겠구나 싶어 밑도 끝도 없이 두려워질 때가 있기는 했다. 이미 바닥에 있으면 더 내려갈 수조차 없듯이, 나는 여기서 겪는 모든 어려움을 한국에서 이미 겪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어차피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장을 머릿속에서 만들어야 했다. 돈 계산을 잘 못 했고, 숫자로 된 날씨를 피부로 느껴지는 날씨와 잘 연관 짓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 데 왜 나만 못하냐는 자책을 계속했다면, 여기서는 뉴질랜드라서 못한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다. 그렇다. 이번에도 변명을 위해서 도망친 건가 보다. 외국에 간다고 했을 때 듣던, 도전이니 자유로운 삶이니 하는 말들이 전혀 내 것 같지 않았던 이유가 그거였다. 나는 독립적으로 일상을 잘 꾸려나가지 못하는 것에 관해 합리화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게다가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도 단단히 합리화할 좋은 기회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아무도 남들처럼 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두가 남들처럼 살라고 그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남들도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들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하고, 남들의 남들도 남들처럼 살려고 하면서 남들처럼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남들의 남들의 남들을 계속 따라가면 누구는 나를 보면서 ‘남들은 워킹홀리데이로 뉴질랜드도 간다’고 하며 ‘남들’이라고 부른다. 진짜로 우리 엄마의 친구의 딸이 그랬다. 우리는 남들의 사정을 절대로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남들의 인생이 좋아 보이나 보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나는,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고 차라리 영원한 남들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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