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학 합격 발표에 버금가는 감격의 순간이 있었다. 마침내 파트너 비자를 받은 날이었다. 신청한 지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만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계속 불안했다.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자가 한 번 거절되면 계속 어려워진다던 말도 떠오르고, 비자가 안 나와서 귀국하면 또 애인과 오랫동안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데 그게 싫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건 참 답답하다. 알면서도 비정규직이거나 성소수자면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승인 메일을 받던 날,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고생을 어느 정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비자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마침내 제도적으로 파트너로 인정받았다는 감격도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 그렇게 오래 살았고, 한국에서 결혼식도 했지만, 아무 공식 서류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드디어
이 기쁜 소식을 SNS에 올리자마자 친구가 ‘이 지구상 어딘가에서 드디어 너희가 법적으로 파트너임을 인정받았다는 게 감동적’이라는 아주 적절한 축하 인사를 전해왔다. 역시 퀴어 마음은 퀴어가 잘 아는 법이다. 그래서 나도 다른 퀴어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파트너십 비자 받는 법을 상세하게 안내해보려 한다. 비자를 신청하면서 부딪혔던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한국에서 동성애자 커플로 지낸 특수한 경우라 정보를 찾기 어렵던 부분이었다. 아웃팅 우려 때문에 법적 조언을 받거나 대행업체에 의뢰하기도 쉽지 않았다. 비자는 개인적 상황이나 사회적 흐름도 많이 작용하기에, 백 명이면 백 개의 다른 사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례가 어떻게 풀렸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사례를 공유한다. 단, 정답으로 제시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참고만 하는 것이 좋다.
파트너 방문 비자
기본 과정은 이렇다. 비자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신청서를 쓰고, 파트너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지원서를 준비하고, 둘의 동반 관계를 증명할 서류를 함께 제출하면 심사 후 연락이 온다. 우리는 온라인 지원을 해서, 이 과정은 모두 온라인으로 이루어졌다. 학생인 파트너의 학생 비자를 기반으로 ‘파트너 방문 비자(Partner of a Student Visitor Visa)’를 신청했고, 뉴질랜드 이민성 홈페이지에서 안내하는 이 비자를 받을 수 있는 기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신청자와 파트너의 신원이 확인되어야 한다. 규격에 맞는 사진과 여권 사본을 제출한다.
- 신청자가 건강 기준에 적합해야 한다. 뉴질랜드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하지 않고 의료나 특수교육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정된 병원에서의 비자 신체검사 결과를 제출하여 증명한다. 비자 종류와 기간에 따라 받아야 하는 검사가 다르다.
- 신청자와 파트너의 인성이 확인되어야 한다. 경찰에서 범죄경력 회보서를 발급받아 증명한다. 파트너의 경우 최근 일정 기간 가정폭력과 성범죄 기록이 없어야 한다.
- 신청자가 진실한 의도로 적합한 비자를 신청해야 한다. 이민성에서 개인적 상황과 과거 비자 신청 기록을 종합해보고 직접 판단한다.
- 파트너가 비자를 지원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취업비자, 학생비자, 영주권 등으로 합법적으로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고, 다른 파트너를 지원한 적 있다면 5년이 지나야 하는 등의 조건이 있다.
- 둘의 관계가 진실하고 안정적이어야 하며, 함께 거주하는 사이여야 한다.
- 충분한 생활비와 돌아갈 항공권 구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민성 홈페이지에서 2019년 현재 뉴질랜드 달러로 월 1,000 NZD의 금액을 안내하고 있고, 이는 한화로 약 75-80만 원이다. 돌아갈 항공권 비용은 기준이 나와 있지 않으나 내 경우 약 2,000불 정도로 증명했다. 예를 들어 9개월의 비자를 신청하려면, 9개월 생활비 9,000불에 항공권 2,000불을 합친 11,000불, 한화로 약 850만 원의 금액이 통장에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은행에서 잔액 증명서를 받아 제출한다.
진실하고 안정된 관계
뉴질랜드 이민성이 정의하는 파트너십이란, 법적 결혼이나 시민 결합이나 사실혼 관계로 함께 거주하는 두 사람의 ‘진실하고 안정된 관계’이다. 그 두 사람의 성별은 관계없지만, 장기적이고 배타적이고 계속 유지될 관계여야 한다. 이런 파트너십을 인정받기 위해 특정 자료를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민성 측은 주로 포함될 수 있는 항목을 몇 가지 예시로 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관계가 다르므로 증명할 수 있는 방식도 다양하고, 어떤 자료를 제출하든 진실하고 안정된 관계임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시로 나열된 서류는 혼인 관계증명서, 자녀들의 출생증명서, 공동예금계좌 정보, 공동자산, 임대차계약서 혹은 주택 대출 서류, 신청자와 파트너가 함께 해당 거주지를 공유했다는 문서, 함께 찍은 사진 등이다. 혹은 두 사람이 따로 거주한 적이 있는 경우, 기간과 이유를 명시하고 그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유지했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위 서류를 훑어보면 한국에서 동성애자가 쉽게 가질 수 있는 서류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특정 서류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레터를 첨부하고,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자료들을 제출했다.
안정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
한국의 동성애자는 쉽게 안정될 수가 없다. 왠지 결혼을 하고 집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두 개 다 너무 어렵다. 안정될 수 없는 관계는 진실하다는 것도 증명할 수가 없다. 자료를 준비하는 동안 나 또한 살아 있는 불안정 그 자체였다. 일평생 쉽게 지워지고 보이지 않는 취급을 받는 레즈비언으로 살아왔기에, 관계를 증명하라는 요구가 유독 벅차고 야속하게 느껴졌다. 진실하고 안정된 관계를 서류로 내보여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증명하고 싶어도 너무 어려웠다.
우리는 한국에서 5년 이상 함께 살았고 결혼식도 했지만, 관련 서류는 아무것도 없다. 한국은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고 우리는 주민등록에 이름을 함께 올리지도 않았다. 사실은 그 ‘안정’이 되지 않아서였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가 결혼한 걸 모르니까, 이사를 할 때마다 보증금을 낸 집안의 딸 이름으로 계약하는 게 당연했고, 동거인은 같이 살아도 얹혀사는 ‘아는 언니’나 ‘아는 동생’이었다.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계속 주거가 임시적인 상태라고 생각했고, 자취방이 서울에 있었고 둘 다 본가가 수도권이라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이사도 많이 다녔다. 전세 계약이 끝나기도 했고 학교를 졸업하기도 했고 직장이 바뀌기도 했다. 결혼을 이유로 집안의 재산을 어느 정도 분배받거나, 신혼부부라는 이름으로 대출이라도 받아서 번듯한 집에 살았더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그게 안정이라면 우리는 안정되어본 적이 없다. 우리 관계가 아무리 안정적이라 해도 그걸 증명할 수가 없었다. 한국은 보증금이 비싸서 독립에 필요한 목돈이나 주거를 계속 유지할 경제력을 쉽게 갖추기 어렵다. 결혼 이전까지는 완전한 독립이 어렵고, 한 달 치 렌트비만 있으면 쉽게 부모님 집에서 나가 살 수 있는 뉴질랜드와는 다르다.
우리는 서류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함께 고양이를 기르고 가훈을 써 붙여 놓고 직접 청소하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의 주소지는 둘이 같았다. 그걸 보여줘야 했다. 적어도 6개월 이상 동거해야 파트너 관계를 인정받을 가능성이 큰데, 우리는 국가를 오가며 따로 거주한 기간 때문에 최근 동거 기간이 짧았다. 그래서 과거의 동거를 인정받는 게 중요했고, 최선을 다해 자료를 구성해야 했다. 이럴 줄 알고 기록을 미리 모아뒀다면 좋았겠지만, 공신력 있을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비자는 받아야 하니까 어떻게든 최대한 찾아서 제출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참고할 수 있도록 서류의 목록을 첨부한다. 한글로 된 내용은 의미만 통할 수 있게 생활 영어 수준으로 직접 번역했고, 따로 번역을 맡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 일주일 뒤, 이민성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참고: 내가 1차로 제출한 자료 목록
- 재정 공유 증명
- 뉴질랜드 공동명의 계좌 명세서 (Bank statement)
- 해외 송금 기록 – 떨어진 기간 동안 서로의 계좌로 여러 차례 송금한 기록
- 공동 거주 증명
- 한국에서 같이 살았던 집의 주민등록등본
- 뉴질랜드 집 렌트 계약서
- 우편물 받은 기록 - 명의가 등록되지 않은 쪽이 실제 거주했다는 증거
- 진실한 관계 증명
- 친구들의 지지 편지 - 우리 커플을 오랫동안 알아 왔고 진실한 관계임을 증언
- 해마다 함께 찍은 사진 약 10장
- 함께한 여행의 항공권과 숙박 영수증
- 결혼식 청첩장 및 결혼사진 - 우리의 청첩장에는 실명과 사진이 없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디자이너가 작업 시 참고한 결혼사진을 함께 첨부함
- 카톡 대화 기록 캡처 - 집에 생필품을 사오라는 내용이나, 곧 결혼할 거라는 내용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