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가와 구, 시나가와
品川区、品川
2018년 5월 말.
이직 후 지긋지긋한 시용기간(試用期間, 수습기간)이 끝났다. 2017년 7월 3일에 입국했으니 슬슬 1년짜리 워킹 홀리데이 비자 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드디어 ‘워홀러’가 아닌 ‘외노자’로서의 첫발을 내딛을 때가 왔다. 그 놈의 취업 비자를 따기 위해 내가 이제껏 겪어온 ‘존버’의 세월을 느낄 새도 없었다.
“7월 초 비자 만료라고? 그럼 지금 가야 할 걸?”
…지금 5월 말인데요?
“비자 나오는데 기본적으로 한 달은 걸려. 특히 처음 받는 비자라면 심사기간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완전 느리네. 뭐, 공무원은 어느 나라나 철밥통이니까. 시간 날 때 가서 신청하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던 그때의 몰래. 후에 그는 자신의 안일한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게 되는데…. (인간극장 bgm)
이 장면을 보자. 2019년 5월 24일 업데이트된 SUNTORY 프리미엄 맥주 광고다. 일본의 광고, 드라마 등의 대중매체를 보다 보면 이렇게 상사가 부하에게 서류를 뭉텅이로 주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적지 않은 일본 회사들이 수없는 서류의 산을 창조한다. 일본경제단체연합회 (日本経済団体連合会, 약칭 ‘경단련’. 우리나라의 전경련에 대응하는 단체) 회장의 사무실에 사상 처음으로 PC가 설치된 것이 놀랍게도 2018년이다. 이렇게 디지털을 멀리 하고 기존 방식을 고집하는 건 은행과 관공서처럼 보수적인 업계에서 더더욱 심하다.
은행이야 나처럼 일본에서 오래 살 요량이 없는 사람이라면 입금 등 간단한 업무만 보고 말겠지만(그조차도 갈 때마다 두 번은 빡치고 돌아온다), 문제는 관공서다. 일본에 와서 내가 비효율적 거북이 행정 처리에 열이 나서 적은 SNS 게시글만 모아도 따로 글 한 편으로 낼 수 있을 것이다.
구약소(区役所, 우리나라의 구청 혹은 동사무소의 역할을 하는 관공서)는 일처리가 느리기는 해도, 기억에 남는 불쾌한 경험은 별로 없기나 하지. 문제는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이다.
후생노동성 일본연금기국과 더불어 열도 외노자들을 가장 ‘야마 돌게’ (다소 과격한 언어지만, 정말 이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만드는 투톱 관공서.
서류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취로 비자 (就労ビザ, 취업 비자. 외국인이 일본 안에서 일하기 위해 받는 비자) 를 발급받기 위해 외국인이 입국관리국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다음과 같다.
- 재류자격변경신청서(在留資格変更申請書)
- 회사소개서
- 근로계약서
- 채용이유서
- 주민표(우리 나라의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서류)
- 재류카드 / 여권 등 신분증명서와 증명사진(반드시 3개월 안에 찍은 사진)
이 정도가 ‘필수 서류’이며, 추가로 제출해야 하는 서류, 즉 필요에 따라서 입국관리국에서 요구할 수 있는 서류는 다음과 같다.
- 대학교 이상의 졸업증명서(즉, 학사 졸업자 이상이 아니면 취로 비자를 따기 어렵다는 의미)
- 성적증명서
- 자유이력서
- 외국어성적증명서(일본어, 영어 등)
절차 자체만 두고 보면 간단해 보인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발급 받고, 신분증명서가 될 만한 서류의 복사본을 준비해서 입국관리국에 제출하면 끝. 하지만 입국관리국(이하 입관)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일본 외노자들이 치를 떠는 이유가 있으니…. 지금부터 사불가론, 아니 오불평론을 읊을 것이니 혈압상승을 주의하시길 바란다.
첫 번째 빡치는 점. 모든 서류는 ‘손으로 적어가는 것이 권장된다’. ‘재류자격변경신청서’의 경우 총 7장 분량의 서류에 빈 칸을 채워야 한다. 컴퓨터로 하면 30분만에 완성할 것을 한자 찾아가면서 하나하나 쓰고 있으면 얘네는 왜 이렇게 사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참, 일본은 공문서에 수정테이프나 화이트를 쓸 수 없다. 한 글자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적어야 한다!
두 번째 빡치는 점. 영어 외 다른 외국어 서류는 인정이 안 된다. 이건 당연하다. 일본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허술한 규정의 구멍이 제대로 드러나는데, 바로 ‘졸업증명서’는 영어로 받아와도 수리되지만, ‘성적증명서’는 ‘일본어’로 발급받아오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이다. 대체 어느 나라 무슨 대학이 학생 한 명을 위해 성적증명서를 일본어 버전으로 과목 이름과 성적 하나하나 번역해서 발급해 줄 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따라서, 영어 버전 성적증명서가 있으면 그걸 ‘일본어 버전으로’ 번역해 가는 것이 ‘권장된다’. 내 경우에는 대학에서 총 155학점을 이수했는데, 한 자 한 자 직접 번역하다가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입관에 전화를 이틀 동안 30통 넘게 해봤지만 그들은 끝내 받지 않았다. 아니, 전화를 안 받을 거면 인터넷 FAQ라도 되게 해놓던가!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포맷까지 원본에 맞춰서 직접 만들어갔다. 심한 욕.
서류 떼는 데만 이틀이라니
세 번째 빡치는 점. 비자 관련 서류를 신청인 본인이 담당 관공서에 가서 직접 받아와야 한다. 일본의 공문서는 인터넷 발급은 꿈도 못 꾸며 주민표(등본) 하나를 발급받더라도 무조건 관공서에 직접 가야 한다.
예를 들어, 취업 비자를 갱신할 경우에는 작년과 올해분의 납세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 납세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반차를 쓰고, 아침 여덟 시 반에 구약소 과세과에 가서 번호표를 받고 재수없을 경우 1시간을 기다려서(실화다. 주민표 하나 발급받는데 기본 40분이 소요된다. 그러면 전년도와 금년도의 납세증명서를 동시에 발급받는 경우 과연 얼마나 더 필요할까요?) 한 통당 300엔을 내고 받아와야 한다. 다른 서류도 이와 마찬가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한 가지 더. 나는 작년 7월에 아다치구에서 스기나미구로 이사를 왔다. 그래서 2019년 과세증명서와 납세증명서는 스기나미 구약소에서 받을 수 있지만, 작년 1월 1일 기준으로 나는 아다치 구에 살고 있었으니 작년분의 과세/납세증명서를 받으려면 아다치구에 직접 가서 신청해야 한다. 스기나미구에서 아다치구까지는 지하철로만 한시간 반이 걸린다. 도쿄가 아니라 오사카나 후쿠오카서 살다 온 경우라면, 그때부턴 환장 대잔치가 벌어지는 거다.이런 증명서 한 통 발급받는 것조차 제대로 정보 공유가 안 되는데, 대체 공공기관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다는 거지?
다시 입관 얘기로 돌아오자. 명색이 입관, 즉 이민담당부처라면 이 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신상정보 정도는 다른 부처에서 받아놔서 데이터화를 해놔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최소한 정부 부처 간 협력 체계를 만들어 놓던가? 하지만 구청조차 저 꼴인데 그런 걸 기대하긴 틀린 것 같다.
네 번째 빡치는 점. 도쿄에는 시나가와 입국관리국品川入国管理局(이하 시나가와 입관)과 타치카와 입국관리국立川入国管理局 두 군데가 있는데, 둘 다 멀다. 좀 먼 게 아니라 많이 멀다. 시나가와 입관은 도쿄도 서남쪽에 처박혀 있고(시나가와 역에서 내려서 15분 간 버스를 타야 하며 배차간격은 20분이다) 타치카와 입관은 심지어 도쿄도都 안이 아닌 타치카와시市에 있다. 이곳은 신주쿠에서 열차로만 40분 걸려 타치카와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15분 타고 가야 도착한다.
먼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술 더 떠서 어마어마한 대기 시간을 견뎌야 한다. 트위터에서 가끔 도시괴담처럼 떠도는 시나가와 입관의 대기시간 썰을 풀자면, 10시 30분에 가서 대기번호 200번대 받고 3시까지 기다렸다는 증언(여는 시간 아홉 시) 하나. 보조배터리 두 개 들고 가서 비자 신청이 끝날 때까지 다 썼다는 증언 둘.
그러니까 하루만에 구약소에 가서 관련 서류를 발급받은 다음, 시나가와 입관에 가서 비자 신청을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절대 불가능하다. 즉, 비자 하나를 발급받기 위해 최소 이틀의 피 같은 연차를 써야 하는 아주 개똥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반말하지 마
다섯번째 빡치는 점. 싸가지 없고 일도 못하는 직원들. 대체 입관에 왜 무능력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앉혀놨는지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해명이라도 들어보고 싶다.
우선, 다짜고짜 반말을 한다. 번호표를 받고 내 차례가 오자, 서류를 낸 다음 입관 직원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내 눈앞에 갑자기 필요 서류 리스트를 탁 들이밀면서 말한다.
あなた、これ持ってない? (당신, 이 서류 없어?)
…뭐라고?
일본은 기본적으로 さん付け(상대를 ‘~씨’이라고 부르는 것)를 쓰기 때문에, 상대방을 ‘君(너)’, ‘あなた(당신)’로 칭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あなた(당신)’는 상대방에 대한 존칭은 절대로 아니다. 거기다가 이런 식으로 반말로 훅 치고 들어오면 제가 좀 많이 당황스러운데요?
짜증나서 나도 반말로 같이 맞받아치니, 이 사람의 태도가 시시각각으로 악화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생트집을 잡기 시작한다.
당신, 이력서 안 들고 왔잖아. 그거 필요하니까 다시 발급받아 와.
이 자식이. 법무성 홈페이지 필요 서류 목록에 기재조차 안 되어 있는데 그게 왜 필요한데?
그건 당신 생각이고. 보니까 당신 회사 한국인이 경영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의 재류카드도 복사해오고 이력서랑 회사 전부이력증명서도 3년치 뽑아와서 다시 신청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실제 상황임을 밝힌다. 한술 더 떠, 내 옆의 카운터에 서 있던 인도인은 일본어를 잘 못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당신, 어떻게 입국했어? 가족은? 당신 혼자 왔어? 어디서 일하는데?
완전히 예비 불법체류자 취급이었다. 이딴 놈들이 지금 이민국 공무원이랍시고 일하고 있는 건가. 게다가 직원들마다 가져오라는 서류가 서로 말이 다르니, 일본어를 못하는 외국인이라면 정말 부아가 치밀 것 같다. 나에게 반말을 해댔던 직원이 시키는대로 서류를 발급받아서 다시 갔더니, ‘이거 필요 없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내 심정은…. 심한 욕밖에 나오지 않는다.
최근에는 그나마 외국인 입관 직원들이 늘어서 친절함과 일처리 스피드가 다소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인 직원들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먹었다. 실제로 일본 트위터에서, 자신의 외국인 친구에겐 반말하다가 자기가 일본인인 걸 알자 바로 직원의 태도가 바뀌는 걸 보고 놀랐다는 후기가 화제가 된 바가 있다. 아, 일본인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었구나. 나는 나리타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반말을 듣는 게 이미 익숙해졌는데.
노동력은 원하지만
사람 대접은 싫은 거니
올해 초 아베 정부는 감소하는 일본 인구 추세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 정책의 실체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니 여기서는 접어두도록 하지만, 적어도 외국인 노동자에게 긍정적인 정책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최대 5년 동안은 일하면서 일본에 세금을 바치고, 그 후로는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면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그 입구의 문지기들이 저 모양인 것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가 저 꼴이라니. 올림픽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관광객이니 갑으로 대해야 할 손님이고, ‘선진국’인 일본에 일하러 오는 외노자들은 을로 대할 수 있는 머슴이라 이건가.
사실 이건 사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고개를 들어 조국을 바라보면... 내가 한국에서 ‘자국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동안, 안 보이는 곳에서 ‘외국인’들, 특히 소위 말하는 '제3세계' 외국인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마치 우리 아버지가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조선족 직원에게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한 것처럼.
나는 2019년 6월 둘째 주에 취로 비자 갱신을 위해 다시 입관으로 가야 한다. ‘나는 너희 일본에 해를 끼칠 외국인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증빙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거기다 중간에 전직을 했기 때문에 그에 관련한 전직 관련 서류를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야 한다. 현재 일하는 회사의 경영지원팀에서 ‘이런 것까지 내야 해?’라고 물어볼 정도로. 응, 내야 해요. 너희 나라에서 고작 1년을 더 있기 위해. 이번에는 또 어떤 뭐 같은 경험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편두통으로 머리가 아파온다. 어휴.
도쿄 표류기 4컷 만화
덧붙이는 말 : 물론 한국, 일본 할 것 없이 전부 걸그룹 문화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본한테 우리나라 걸그룹이 ‘선정적’이라는 말은 별로 듣고 싶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