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를 신청한 지 약 일주일 뒤에 이민성에서 온 메일은 다름 아닌 질의 사항이었다. 첫 번째 심사를 마쳤으며, 차후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의 네 가지 사항을 요청했다. 굉장히 꼼꼼하게 서류를 검토했는지, 지나치게 상세하고 세부적인 질문이 와서 당황스러웠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이 사항에 답할 기한을 딱 삼 일 줬던 점이다. 이들은 영어가 제1 언어가 아닌 사람의 고충을 전혀 모르는 게 틀림없다.
- 결혼 증명서
- 파트너의 주소지 증명 서류 (Household register for your partner)
- 너의 집에 파트너가 5년간 살았다고 했는데, 지원서에 파트너의 한국 주소는 다르게 적혀 있어. 어떻게 된 건지 명확히 해줘.
- 너의 파트너가 지원서에 ‘함께 워킹홀리데이를 하기로 했는데 나는 비자 신청에 실패했고,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설명이 더 필요해. 너는 파트너와 함께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었니?
역시 결혼 서류가 없다는 점과 주소지가 찍힌 등본이 없다는 점이 걸림돌이 되었다. 보통은 주소에 한쪽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 같은 시기에 각자의 이름으로 받은 고지서나 우편물을 모아서 증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 둘이 살아서 남자 이름으로 택배를 받았고, 주소가 찍힌 고지서는 잘게 찢어서 버리는 게 일상이어서 그런 게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우편물을 받자마자 찢어버리는 습관을 지닌, 한국이라는 나라의 자취하는 여성들의 삶에 관해 영어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끝나지 않는 커밍아웃처럼
이 과정은 정말 지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우리는 한국에서 어려웠던 게 여기서도 똑같이 어렵다. 서류 한 장이면 쉬울 일인데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한 가지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근거를 끌고 와야 한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의심부터 하는 수많은 혐오자 덕분에, 내 구체적인 성적 욕망과 친밀한 관계의 역사까지도 굳이 드러내야 했던 수많은 커밍아웃도 떠올랐다. 살면서 커밍아웃하고 또 커밍아웃했지만, 이건 아무리 해도 쉬워지지도 않는다. 또 용기를 내야 하고 또 시선을 감수해야 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야 하고, 어디까지 말할지 계산해야 한다. 너는 처음 묻지만 나는 백 번 대답한 그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또 해야 한다. 파트너십 비자는 심사에 재량이 많은 대신, 담당 이민관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하는 범위가 있다. 우리는 장난스레 담당 이민관이 여성 혐오자도 아니고 외국인 혹은 동양인 혐오자도 아니고 성소수자 혐오자도 아니어야 비자가 나올 거라는 농담을 했었다. 이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야만 했다.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진실하고 안정적이던 관계는 이를 증명하려다 보니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갔고, 다시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될까 봐 불안했고, 우리 관계의 양상에도 불만이 커졌다.
우리는 연인 사이로 해석될 수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는다. 대화 내역에 다정한 애칭이나 사랑한다는 고백이 많았다면 달랐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연애에는 특별한 데이트나 여행도 별로 없었다. 우리는 한국의 바쁜 노동자였고, 스케줄 근무라 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우리의 데이트는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거였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둘 중 하나의 출근 전이거나 둘 중 하나의 퇴근 직후였다. 일에 지쳐 늘 신경이 예민했고 외출하기에는 시간도 애매했다. 모처럼 간 여행에서도 둘이 사진을 많이 찍지 않았다. 내가 봐도 6년을 만났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사진이 없었다. 나는 레즈비언이기에 파트너와 함께 찍힌 사진을 SNS에 올리지 않는다. SNS에 올릴 사진을 얻으려면 나 혼자 찍혀야 한다! 예전에는 심지어 휴대폰에도 사진을 잘 남기지 않았다. 폰을 잃어버렸을 때 복잡한 아웃팅 걱정까지 떠안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놀러 가면 당연히 서로의 독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숨기는 게 습관인 커플이 이 관계에서 자료를 많이 가질 수가 있을까? 나는 비자를 위한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만드는 모든 자료를 전송하는 즉시 삭제했다. 한 번에 마무리하지 못해서 다음 날 해야 할 때도 불편하지만 그렇게 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복잡하게 해야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관련 질의가 들어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우리는 신혼여행으로 뉴질랜드에 왔었으나, 비자도 항공권도 서로 달랐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우리한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상식과 다르게 복잡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직장에서 결혼한 줄도 모르고, 신혼여행 휴가를 낼 수도 없고, 우리가 같이 가는 걸 처음부터 주변에 밝히지도 않았고, 가족들도 상황을 몰랐는데 우리 힘으로 뭘 어떻게 안 복잡하게 만들 수가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사정을 각자의 선에서 해결했고, 이렇게 비자를 따로 신청할 수도 있고, 여행을 가도 출발을 본가에서 하면 각자 다른 집에서 나올 때도 있다. 나중에 보면 누가 봐도 왜 그렇게 이상하고 복잡하게 했는지 이해가 안 되고, 나조차도 헷갈려서 설명을 못 할 지경이었다. 소수자로 살아가는 건 설명할 게 지겹게도 많다.
참고 - 2차로 제출한 자료 목록
결혼 증명서 요청에 대해선
- 결혼 증명서가 없는 이유 설명
- 결혼식 사진 다량 첨부
- 결혼식에 참석했던 친구들 약 10명의 증인 서명
주소지 서류 요청에 대해선
- 뉴질랜드 집주인으로부터 받은, 둘이 함께 살았다는 증언 및 서명
- 둘 모두의 이름이 올라간 뉴질랜드 집 렌트 계약서
- 한국에서의 동거 정황이 담긴 카톡 대화 추가 자료
주소지가 서로 다른 건
- 청년 시기에 부모로부터 주거 독립할 경제력을 갖기 어려운 한국적 상황 설명
- 동성 커플의 한계로 인해 부모님의 자원으로 집을 마련할 때 명의를 공동으로 하지 않은 부분 설명
- 집을 이사 다니면서 공동 거주했다가 따로 거주한 기간을 표로 정리하여 각각의 이유 설명
- 따로 거주한 기간의 영상통화, 보이스톡 기록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 건
- 한국의 워킹홀리데이는 뉴질랜드와 달리 경쟁률이 높은 프로그램이어서 선착순으로 마감되며 신청 후 실패가 가능하다는 내용 설명
- 동반 신청 이후 실패한 정황이 나타난 카톡 대화 기록
기타
- 위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시민 단체 활동가 친구의 지지 레터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의 현실을 설명하여 공식 기록이 없는 부분을 보완)
위 서류들을 작성하여 제출했고, 약 한 달 뒤 비로소 파트너 방문 비자를 받았다. 기쁘지만 씁쓸했다. 페미니즘 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어떤 서류를 어떻게 만들지 잘 알고 있었고, 역시 함께 운동했던 친구들이 고맙게도 촉박한 기한 내에 증인 서명을 해주고 레터를 써주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힘써주었다. 정말 고맙고 벅찬 일이지만 애초에 내가 이성애자였으면, 고작 우리 관계를 승인받기 위해서 시민 단체 이름이나 UN 권고까지 들먹일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짝사랑
박가영 작가의 책 ‘이민을 꿈꾸는 너에게’에는 한국을 짝사랑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저자는 호주에 이민을 가서 요리사로 살고 있는데, 에필로그에서 한국이 그립지만, 한국에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털어놓으며 했던 이야기다. 그 말은 나에게도 꼭 맞는 말처럼 느껴진다. 나도 한국에서 잘 살고 싶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정말 너무너무 힘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다. 비자 기간에 공백이 생겨 한국에 돌아와 잠깐 회사에 다녔다. A형 간염이 창궐하는데도 불구하고, 팀장님이 타주시는 소맥을 잔을 돌려가며 원샷하던 그 회식 날, 정말 이 모든 게 한국다워서 나는 절대로 녹아들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우리 커플에게 최초로 공식 인정을 해준 것도 한국이 아니라 뉴질랜드였다. 그렇게 목이 터지게 집회를 했는데도, 혐오 세력에게 맞아가면서 퍼레이드를 했는데도 결국 이 길이 더 빨랐다. 내가 속한 사회를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것도 안 했을 텐데, 정말 한국 사회를 바꾸고 싶었는데, 이렇게 한국을 떠나는 편이 더 쉬웠다는 게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슬펐다. 영원한 짝사랑을 이제는 정말 끝내기로 하고 체념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그냥 한국 가서 살까?’
내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애인은 ‘그런데 우리 거기에 못 살잖아.’하고 대답한다. 키위들처럼 일찍 퇴근해서 서핑을 즐기거나, 주말이면 교외로 나가 바비큐를 구워 먹으며 지내는 것도 아니지만, 여기가 지옥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한국에서는 매일 사람을 죽이고 싶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그렇게 사람들이 미웠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바꿔주면서 마음속으로 그 손님을 백 번은 죽였고, 동료가 음료를 엎어도 입 밖으로 욕만 안 했지 싸늘한 표정으로 그걸 닦았다. 조금도 여유로워질 수가 없었다. 밥도 못 먹고 커피를 팔고 있으니까, 생리대도 못 갈고 생과일 스무디를 갈고 있으니까, 퇴근하면 또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파서 화장실도 못 갈 테니까, 간신히 손가락만 까딱해서 겨우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또 출근해야 하니까, 편두통에 위통에 방광염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 먹고 또 나가서 일해야 하니까 그렇다. 손님들도 똑같다. 어제, 밤 열 시까지 야근하고 지금 겨우 눈만 떠서 커피 사러 왔으니까, 지하철 출발 전에 커피를 못 받으면 가서 또 부장님한테 한 소리 들어야 하니까, 이 커피 한 잔이 오늘을 버틸 유일한 생명수고 행복이니까 그렇다. 그 신경질적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게 어떤 커피인데, 네가 뭐라고 내 커피를 틀려. 하늘이 무너져도 출근을 해서 겨우 번 돈으로 산 커피인데, 네가 감히 왜 바닐라 시럽을 한 번 덜 넣어. 내가 지금 그 커피가 얼마나 간절한데.’ 하는 것만 같다.
여기 사람들은 머리가 아파서 하늘이 노란 데도 교대할 사람이 없어 입술을 깨물며 근무해 본 적이 있을까. 퇴근하자마자 다리가 풀려서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집에 도착해 온종일 앓아본 적이 있을까. 이십 분쯤 지각해도 노래 부르며 천천히 걸어오는 키위들이 그런 걸 알 리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한테 쓸데없이 심술 궂지도 않다. ‘맞다! 무지방 우유로 안 했어,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날아오는 욕을 담담하게 기다리며 죽을죄를 지은 표정의 한국인 바리스타에게 키위 손님이 말한다. ‘괜찮아. 그냥 내가 조금 살찌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