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이민갈까? 13. 새 보금자리와 타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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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이민갈까? 13. 새 보금자리와 타협하기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뉴질랜드에 가면 대도시인 오클랜드에 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고 온 건 거기까지였다. 서울 안에 서대문구가 있고 마포구가 있는 것처럼 오클랜드 안에도 타카푸나, 글렌필드, 폰손비 등 다양한 지역이 있는데 그 중 어디에 살지 결정한 적이 없었다. 직장도 학교도 이 나라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어디에 머무르든 상관이 없는데, 상관이 없으니까 오히려 막막했다.

함께 쓰는 방

일러스트 이민

처음으로 봤던 집은 오클랜드 시티에 있었다. 아보카도 김밥을 먹다가 식당 주인이 추천해준 집이었다. 그날은 길을 몰라서 정처 없이 걷다가 식사 때를 놓쳐서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한참을 헤매다 발견한 스시집에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진열장은 비어 있고 사장님은 매장을 정리하고 계셨다. 아쉽지만 돌아서려던 중,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인이세요?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분은 “오늘은 다 팔렸는데, 지금 하나 말아 줄게.” 하며 음식을 준비하셨다. 이게 바로 고국의 정이고 대한민국 만세다. 한국인임을 알자마자 은근슬쩍 말을 놓은 것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시큼한 홀란다이즈 소스를 뿌린 ‘에그 베네딕트’와 짜고 느끼해서 더는 먹고 싶지 않은 ‘피시 앤 칩스’만 파는 나라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서빙된 음식은 생선회를 얹은 초밥은 아니었고, 다른 채소는 하나도 없이 아보카도와 밥만 넣고 김으로 감싼 김밥이었다. 여기서는 그런 김밥을 스시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사장님은 대화를 시도하며 내 상황을 이것저것 물으셨고 나도 고마운 마음에 열심히 대답했다. 

그러다 어느새 내게 집을 소개해주겠다며 나섰고, 분위기에 휩쓸려 방을 보러 가게 되었다. 시티 중심가였고, 개인 공간 없이 주인까지 세 명이 함께 쓰는 원룸이 한국 돈으로 일주일에 약 13만 원이었다. 한 달이 아니고 일주일이다! 교통이 편리한 시티 한복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비싼 가격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무엇보다 개인 공간이 중요해서 그 집에서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침대가 각자 따로 있고 얇은 커튼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소음과 타인의 존재 자체에 예민한 나에게는 무리일 것 같아 패스했다.

비싼 방

일러스트 이민

시티에는 한국의 고시텔이나 리빙텔처럼 전체가 숙소인 건물도 있었다. 입구에 데스크도 따로 있고, CCTV가 있어 안전해 보였다. 원하는 룸메이트가 있으면 매칭도 해준다. 한국인과 방을 쓰고 싶다거나 반대로 한국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을 원한다는 요청사항이 주를 이룬다. 나는 독방을 원했고, 아주 좁은 개인실과 공용 거실 및 화장실로 구성된 공간을 안내받았다. 일주일에 18만 원인데 인터넷 요금과 뜨거운 물 사용료는 별도였다.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비싸게 느껴졌는지 가격을 듣고 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비싼 방에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 공간은 너무 좁고 벽은 너무 얇았고, 옷장에는 옷을 서너 개 놓을 공간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고시원에도 살아봤지만 이렇게 좁은 방은 처음이었다. 방이 만족스럽지 않을수록 마음은 더 급해졌다. 집을 구하기 전까지 머무를 목적으로 예약한 호텔이 열흘 정도였는데,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열흘 안에 집을 구하지 못하면 거리에 나앉거나 예산에 생길 타격을 감수하며 숙소를 연장해야 할 텐데, 어느 쪽도 원하지 않았다.

낡은 방

일러스트 이민

더욱 열정적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인 소개나 전용 시설이 아닌 집은, 뉴질랜드의 무엇이든 거래하는 ‘트레이드 미’ 앱이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집을 함께 사용할 사람을 플랫 메이트라고 부르는데, 플랫을 구하는 글이 올라오면 집을 찾는 나 같은 사람이 뷰잉 약속을 잡는다. 가격과 위치가 마음에 들어 뷰잉을 잡았던 집이 있다. 작은 펜션처럼 생겨서 내가 살고 싶었던 집의 모습에 가까웠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이 아니고, 집 주변으로 야외 공간도 있었다. 마당이라고 하기엔 좁고, 정원이라고 하기엔 관리되지 않은 풀이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빨랫줄이 있어 빨래가 볕에 널려 있었다는 게 중요했다. 도착했다고 연락하자 수염과 머리를 몇 달은 손질하지 않고 자유롭게 둔 것처럼 보이는 백인 남자가 나왔다. 그의 안내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자 운동화를 신은 채 빵에 버터를 바르던 백인 여자가 있었다. 십 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나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도 마주쳤다. 반바지인지 팬티인지 기억나지 않는 짧은 하의를 입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니 도대체 몇 명이 사는 건지 방이 여섯 개쯤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내가 쓸 방은 침대 다리가 거의 부서져 있었고, 책상 밑에는 거미줄이 있었다. 방문에 잠금장치도 없었는데, 새로 달기에는 이미 삐걱거리는 나무로 된 문이 버텨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집에 살기 위해 일주일에 14-15만 원을 내야 하나 고민스러웠지만, 어차피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쪽에서 나를 플랫 메이트로 선택해줘야 입주할 수 있고, 그 집에서는 결국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신분을 보증해줄 추천인도 고정 수입도 없는 외국인이고, 뉴질랜드는 원래 이런 곳이다.

외딴 방

일러스트 이민

하는 수 없이 오클랜드 시티에서 조금 더 벗어나기로 했다. 지역을 잘 몰라 구글 지도를 사진으로 바꿔놓고 플랫을 구한다는 글을 보면 지명을 검색했다. 나무와 물이 많은지 아니면 건물과 도로가 많은지 살펴보며 얼마만큼 도시인지 가늠해보았다.

‘일단 집에서 신발을 신는 곳과 남자가 있는 곳은 안 돼!’

직전에 봤던 집에 굴러다니던 먼짓덩어리와 예비 플랫 메이트의 언제 감았는지 모를 엉킨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그런 기준을 세웠다. 한국 교민 사이트를 먼저 뒤졌다. 플랫 메이트의 조건을 크게 따지지 않고 한국처럼 선착순으로 받는 방식이 대부분이라 편했다. 시티에서 북쪽으로 삼십 분 정도 이동한 곳에서, 타협할 만한 집을 찾았다. 거실이 조금 어수선했지만, 방이 숨 막히게 좁지는 않았고 적당히 아늑했다. 구성원들이 실내용 슬리퍼를 신었고 남자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도 이십 분쯤 더 걸어 들어가야 했던 점과 주변에 식당이나 카페가 보이지 않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주 십만 원의 합리적인 가격에 끌렸다. 원하는 걸 다 가질 수 없다면, 내가 그나마 포기할 수 있는 건 위치였다. 방을 공유하는 것도 비싼 것도 지저분한 것도 참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이리저리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과 연락하고 약속을 잡고 의사소통을 반복하는 일에도 지쳐서 더는 다른 집을 보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 집으로 정하고 숙소를 체크아웃했다.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해 시티에서 열흘을 지냈다. 입에 맞는 음식을 주변 어디에서 파는지도 알게 되었고, 지도를 보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된 참이었다. 그런 시티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와 함께 질질 끌고, 길을 물어가며 새집에 겨우 도착했다. 청소가 되어있었지만 그새 거미가 들어와 살고 있었고, 나는 그 길로 짐을 풀지도 못한 채 마트로 향했다. 세정제를 사 와서 밤이 깊도록 내 방의 이곳저곳에 뿌리고 닦았다. 책상과 침대가 하나씩 있는, 한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방인데도 아무리 닦아도 끝이 없었다. 속 시원하게 닦이지 않는 카펫 재질의 바닥도 원망스러웠다. 

지금은 오히려 뉴질랜드식 생활에 적응해 잡동사니와 함께 널브러져 잘 지낸다. 그러나 그날은 닦고 또 닦아도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고 불결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날이 밝았고, 얼굴 위로 쨍한 아침 햇살이 내리고 시티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귀가 찢어질 듯한 새소리가 들렸다. 성가시고 시끄러운데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방의 가장 큰 장점은 커다란 창문이었다. 정말 뉴질랜드에 온 것이 실감 나는 아침이었고, 갑자기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새 보금자리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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