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볶는 향이 듬뿍 나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스누피를 만났다. 자주 오는 카페라며 들어서자마자 신메뉴를 주문했다. 스누피는 밝은 은빛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우드톤과 무채색으로 꾸며진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혼자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한 답을 하려고 하는지, 답을 하기 전에 질문을 꼭 한 번 더 되풀이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Q. 어제는 뭐 하셨나요?
어제요? 월요일이었죠? <킬링 이브>를 보다가 일찍 잤어요. 어제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더라고요! 고전적인 사이코패스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런 캐릭터가 여자니까 너무 좋아요. 사실 어제는 컨디션이 안 좋아서 일찍 퇴근하고 쉬고 싶었는데 월요일 몫의 일을 하고 나니까 평소 퇴근할 시간이 되었어요. 못 쉬어서 좀 힘들었어요. 직업상 따로 출퇴근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쉴 때랑 아닐 때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출근을 안 해도 되는 게 좋은 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장소에 계속 있으면 쉽게 우울해지기도 해요. 출근과 퇴근을 구분하기 위해서 6시 이후에 오는 메일이나 업무 메신저는 확인하더라도 다음 날에 답해요. 딱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는 건 아니지만, 일찍 일어나는 편이어서 8시에 밥을 먹고 일을 시작하고 여섯 시쯤 되면 마치고 퇴근하려고 해요.
Q.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는 거랑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것 중 어느 쪽이에요?
음, 일단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서 일하지만, 일 때문에 행복하지는 않아요. 좋아하는 걸 일로 하면 더 고통인 것 같아요. 하고 싶었던 일이란 이유로 돈을 그렇게 많이 받지 못하기도 하고, 조금 더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만족해야 할 것 같아서 스스로 갈등하기도 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가 어려워요. 잘하는 게 어떤 건지 스스로 잘 알고, 만족스럽게 잘하고 싶으니까 시간과 신경을 더 쓰게 돼요. 제가 화물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시간이랑 책을 읽으며 쉬는 시간이랑 구분이 될텐데, 저는 글을 보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 쉬면서 책을 읽을 때도 자연스럽게 글 쓰는 것에 관한 생각을 하게 돼요. 일을 안 하는 시간에도 계속 관심을 쏟게 돼요.
Q. 긴급하게 기분 좋아지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역시 고양이죠! 고양이의 배를 만진다! 같이 산 지 이제 4년 되었는데, 한 달 정도 된 아기 때 데려온 거라 처음에 진짜 작고 주먹만 했어요! 그때 몸무게가 250g이었는데 지금은 5kg에요. 너무 잘 커서 완전 뿌듯해요. 고양이 중에서도 성격이 개냥이처럼 사람 잘 따르는 애들이 있고 반대로 고양이 같은 애들이 있잖아요. 얘는 고양이 중에서도 엄청나게 고양이라 영역 개념도 확실하고 사람 경계도 많이 하는데, 저는 경계를 안 해요. 얘가 가까이 올 때마다 뿌듯해요. 제가 어쩌다 밖에 오래 나갔다 오면 막 화를 내요. 고양이의 표정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걸 키우면서 처음 알았어요. 나갔다 오면 심통 난 표정이고, 사람 손 안 닿는 곳에 올라가 있고 그래요. 화 풀리면 좀 가까이 오고. 감정을 잘 표현하는 애예요.
Q. 살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있나요?
‘품격’이요. 이걸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단어를 잘 못 찾겠어요. 존엄성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아요. 편의점 음식 좋아하는 편이지만 최근에 일부러 줄이고 있거든요. 식사하는 기분이 아니라 너무 끼니 때우는 느낌이라서. 인생을 뼈대만 남은 채 앙상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통장 잔고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고 싶은 영화를 미루고 그러지는 말자!’ 하는 거예요. 물론 제가 지금 당장 먹고살 만한 형편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인 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우선 정책적으로 필요한 조치가 취해져서 다들 먹고살 수 있었으면 좋겠죠. 다들 최소한의 것만 간신히 맞춰가며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Q. 십 년 뒤에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예전에는 십 년 뒤 미래를 계획할 때 항상 그 정도 뒤면 외국에 나가 있겠거니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요즘에는 좀 자신이 없어요. 한국에서 사는 게 별로 행복하지는 않으니까 다른 데서 살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죠. 나간다고 인생의 모든 고민거리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요. 얼마 전 애매한 사이인 사람의 경조사가 있었는데, 제가 서울에 있고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보니 안 갈 수가 없었어요. 그런 게 싫어요.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살면, 꼭 바닷가 근처에서 살고 싶어요. 오랜 꿈이에요. 어릴 때는 커서 일 년에 일억쯤 벌 줄 알았고, 그걸로 해변에 별장을 사고 싶었어요. 지금 보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고, 비싸지 않은 변두리 동네의 바다까지 걸어갈 수 있는 집에 살고 싶어요. 아, 집에 수영장도 있어야 해요. 엄청 좋을 거 같아요. 여행 갈 때마다 숙소에 있는 풀이 좋았어요. 클 필요도 없어요. 거기서 매일 헤엄을 치지 않더라도, 들어가서 가만히 기대 있거나 책만 읽어도 기분 좋을 것 같아요.
Q.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자라면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자답지 않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한국에서 옷이나 신발을 편히 산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제 사이즈가 없으니까 위축되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최근에는 타협하고 아예 SPA브랜드의 남성복 판매대에 가서 사거든요. 그럴 때마다 너무 당연하게 여자답지 않다고 느껴요. ‘여성복’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나를 맞출 수 없으니까요. 예전에는 아예 남자애처럼 행동한 적도 있어요. 술자리에서 술도 전혀 거절하지 않고, 차라리 남자들보다 더 많이 마시고. 저도 생리통 심한 편인데, 대학교에 생리 공결 있는 것도 싫었어요. 괜히 그것 때문에 여자애들이 생리 탓하고 빠진다는 소리 듣는 게 싫었어요.
수험생일 때 공부하느라 하루에 네다섯 끼 먹고 두세 시간씩 잤어요. 그런데 대학 합격하고 나니까 그렇게 찐 살과 몸을 다 복구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고, 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듯한 얘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대학에서도 여자다운 여자랑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또래 집단이 대하는 게 다르고, 제가 여자다운 여자의 범주에 들지 못했기 때문에 그나마 사는 게 편한 길인 유사 남성을 택하고 남자같이 굴려고 애를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이런 걸 깨닫고 소리 내서 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서울에 사는 건 한국 기준으로 분명한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거의 서울 토박이예요.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는 엄마랑 아빠가 기를 쓰고 상경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서울의 인프라에서 얻는 이득이 분명히 있어요. 보고 듣고 먹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가질 수 있는 취향의 폭도 넓고, 서울에서 비싼 사교육 받은 사람이랑 아닌 사람이랑 같은 출발점에 서 있다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그게 특권이라는 걸 다들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도 그걸 인지하고 있으니까 비싼 월세를 들여서라도 지금 사는 동네에 계속 살려고 애를 써요. 이 동네에서 제가 누리고 있는 생활 수준이 마음에 들고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여성으로 사는 건 좀 다른 얘긴데, 일하면서 제가 어린 여자이기에 겪는 경험이 있잖아요. 업무 관련된 자리에서도 ‘진짜 어리시네요.’ 하면서 상대가 나를 귀엽고 하찮게 보는 게 느껴진다거나 하는 불쾌한 경험이요. 대학 졸업할 때까지 늘 ‘쟤는 뭘 해도 뭐라도 될 사람이야.’라는 얘기를 들었고 저도 스스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은 어린 여자가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기가 정말 힘들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학점 좋고 스펙 좋은 건 다 여자들이고, 맨날 수업 시간에 할 거 안 하고 대충 넘어가던 애들은 다 남자들이었거든요. 학벌도 똑같은데 졸업할 때쯤 되니까 남자들만 어떻게 취직을 하더라고요. 학점 마녀라는 별명을 달고 다니던 여자 선후배 동기들 중 그나마 잘된 경우는 대학원에 가고요. 화가 나요. 다 잘하고 살았는데. 제 또래의 여성은 여자도 다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잖아요. 그게 다 말뿐이더라고요. 그런 불합리한 점들이 이해가 안 가는데, 여성으로 사는 건 새로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이해가 안 가는 목록이 하나씩 늘어나는 거죠. 그럴 때마다 ‘아니 이렇게까지?’하고 놀라면서.
스누피는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이후에 본격적으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 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소리 내 말할 수 있었다. 인터뷰 마지막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안 괜찮은 건 안 괜찮은 게 맞다고 말하고 싶어요. 실재하는 성차별도 그렇고, 사소하게는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은데 그런 환경이 안 되거나 하는 것까지도요. 저나 다른 사람들이 안 괜찮은 걸 괜찮은 척하는 데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 같아요. 맨날 그러자는 건 아니고 가끔은 푸념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