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 않은 사람들 5. ‘인간’답지 않은 엄

알다독립여성 청년인터뷰

답지 않은 사람들 5. ‘인간’답지 않은 엄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저는 출판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사람입니다.

엄은 짧은 머리에 소년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작은 몸집과 단단한 체구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숨을 고른 뒤 신중하게 느릿느릿 이야기하고, 꽤 오랜 침묵이 흘러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분명하게 자기 이야기를 했다. 알고 보니 엄도 날 때부터 그런 단호함을 가진 건 아니었다. 천천히 오랫동안 애써 빚어낸 태도였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Q.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A. 시간, 요일, 날짜 개념이 없이 살고 있어요. 직장인 때와 일상의 리듬이 완전히 다르고, 시계나 달력을 거의 보지 않고 지내요. 예전에는 강박이나 계획이 있었어요. 글이든 뭐든 꼭 생산을 해내야 할 거 같고, 시간이 나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려고 하고. 요새는 그런 목표를 두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담으려고 해요.

Q. 눈에 보이는 것만 담는 건 어떤 거에요?

A. 지금 여기 꽃집이 보이잖아요. 그러면 꽃을 보고. 햇빛이 비치면 나가서 햇빛을 쐬는 직관적인 삶이요. 요즘 몸으로, 눈으로 오는 본능적 감각에 집중하고 있어요. 원했던 삶이기도 해요. 원래는 생각이 좀 많았는데 생각이 없어졌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어요.

Q. 원래는 무슨 생각을 많이 했어요?

A. 음...... 직장을 다닐 때는 일을 계속 생각하기도 했고. 업무, 동료, 관계, 그런 생각이요. 일할 때 나타나는 신경전이 있잖아요. 가시 돋친 말을 들으면 어떤 의도였을까 오래 곱씹어요. 말 한마디에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이에요. 조직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집에 와서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했어요. 그 삶에 만족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살지 계속 생각해요. 조직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건 좀 아니다 싶은 일을 겪어도 항의하지 못하니까, 계속 생각만 하는 거고, 그러니까 답이 없어요. 머리만 아프고. 그런데 보면 또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나만 예민한 건가 하는 생각도 했죠. 지금은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때처럼 일상을 조이는 기분은 없어요.

저는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여성답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일이나 열정도 없고, 경쟁하고 성과를 내고 그걸 바탕으로 인센티브를 받는 분위기에 잘 맞지 않아요. 너무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능력에 따라 다른 보수를 받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좋은 결과물도 그런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요.

출판사가 어느 정도 그 타협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책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저는 텍스트의 힘을 믿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그곳도 우선순위는 매출이더라고요. 물론 출판사가 살아남기 위해서 돈이 되는 책을 팔아야 해요. 그건 알지만 늘 인력이 부족하고, 시간도 여유도 부족하고. 그런 상황에서 세상에 정말 필요한, 여성주의나 소수자의 이야기를 깊게 들여다보는 컨텐츠를 만들 기회는 별로 없었어요.

Q. 어제 자기 전에는 무슨 생각을 했나요?

A.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렸어요. 대학교 때 원하는 공부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원하는 책을 읽고, 걱정 없이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고. 내일이 없던 것처럼 놀고, 술을 마시고. 아, 그때 참 행복했는데. 그때는 학교나 동아리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잖아요. 가까이서 자주 보니까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친밀해지고.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를 알아가려면 먼저 다가가거나 따로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굳이 연락하지 않으면 끊기고. 그게 좀 아쉬워요.

Q. 삶의 낙이나 기쁨, 혹은 작고 사소한 즐거움에 관해 말해주세요.

A. 그런 걸 적어둔 노트가 있었는데. 너무 없어서 적어뒀어요. 우선 잘 자고 일어나서, 커피를 한 잔 내릴 때. 저한테 질 좋은 수면이 무척 중요해요. 또, 엄마나 애인 같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사주려고 포장할 때. 그럴 때 좋아요.

Q. 꽃 선물을 자주 하나요?

A. 요즘 들어 선물하기 시작했어요. 식물이 좋아졌어요. 저랑 닮아서 그런가 봐요. 제가 요즘식물처럼 지내고 있어요. 광합성 하듯이 햇빛을 보고, 바람을 느끼고 그런 게, 인간보다는 식물 같아요. 예전에는 격한 운동을 하고 차가운 얼음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걸 좋아했어요.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성과가 나고, 제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식물이어서 그런지 운동도 거의 안 해요. 한 5~6년 동안 했더니 단련이 돼서 운동을 덜 해도 몸이 유지가 되기도 하고요. 직장을 다닐 땐 의미 있는 걸 뭐라도 하려고 계속 노력했어요. 힘들면 꼭 뭘 안 해도 되는 건데, 안 그러면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어요. 운동도 그중 하나였어요. 출근하기 전이나 점심시간에도 운동을 가고, 집에서도 홈 트레이닝 계속하고 식단관리도 엄격하게 했어요.

Q. 일을 그만둔 이유는 뭐였어요?

A. 조직에 환멸을 느껴서요. 운 나쁘게 그런 곳만 경험한 걸 수도 있지만, 제가 있었던 곳은 재능이나 역량을 펼칠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일관적인 시스템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었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생각 없이 톱니바퀴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다른 거면 몰라도 지식노동이랑 감정노동을 투여해서 책을 만드는 건데, 시스템은 톱니바퀴인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더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거죠. 차라리 대놓고 ‘너 톱니바퀴해.’하면 시키는 일만 하겠는데, 그게 아니고, 자유로운 것처럼 하면서 실상은 톱니바퀴인 거에요. 그러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져요.

Q. 가장 오랫동안 하는 고민이 있다면?

A. 진로, 나의 미래. 그런 거요. 저는 예전부터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어요. 저만의 전문성을 갖고 자아실현을 하고 나답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러면서 제가 하는 일이 최소한 세계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노동자를 죽인다거나 제품에 발암물질을 넣는 곳에 소속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곳이 아니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찾고 싶어요. 어려운 일이죠. 그동안 했던 일 중에서는 친구들과 그림책을 만들었던 게 가장 좋았어요.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고, 경력이 오래된 건 아니지만 편집자로서의 기량도 나름대로 펼칠 수 있었어요. 그런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면 좋겠죠.

Q. ‘~답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A. 아까도 식물 얘기를 했지만, 저는 인간답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야망이 없어요. 이기고, 성공하고, 엘리트적 삶이나 위치를 유지하고, 그럴 마음이 없어요. 그럴 수 없는 처지라서 현실을 파악한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약자의 편에 서고 싶지 권력자나 강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게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때 좀 제가 인간답지 않은 것 같아요. 인간답지는 않아도 나답게 있고 싶어요. 저는 구속이나 속박을 싫어하고 자유가 무척 중요해서 거절을 못 해 억지로 끌려다닌다거나 그런 상황이 싫어요. 성역할도 그렇고, 리더 역할, 딸 역할 같은 가면을 쓰고 역할에 갇혀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걸 아니까, 더 단호하게 쳐내게 돼요. 이것도 근데 사실 제 과제 중 하나죠. 언제까지나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산다는 건 어떤가요?

A. 음... 엿 같아요! 질문에 조금 덧붙이자면 저는 지정 성별 여성이지만, 젠더에 관해서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주민등록상 성별이나 지정받은 성별은 여성이고, 그런 점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이 있어요. 우리 사회는 그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아요. 미투 운동 보면, 어떻게 저러는지 탄식과 욕설이 저절로 나오지만, 익숙한 일이잖아요. 여성을 대하는 남성들의 추악한 방식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려서, 이런 사건들이 너무 일상이 되어버리고, 항의하면 오히려 당찬 여성이나 영웅이 돼요. 저는 영웅도 아니고 그냥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뿐인데, 그 당연한 걸 말하는 데에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해요. 폭력을 여자가 증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사회인 게, 피해자들이 나와야 하는 게 안타까워요. 항상 차별받는 사람들이 더 아프고, 병들고 약한 사람이 더 힘든 세상이에요.

엄은 순간에 충실하고 싶은 사람이다. 기쁠 때 웃고 처질 때는 좀 처져도 되는 편안한 관계 속에 있고 싶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욕구에 집중하고 가장 ‘나다운’ 삶을 꿈꾼다. 나답게 살고 싶은 엄에게 혹시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은 없는지 묻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은 저를 활발하다고 생각해요. 밝고, 잘 웃고, 낙천적이라고 봐줘요. 사실 그만큼 애쓰는 건데. 물론 사람을 좋아하고 밝은 면도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슬픔을 잘 느껴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오는 감정 컨트롤 본부를 떠올리면, 제 감정을 주로 움직이는 대장 역할은 슬픔일 거예요. 슬퍼할 때의 나를 더 진실하게 느끼고, 슬픔을 잘 느끼는 사람들에게 애착이 많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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