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2. '아무나'답지 않은 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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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지 않은 사람들 시즌 2 2. '아무나'답지 않은 키키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마카롱을 좀 샀는데 드실래요?

키키가 들어오자마자 알록달록 예쁜 마카롱을 건넸다. 힙한 가로수길의 카페에서 마카롱을 한입 베어 문 채 대화하고 있으니 키키의 차분한 성격이 더 잘 드러났다. 배경 음악으로 끝없이 흘러나오던 노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속도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질문을 끝까지 듣고 나서,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하고 있지만 키키의 말에는 중심이 있다. 이것저것 고민을 많이 해봐서,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Q. 어제는 뭐 하셨나요?

A. 운동하고 공부하고 넷플릭스 봤어요. 요즘 PT를 받고 있어서 운동을 열심히 해요! 공부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어서 하는데, 기록관리라는 분야예요. 기록관리는 크게 공공기록과 민간기록으로 나뉘는데, 대통령 기록물 같은 게 공공기록이에요. 민간기록은 조금 더 다양해요. 지금 하고 계시는 일도 민간기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서울의 이야기를 수집할 수도 있고, 일기 같은 개인 기록도 해당하고, 누군가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일도 있죠. 완전히 사랑하는 일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아주 하기 싫은 일은 또 아니에요. 공부해보니까 저랑 잘 맞아요. 이 인터뷰도 소개글에 기록이라는 단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흥미가 생겼어요.

일러스트 이민

Q. 삶에 기쁨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A. 요새는 넷플릭스인 것 같아요. ‘테라스 하우스’를 보고 있어요. 청년들이 공동 주택에 같이 사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할 때 있잖아요. 보다 보니까 재밌더라고요. 저도 셰어 하우스 형태로 살았던 적이 있어요. 학교 근처에서 자취할 때였는데, 각자 방은 있고, 주방이나 화장실을 공유했어요. 근데 의외로 갈등이 별로 없었어요. 좋은 사람들을 잘 만났던 것 같아요. 사실 같이 사는 관계에서 너무 친해져도 불편할 때가 있는데, 룸메이트들이랑 서로 적당한 거리를 지키면서 잘 지냈거든요. 아, 그리고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뻐요!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는데, 강아지들도 삶의 기쁨이에요.

Q. 키키는 어떤 사람인가요?

A. 저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고민이 돼요. 잘 모르겠고 쉽게 말하기가 어려워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누가 저 보고 훗날 강아지를 또 키울 거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은 못 하겠어요. 아, 지금 키우는 강아지는 사실 친오빠랑 자취하기 시작하면서 오빠가 데려온 강아지예요. 제가 강아지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실제로 키우는 건 다른 문제에요.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잖아요. 강아지 산책도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고, 집에서 같이 보내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드는 비용을 다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강아지들한테 그냥 지금 있을 때 잘해주려고 해요. 이런 사람이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잖아요. 미래에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항상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렇게 규정되는데, 저는 그 여백에서 오는 질문들이 계속 떠올라요.

강아지 말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예요. 운동할 때 좋지만, 하기 싫고 힘들 때도 있고 매일 좋지는 않거든요. 무언가로 저를 규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얘기하자마자 불안해져요. 그래서 자기소개가 어려워요. 제가 이런 말을 친오빠한테 했더니, 생각이나 감정을 좀더 편하게 표현해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제가 틀리게 말해도 아니라고 반박할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요. ‘너 예전에는 강아지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할 사람은 없겠죠. 그냥 정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저만의 소심한 강박인 것 같아요. 그래도 조금 더 표현하려고는 하고 있어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면서 말하는 것도 일종의 연습이라고 생각해요.

Q. 그럼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떤 친구인 것 같아요?

A. 편한 사람일 것 같아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거절하기보다는 맞추려는 편이에요. 이야기도 잘 들어주려는 편이고. 만나서 재미있는 말만 해야 할 것 같은 친구도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다만, 지각을 자주 하는 친구일 것 같기는 해요. 자주 시간을 체크하지만, 항상 조금씩 늦어지거든요. 슬프지만 습관인 것 같아요. 오늘도 늦었잖아요! 아까 근데 10분 늦는다고 말하고 나니까 의외로 일찍 도착한 거예요. 근데 어차피 이미 늦는다고 말했으니까 근처에서 마카롱을 샀어요. 진짜 늦었으면 안 살 수도 있었겠지만…

Q. 맛있었어요! 이런 지각은 괜찮지 않나요?

A. 이게 습관처럼 반복되는 게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지난번에는 스키장에 가기로 했는데, 아침에 각자 집 앞에서 같은 버스를 타서 그 안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근데 헐, 제가 또 늦은 거예요. 그렇게 스키장 가는 날까지 늦을 줄은 몰랐는데! 지난번에는 친구 결혼식에도 늦었어요. 너무 미안했는데, 의외로 그러려니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아직도 저를 보면 ‘너 내 결혼식에 늦었잖아!’ 해요. 그날 정신없고 해서 잘 모를 줄 알았는데 다 알더라고요. 하하.

Q. 살면서 정말 잘한 선택이 있나요?

A. 없어요, 진짜 없네. 선택이라는 게 그 순간에는 늘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거고, 훗날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는 거라서 평가는 바뀔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또 못한 선택일 수도 있잖아요. 아, 운동을 시작한 건 정말 잘했어요. 이건 백 퍼센트에요! 언제가 됐건 꼭 해야 했던 일이었어요.

일러스트 이민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게 어떻게 느껴지나요?

A. 저는 서울에 대한 로망은 별로 없었어요. 아, 제가 대구에 살았거든요. 오히려 저희 오빠는 서울에 꼭 가서 살고 싶어 했는데, 저는 다른 지역보다는 괜찮을 테니까 살아는 보고 싶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어요. 어느덧 서울에 8년째 살고 있는데, 살다 보니까 이 생활에 익숙해졌어요.

서울에 살면 그만큼 집값을 걱정해야 하지만, 다양한 가능성이나 재미도 많은 것 같아요. 일단 사람이 많고 복작복작하고 갈등도 많잖아요. ‘청년’도 서울이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청년 시기에는 삶의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일어나요. 저는 지금 일을 안 하는 상태고 취직을 준비 중이니까, 아마 모두가 겪을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어요. 가족 중에서 저만 취직을 못 해봤는데, 경제적인 고민이 계속 들어요. 소비만 하고 돈을 벌지 못한다는 부담감이 늘 있고, 소위 말하는 사회인 구실을 못 하는 느낌이 들어요. 

여성은 뭐랄까, 제가 여성임을 얼마나 의식해야 할지 혹은 의식하지 말아야 할지 입장을 정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점에서 서울이나 청년이나 여성이나 공통적으로 불안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네요. 불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불안하고, 거주나 장래도 불안하죠.

‘여성’은 셋 중에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서울이나 청년에 관해서는 이런 얘기를 하면 몇 마디 안 해도 공감대가 쉽게 형성되는 키워드에요. 제가 겪는 어려움을 말을 꺼내면 ‘그럴 수 있지.’ 하잖아요. 여성은 고민조차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한정돼요. 비슷한 사람한테만 얘기할 수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나 가족들이랑 얘기해보면 제가 겪은 부당한 일에 ‘너무 좀 예민하다’고 하는 반응도 있어요. 여성에 대한 이슈를 말할 때 그 일은 다른 일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사회 이슈에 관해서 느끼는 게 제 경험이랑 연결될 때도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는데, 자유롭게 얘기하기가 어려워요.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여성 집단 안에서도 잘 모르거나 근거가 없으면 편하게 얘기하기 어려운 분위기고, 틀리지 않은 걸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요. 모든 말을 할 때 자료를 제시해야 할 것만 같고. 저마다의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여성’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면 늘 증명을 요구받는 느낌이에요.

Q. ‘~답지 않다’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A. 저는 공부가 정말 재미있고, 알아가는 게 좋거든요. 근데 ‘공부가 재밌고 좋아.’라고 말하기 좀 어려워요. 그런 사람들은 왠지 쭉 성적도 좋고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교에 다녔고 똑똑하고 대학원 연구도 잘하고 하는 멋있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 같은데 거기에 제가 속하지는 않거든요. 주변에서 한 번씩 들어보는 그런 엄친딸 같은 길을 걸어 오지도 못했고, 이제껏 부모님이 어디 가서 자랑할 거리를 많이 만들어드리지는 못했던 게 좀 아쉬워요. 한편으로는 타이틀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싶기도 해요. 좋아하는 건 그런 것 때문에 하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재미있고 만족하니까 하는 건데, 오히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쉽기도 하고, 여러모로 복잡한 부분이 있어요. 사실 뭐가 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효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한 적이 있어요. 그 말처럼 그냥 아무나 되어도 되는 거니까요.

자기소개 하나에도 조심스러운 키키라서, 절대 ‘아무나’가 될 수 없을 것 같다며 함께 웃었다. 키키는 ‘아무나’가 되기에는 너무 단호하다. 진로의 선택처럼 중요한 순간에, 신중하지만 강단 있게 결정하는 것 같다.

전공을 살려서 바로 취업을 하는 길이 있었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제대로 준비를 해서 조금 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도 있었어요. 근데 저는 그때 취업을 안 하고 대학원에 가는 세 번째 선택지를 택한 거예요. 저한테 있던 선택지 중에서는 가장 마음에 들어서요. 이게 잘한 선택일까 하는 생각보다는 잘한 선택으로 만들 수 있게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하고 싶은 걸 선택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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