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첫인상으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하는 말을 많이 들어요. 누구랑 닮았다고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인사하고. 머리를 이렇게 탈색하기 전에요. 흔하게 생겼나 봐요. 슬프게 생겼다고도 하는데 사실 그렇게 슬픈 사람은 아니에요.
주말의 끝자락에 은사자가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한가운데에 시멘트 빛깔의 커다란 탁자가 무심하게 놓여있고, 벽도 바닥도 천장도 벽에 걸린 그림마저도 회색에 가까울 정도로 채도가 낮은 곳이었다. 부드러운 조명과 고소한 커피 내음 때문에 그 회색빛들이 차갑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곳의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닮은 은사자는 공간의 일부처럼 잘 어울렸다.
Q. 그럼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A. 저는 낙천적이에요. 될 대로 되라고 해요. 그게 낙천적인 게 아닌가? 아무튼, 뭐가 잘 안 될 것 같아서 걱정하지는 않아요. 또 저는 그래도 예의 바르고요. 서비스 노동자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에요.
Q. 삶의 목표나 신념이 노동과 깊게 관련이 있나요?
A. 네, 살면서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계산할 때 카드를 던지면 안 되고, 식당에서 밥이 잘못 나오거나 했을 때 굳이 화내면서 항의하면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식당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카드 던지는 사람이 너무 싫었거든요. 어떤 사람은 플라스틱 물컵을 던진 적도 있어요. 저한테는 아니고 바닥에 던진 거지만. 아, 근데 얼마 전에 먹을 게 너무 없어서 로켓배송을 시키긴 했어요. 택배 노동자 착취인데, 그래서 바로 후회했어요. 근데 또 반대로 홈플러스에서 세제 사 오다가 너무 무거워서 ‘아 그냥 배달시킬걸’ 한 적도 있고요.
Q. 어제는 뭐 했나요?
A. 어제는 음… 종일 집 밖에 안 나갔어요. 아침 여덟 시부터 일어나서 방 청소를 하고 이불을 빨고 설거지하고. 아, 눈 뜨자마자 ‘나 혼자 산다’를 봤어요. 제가 이걸 진짜 많이 봐요. 한 편에 기본 다섯 번씩은 봤어요.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하니까 남이 혼자 사는 걸 보면 재밌어요.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집안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 보면서 나도 깨끗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Q. 요즘 일상의 기쁨이 있다면?
A. 최근에 변기를 뚫었어요! 화장실 변기가 일주일 째 막혀있었거든요. 그동안 계속 일부러 밖에 오래 있다가 집에 와서는 바로 자고 그랬어요. 화장실 가고 싶어지면 안 되니까. 이것저것 다 해봐도 안 됐는데, 진짜 최후의 수단으로 탄산 실린더 넣고 총처럼 쏘는 기구로 했더니 된 거예요. 너무 기뻤어요.
‘인생을 팔아서 덕질을 하는 은사자’라고 소개한 그는, 다양한 분야의 ‘덕질’을 하지만 요즘은 가수 선미를 주로 좋아한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지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재미있는 구석을 다양하게 많이 만들어둔 것이다.
저는 인생에 재미가 많아요. 재밌는 게 많고 진입장벽이 낮아요. 선미도 선미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도 좋아하고. 드라마도 좋아하고. 최근에는 수화를 배웠는데 그것도 재밌었고.
Q. 어떻게 그렇게 재미가 많아요?
A. 청소년 시기에 과도하게 성소수자 정체성에 매몰돼서 내 인생은 나 혼자라고 생각하고 혼자 책을 보고 그렇게 살았어요. 아 근데 요즘엔 또 말할 구석이 많아져서, 주변에 친구들이 생기고 혼자가 아니게 되니까 책도 안 읽고 글도 안 쓰긴 하네요. 큰일이에요.
Q. 혹시 긴급하게 기분 좋아지는 방법이 있나요?
A. 음, 역시 선미를 보는 거죠. 아니면 선미가 아니어도 좋아하는 걸 뭘 보거나. 근데 저는 기분이 잘 안 나빠져요. 항상 선미를 보고 있어서 기분이 나빠질 새가 없는 것 같아요.
Q. 아니, 선미를 볼 수 없을 때도 있잖아요. 만약에 일하다가 기분이 나빠지면 어떡해요.
A. 일할 때는 기분이 나빠질 때가 별로 없어요. 있어도 동료들이 잘 토닥여 주고. 일할 때보다는 지하철 같은 데서 누가 치고 가면 기분이 나쁜데,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화를 내요.
Q. 화를 내면 시비가 붙을 수도 있지 않나요?
A. 어떻게 될지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는데… 둘 다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치고 화내고 서로 지나가 버리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아, 옆자리 남자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서 저도 같이 벌렸는데 그 아저씨가 다리 좀 오므리라고 그런 적이 있어요. 그래서 먼저 다리를 오므리시라고 했죠. 그러니까 그냥 투덜대다가 내리더라고요. 그런 남자들은 여자들이 아무 말 못 할 거라는 생각으로 시비 거는 거라서, 다른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당황하더라고요.
Q. 그러다가 진짜 싸움이 나면 다칠까 봐 걱정은 안 돼요?
A. 근데 남자가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나도 꼭 지기만 할까 싶어요. 싸움 나기 전에 상대가 먼저 자리를 피하기도 하고. 근데 이건 제가 키도 크고 머리도 짧고 그런 거랑 관련 있는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드는 생각일지도 몰라요.
Q. 은사자의 불행했던 때는 언제인가요?
A. 재수할 때요. 그 이후의 다른 불행들은 어느 정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는데, 대학에 다 떨어진 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아니 사실 어떻게 할 수 있긴 하네요. 대학을 안 가면 되니까. 아, 그리고 작년에, 불행했다기보다는 나를 돌보는 시간을 적절하게 배치하지 못했어요. 바쁘고 피곤하니까 주말이 되면 가만히 동영상만 봤어요. 그래서 올해 목표는 주말 이틀 중 하루는 밖에 나가는 거예요. 근데 집 앞 슈퍼보다는 멀리 나가야 해요. 일상 공간을 좀 벗어나 보려고요.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기분
Q. ‘~답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A. 전형적 시나리오답지가 않아요. 요즘 제가 성폭력에 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폭력에 노출될 게 별로 걱정이 안 되고 나랑 상관없는 먼 이야기 같고. 이성애적 관계에 들어간 적이 한 번도 없기도 하고, 성적 대상화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잘 안 들어서요. 또, 성폭력 사건이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같이 일하는 사람들 다 여자고 살면서 남자를 만날 일도 아예 없어요. 제 인생에서 이름이 있는 남자가 아빠, 남동생,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 이렇게 세 명밖에 없고 그 친구도 이제는 거의 안 보고. 물론 동성 간 성폭력도 있지만. 아무튼, 그런 위협이 잘 실감 나지는 않은가 봐요.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살아가는 건 어떤가요?
A. 집 구하기가 짜증 나요. 청년이어서 그런지 여성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가 집을 구할 때 나이가 안돼서 버팀목 전세자금 대출을 못 받았고. 주택공사에서 나오는 좋은 조건의 집도 거의 다 신혼부부 대상이잖아요. 그거 말고 서울에 사는 거는, 음,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계속 산 게 아니라 고향이 따로 있으니까,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기분이에요. 사실 그동안은 1~2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니까 서울이 내 동네라는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이 집에서 오래 살 수 있어서 집이랑 친해지는 중이에요. 이제 막 동네에도 정을 붙이고 있어요.
Q. 미래에는 어떻게 살고 싶나요?
A. 잘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에 저는 27살에 뭐가 됐건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27살이 빨리 돼서 그냥 ‘아 27살에 뭐가 될 수 있는 건 좀 아니었네’ 하는 거죠.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계획보다는 그냥, 변절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해요. 김문수가 되면 안 된다. 남양을 불매하고 있는데, 초코에몽이 먹고 싶어도 구매하면 안 된다. 근데 지금까지는 계속 이사를 해야 하니까, 제 선택이라기보단 조건이 계획을 제대로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제 좁긴 해도 약간 오래 살 수 있는 곳이 있으니까, 계획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은사자는 시민단체에서 일하기 전부터 일상에서 크고 작은 실천과 운동을 해왔다. 어쩌다 운동을 하게 되었는지, 지금껏 계속하는 원동력이 뭔지 궁금했다.
제가 어릴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크면 위인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 위인전에 마틴 루터 킹, 사르트르, 루쉰, 시몬 베유, 함석헌 뭐 이런 사람들이 나왔거든요. 태국에서 부패와 싸운 잠롱도 있었고요. 그런 사람들 이야기 읽으면서, 저도 좀 정의롭게 살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거 같은데, 계속하고 있네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제가 바뀌는지는 안 중요하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해요. 물론 지금 그렇게 안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바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