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지 않은 사람들 4. '엘리트' 답지 않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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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지 않은 사람들 4. '엘리트' 답지 않은 B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오늘 날씨가 궂어서 옥상에 있는 화분을 안에 들여놓느라 좀 늦었어요.

사진 찍는 게 취미라는 B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등장했다. 반납하려고 들고 나왔다는 책도 두 권이나 들고 있었다. B는 몸짓을 섞어가며 시원시원하게 말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질문하면 적극적으로 막힘 없이 답했는데, 워낙 조리 있게 말해서 듣는 내내 재미있었다. 한참 이야기하다 문득 시계를 봤을 땐 세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Q. 어제 하루는 어떻게 보내셨어요?

A. 어제가 목요일이었죠? 어제 계획이 있었는데, 실패했어요. 하나는 읽고 있던 책을 끝까지 읽는 것, 또 하나는 강의를 듣는 것이었어요. 제가 요즘 케이무크(K-MOOC)에서 온라인 공개강좌를 듣고 있어요. 요일마다 듣는 게 있는데 어제는 생물 강좌를 들으려고 했거든요. 제가 고등학교 때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에요. 그런데 두통이 있어서 둘 다 못했어요. 그냥 누워서 책을 봤어요.

Q. 책을 많이 읽나 봐요.

A. 네, 저는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웃음)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그동안 못 읽은 걸 빨리 읽어야 한다는 조급함도 있죠. 회사에 다니다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진로를 바꾸게 됐어요. 회사에 다니면 바쁘게 일하니까 다른 생각에 몰입할 여유가 없어요. 뉴스를 보면 뭐 이런저런 사건을 접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내 할 일이 있으면 외면해야 하잖아요. 그럴 때 오히려 진짜 내 할 일은 따로 있는데, 삶에 치여서 못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나도 무엇이든 보탬이 되고 싶고, 좀 더 적극적인 연대를 하고 싶은데. 그래서 그 아픔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가가 되려고 해요. 이런 고통을 남기고, 잊지 않도록 기억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어요. 처음엔 그냥 내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제가 다양한 뉴스를 보고 사건을 접하면, 그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거죠. 가장 컸던 건 4월 16일이었어요. 그날 처음 일기 형태가 아닌 글을 써봤어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우리가 사는 곳에 누군가의 슬픔, 지속되는 슬픔이 분명히 있잖아요. 동시대의 비상식적인 일과 분노가 있고. 저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는데, 찍거나 쓰는 나만의 기록을 통해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개선되어야 할 점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일을 바로 시작할 수 있는 방송작가를 하게 됐어요.

Q. 방송국 일은 어땠나요?

A. 너무 힘들었어요. 노동환경이 정말 열악해요. 페이나 노동시간이나 업무량 같은 조건도 그렇지만,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힘들죠. 집에 못 가는 건 당연하고. 가장 큰 문제는 이 모든 게 개선될 가능성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지금에야 이렇게 말하지만, 그때는 자존감이 낮아져서 고민도 많았어요. 저는 회사를 그만두고 굳이 그 길로 들어간 건데 정말 잘 버티고 싶었거든요. 처음 하는 일이고 서투른데 하는 것마다 비난을 받게 되니까 ‘아,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거기가 이상한 건데, 나와서 보니까 알지만, 그 당시엔 계속 이것도 못 버티면 아무 데서도 일 못 하면 어쩌나 싶고. 근데 지금은 확실히 알아요. 버틸 필요가 없었어요. 버티는 게 좋은지 그럴 필요 없는지 판단을 빨리하는 것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막 적폐, 비리 고발하잖아요? 근데 자기네 이야기는 고발하지 않아요. 막내 작가 이야기는 안 알려지니까 개선도 어려운 것 같고요. 그래도 작년 말에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했고,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들자고 이야기도 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Q. 이제 방송국은 가지 않을 건가요?

A. 저는 아직도 방송프로그램 만드는 일에는 열정이 있어요. 하지만 그 조직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물 만난 고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도 물을 만나야 하는데. 제가 물 만난 고기처럼 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어떤 때 재능이 발휘되고 아이디어가 샘 솟는지. 저는 일단 같이 일하는 사람과 상식적인 대화가 가능해야 해요. 그런데 그건 진짜 기본 아닌가요? 지금은 그냥 쓸 수 있는 걸 쓰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아. 벌이는 따로 필요한 것 같아요. 대신 공부하거나 글 쓸 수 있는 시간이 보장되는 일이어야 하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Q. ’~답지 않다’고 생각해본 적 있나요? 세상이 제시하는 관점이랑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거나.

A. 저는 사람들이 편하다고 하는 길과 맞지 않았어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는데 결국 이탈했거든요. 엘리트 코스라는 건 남들보다 빠르다는 거예요. 그러면, 같은 선상에만 있어도 느리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기졸업을 하고, 명문대를 가고, 석박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대학입시에 실패하면서, 전혀 늦은 게 아닌데도 조바심이 나서 또 떨어지면 죽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전부였고, 다 같이 달려가던 코스에서 저만 이탈한 거니까.

그래도 어떻게 취업 잘 되고 돈 잘 버는 전공을 하게 됐는데, 또 굳이 힘든 길을 가기로 했어요. 주변에서도 다들 왜 굳이 사서 고생하냐고 하던데요. 근데 거기서 이탈하고 보면 보여요. 그 선로가 아니어도 이 길도 있고 저 길도 있고 다 있구나 하는 게 말이에요. 제 친구들은 거의 다 그 코스대로 가서 박사를 하거나 연구재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물론 걔들이 아무 고민이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선택을 한 거겠죠. 근데 저는 나 자신을 더 외면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는 나를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사실 밥 벌어 먹고사는 것 중요하지만 혼자 먹고살기에 그렇게 많이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여러모로 한국형 엘리트답지는 않았죠.

Q. 서울에서 청년 여성으로 사는 건 어떤가요?

A. 나를 가두는 게 너무 많아요. 서울은 미세먼지가 제 출사를 늘 방해해요. 겨울 하늘이 원래 참 맑고 예쁜데, 그걸 못 찍고 있어요. 취미 생활뿐 아니라 일상생활도 방해하고요. 요새는 나갔다 오면 목이 칼칼하고 눈이 뻑뻑하고. 청년이라는 점은 빚 때문에 뭘 못 하는 거요. 변명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정말 마음의 짐이에요. 갚아야 할 학자금이 있다는 건 참 그래요. 빚이 있는 사람이니까 돈을 쓸 때 주저하고, 여행도 잘 못 가요. 여성이라는 것도 그래요. 저는 바깥을 걷고 풍경을 보고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 이런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근데 혼자 여행가기도 망설여지고, 밤에 혼자 어디 나가기 힘들죠.

예전에 초여름에 딱 우산 들고 걷기 좋게 비가 내리던 날이 있었어요. 이어폰 꼽고 한 시간 걷다 오고 싶은 거예요. 근데 시간을 보니까 밤 열한시가 넘어서 그냥 잘까? 잠깐 고민했는데, 이 감성을 죽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근처 사는 친구한테 같이 산책하러 가자고 연락을 했어요. 근데 제가 남자였으면 이런 고민 안 했을 것 같거든요. 그냥 휙 나갔다 오면 되지. 

Q. B는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A. 세상의 다양한 종류의 슬픔을 쓰고 싶어요. 어떤 슬픔인지는 세월이 지나면서 바뀌겠지만. 왜 하필 슬픔이냐 하면, 남의 슬픔을 읽고 공감하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어서. 책을 읽고 그럴 때 저는 박하사탕 먹은 것처럼 개운하더라고요. 내 시련으로 쩔쩔매다가, 이게 나만 겪는 일이 아니고 어떤 누구도 겪고 있는 것이고, 이 사람은 이렇게 겪어냈고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걸 보면 좀 후련했어요. 아픈 사람이 어떻게 아팠고 왜 아플 수밖에 없었는지 쓰는 게 중요하고 필요해요.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종류의 슬픔을 겪은 사람만이 보낼 수 있는 위로가 있거든요.

아무튼, 나 혼자 잘 사는 게 싫어요. 누구는 굶어 죽고 누구는 맞아 죽는데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너무 싫어요. 모르는 척할 수가 없어요. 그것에 관해 얘기하고 싶고, 바뀌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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