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우리 이민갈까? 12. 유토피아를 기대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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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이민갈까? 12. 유토피아를 기대했다면

유의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유토피아라는 국가의 궁극적 이념은 공익이 허용하는 한에서 시민들을 되도록 많은 시간 동안 육체적 노동에서 자유롭게 하며, 시민들이 자유를 만끽하고 정신적인 고양에 힘쓸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에 인생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뉴질랜드에 살면서 외국 생활의 환상이 하나씩 부서졌다.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채 상상만으로 그렸던 모습은 실제와 달랐고, 예측하지 못했으니 준비도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삶을 꿈꾸며 희망을 갖는 것도 좋지만, 이민은 중대한 결정이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신중한 판단을 돕기 위해, 내가 가졌던 환상과 직접 경험한 현실을 비교해보았다.

노력으로 평가받는
공정한 사회

성차별이 심한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다 보니 공정한 사회를 꿈꿨고, 한국이 아니라면 모든 면에서 더 나을 거라고 기대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2017년 OECD 데이터 기준으로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뉴질랜드의 약 5배다. 뉴질랜드는 채용 과정도 비교적 공정하다.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지 않고, 생년월일과 성별을 쓰지 않는다. 학벌주의도 없다. 어느 학교의 특정 학과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한국처럼 모든 면에서 특정 학교가 우수하고 무슨 수를 쓰든 그 학교에 꼭 입학해야 하는 대학서열주의도 아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원한 건 단순히 공정한 사회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가졌던 이점을 그대로 가진 채 성차별만 없는, 나에게 유리한 사회를 바랐던 것 같다. 제1 언어가 영어가 아니고 현지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에게 그 ‘공정한’ 경쟁은 한없이 불리하다. 한국에서는 한국어 실력이 걸림돌이 된 적이 없어 특별히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으나, 이력서를 쓰는 기본 형식과 들어가야 할 내용과 문체에 관해 알고, 표준 맞춤법을 구사하며 서류에서 탈락하지 않을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었다는 건 굉장한 이점이었다.

뉴질랜드는 레퍼런스 사회다. 세입자를 구할 때도 추천서를 받고, 직원을 뽑을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회사에서는 내 이력서를 받으면 나의 옛 직장의 매니저에게 전화해 평판을 묻는다. 이런 시스템은 현지에 인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고, 여기서 일한 적이 없으면 평판을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 다른 일을 구하기가 더 어렵다. 게다가 뉴질랜드에서는 인터넷에 번거롭게 공고를 내기보다 주변에서 추천을 받아 채용하는 걸 선호한다. 

한국에서 내가 인맥으로 대단한 혜택을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관심 있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알고 지냈고, 고급 정보는 아니어도 최근 동향을 들을 수 있는 친목 자리도 종종 있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뉴질랜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어디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을 일도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뉴질랜드의 채용 방식이 반드시 공정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완벽한 일과
삶의 균형

뉴질랜드는 돈을 벌기에 좋은 나라는 아니다. 경제가 발전했거나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해야 돈을 벌 텐데 휴일에는 쉬고 야근도 별로 없다. 최저임금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세금이 높아 일을 많이 해도 실수령 금액이 줄어든다. 뉴질랜드도 한국처럼 소득 구간에 따라 다른 세율이 적용되는데, 어느 구간부터는 일을 더 하는 것보다 쉬는 게 건강뿐 아니라 가계경제에도 이롭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으로 주 53시간 일한다면 소득 구간이 바뀌어 세율이 높아지고, 52시간 일할 때보다 세후에 받는 임금이 적어진다. 연 소득 기준이라 시간당 임금이 높다면 이 구간의 기준점은 하향된다. 시간당 임금이 25불인 사람은 주 36시간 이상 일하면 손에 쥐는 금액이 더 낮아지는 구간이 생긴다. 물론 공제되는 금액은 세율뿐 아니라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변하지만, 지금은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히 세율만 적용해 계산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원하던 ‘워라밸’이다. 그러나 막상 외국에 나와 보니 이것저것 돈이 많이 들고, 예상보다 지출이 커지는 일이 반복됐다.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으려면 없는 걸 모두 새로 사야 하고, 가족도 친구도 없으니까 필요한 걸 어디서 빌리거나 가져올 수도 없다. 게다가 나는 그동안 한국인으로 살아온 역사가 있어서, 키위들처럼 털털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한다. 범퍼가 부서지고 찌그러진 자동차에 깨진 거울을 달고 다닐 수가 없다. 내가 사는 집은 보일러가 없는데, 한국에서만 살던 나는 집안에서 옷을 껴입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전기장판이나 히터라도 빵빵하게 틀어야 한다. 따뜻한 물이 아니면 씻을 수가 없어서 비싸도 온수를 써야 한다. 

필요한 만큼 쓰고 부족한 돈을 채우기 위해서는 일을 더 할 수밖에 없다. 워킹 홀리데이로 와서 투잡하는 친구들도 많이 봤고, 나와 애인도 한 곳에서 계약된 근로시간이 적다 보니 투잡도 하고 쓰리잡도 했다. 임금이 한국보다 높다고는 하지만 어디에서나 최저임금 생활자인 내 입장에서는 실감하기 어렵다. 최저임금이 한국의 두 배가 아닌데 월세가 서울의 두 배니까 일을 더 많이 해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게다가 외국인이라 주거비 보조를 받을 수도 없고, 학비도 내국인보다 훨씬 비싼데 학자금 대출도 받을 수 없다. 가끔 퇴근하고 간신히 눈을 붙이다 다른 일터로 출근하며 ‘우리 이렇게까지 해서 행복해져야 할까?’ 한다. 그래, 우리 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을 떠났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일러스트 이민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별 없는 세상

딱 하나 내 환상에 제대로 부합했던 점이 있다면, 뉴질랜드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도 높다. 마트에서 자연스럽게 스킨십하는 레즈비언 커플을 봤고, 레즈비언 바가 아닌 평범한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키스를 나누던 커플도 있었다. 아무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 장면들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백인 퀴어가 아니어도 존중받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뉴질랜드는 인종 차별이 별로 없다고들 하지만, 아시안 차별은 분명 있다. 물론 교묘하게 일어나서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바로 우리 집 앞에 있는데도 혹시 길을 잃었는지 물으며 다가오는 백인 여자의 호의는 차별일까? 내가 영어를 전혀 못할 거라고 가정하고 지나치게 큰 소리로 과도하게 천천히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현지 영어 사용자들의 호의는 어떨까? 내가 ‘Thank you!’ 하면 흐뭇하게 ‘아리가또’ 외치고 뿌듯한 표정을 짓는 손님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소수자 차별은 많이 당해봐서 단번에 잘 아는데, 인종 차별은 이보다 더 헷갈리는 상황도 많다. 직원이 나를 조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영어 의사소통 실력의 부족 때문인지 외모가 아시안이기 때문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물론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도 차별 대우를 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이런 게 지긋지긋하다고 해서 한국인들 사회에서 지낼 수도 없다. 교민들의 인식 수준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 있고, 퀴어로서 버티기 어려울 만큼 갑갑하다.

어차피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면

여기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 이민을 왔다면 이곳이 바로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나 비자 문제없이 주류 사회에 편입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뉴질랜드에 살았던 한국 친구들은 오히려 서울을 동경하기도 한다. 인종 차별을 받지 않을 수 있고, 일자리가 많고, 빠르게 발전하는 편리한 도시라는 것이다. 백인 남성이 안전하다고 하는 나라가 나에게는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뉴질랜드에 온다고 키위들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누군가에겐 환상이 아니라 현실인 것도 나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소용없다. 

여유로운 이곳에서 삶의 레이스를 멈추고 잠시 쉴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뉴질랜드 사회에 진입하려면 다시 한번 영주권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릴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어차피 애쓰며 살아가야 한다면, 기왕 노력할 거 어느 방향으로 달릴지 한 번 쯤 고민해보자. 진짜로 얻고 싶은 게 한국에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얻고 싶은 건 이번 한 번을 끝으로 삶에 달리기 같은 건 없다는 약속이다. 과연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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