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 때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스포츠를 좋아했더라면 ‘대한민국!’이라도 한번 외쳐봤을 텐데 그렇지도 않고, 내가 속한 국가는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국민에서 자주 배제하는지라 애국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놀랍게도 뉴질랜드에 오고 나서 파트너와 함께 ‘역시 우린 뼛속까지 코리안!’ 하는 날이 많아졌다. 비행기를 타고 열두 시간을 날아온 이곳에서 가장 그리운 건 한국 음식이다. 한국 식당도 있지만, 당연히 한국에서보다 두 세배의 가격을 내야 하고, 현지인의 입맛에 맞춘 건지 내 입엔 너무 달거나 짜다. 한국마트에서 장을 봐도 채소 같은 식자재의 종류가 조금씩 달라서 내가 찾던 고향의 그 맛은 아니다.
한국 입맛
이사 와서 밥통을 처음 개시한 날이었다. 밥이 잘 되었는지 보려고 뚜껑을 열자마자 달콤하고 고소한 갓 지은 밥의 냄새가 훅 풍겨왔다. 유혹을 못 이겨 반찬도 없이 밥통 앞에 서서 맨밥을 퍼먹었다. 내 인생에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사실은 뉴질랜드에 와서 한참 음식이 입에 안 맞았다. 자취를 워낙 오래 해서 별다를 것도 없었는데 사람의 입맛이란 이렇게도 보수적인가 보다. 한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샌드위치만 매일 먹어도 될 것 같더니, 어느새 이틀에 한 번쯤은 쌀이 들어간 김밥 비슷한 걸 사 먹고 있었다. 그랬는데도 한국에서 먹던 밥이 뼈저리게 그리웠다. 익숙한 맛, 내가 먹던 맛, 더는 모험하지 않아도 되는 그 맛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비로소 알았다.
물론 새로운 걸 이것저것 사 먹어보는 게 재미있던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음식은 늘 기대 이하였고 가격은 너무 비쌌다. 영어로 된 메뉴판을 읽어도 어떤 음식일지 감이 안 오는데, 배가 고플 때마다 그 지겨운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때로는 간장에 밥을 말아 놓은 무슨 국밥 같은 돈부리를 받아서 다 못 먹고, 너무 묽어서 물처럼 흐르는 인도식 커리가 나와서 밥을 남겼다. 밥으로 먹기엔 젤리처럼 너무 달았던 태국 요리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웬만큼 아무 데나 들어가서 아무거나 사 먹어도 맛있었기에, 입맛이 까다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 세계 음식들은 다 현지화되어 이미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진 음식이었나 보다. 여기서는 항상 내 한 시간 시급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도 불만족스러운 음식을 받았고, 영어를 못 해서 항의도 잘 못 했다. 하숙 비슷하게 방 한 칸만 임대하는 플랫(Flat) 방식으로 살면서는 직접 요리하기도 어려웠다.
그날은 플랫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이사를 한 날이었다. 사실 그 밥통은 캠핑용이고, 오래되어서 밥이 맛있게 되는 제품은 아니다. 그동안 밥 먹을 때마다 반복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너무 지쳐있었다. 사실은 밥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무 경험과 사전 지식이 없는 이 새로운 곳에 온 뒤로 내 일상은 전부 예측할 수가 없는 일들뿐이었다. 언제나 반쯤 체념하고 순응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드디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내 주방, 내 밥통, 내 냄비가 생겼다. 그날 김치찌개를 끓여 먹던 기분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한국에서와 똑같은 맛은 당연히 아니지만, 적어도 대실패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익숙한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배달천국에서
벗어난 한국인
서울은 참 맛있는 게 많은 도시였다. 내 입맛에 맞는 도시였겠지만 말이다. 워낙 다양한 이민자들이 사는 오클랜드의 음식은 정말 각양각색이고 인건비가 비싸서 음식 가격까지 비싸다. 저렴한 가격으로 취향에 맞는 음식을 먹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여기 사람들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간편하게 샌드위치나 과일로 점심을 대신한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재미로 살던 한국인으로서 적응할 수가 없다. 여기 살아도 나는 먹는 게 중요하다. 사람을 만나면 밥 먹었는지부터 묻는 한국인이니까 말이다. 한국에서와 다름없이 일상의 가장 큰 고민은 ‘뭐 먹지?’다. 배달 앱으로 손가락만 움직여 현관 앞에서 받아먹던 음식들이 그립고, 종류도 브랜드도 다양해 골라 먹는 재미가 있던 한국식 치킨도 그립다. 일 분만 걸으면 편의점이 있어 한밤중에도 먹을 걸 구할 수 있던 생활도 그립고, 24시간 카페가 있어 새벽에도 노트북만 들고 가면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며 일할 수 있던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음식 재료 뿐만 아니라 생필품도 다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포장도 깔끔하고 조리도 간편한 음식들을 전날 밤에만 주문해도 새벽같이 받을 수 있었다. 생필품도 무겁게 들고 올 필요 없이 생수 하나까지 집 앞으로 배달이 왔다. 여기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물론 마트에서 온라인 주문을 할 수 있지만, 만 원 이상을 배달비로 내야 하고, 음식 배달도 한화로 오천원 이상을 별도 지불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뭐든지 사람을 쓰면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내 라이프스타일은 생각보다 단순하게 돈에 의해 결정된다. 주유나 세차를 셀프로 하는 건 물론이고 날이 갈수록 간단한 집수리나 자동차 수리마저 스스로 하게 된다. 어제도 무거운 생수를 여자 둘이서 잘만 들고 왔다.
한국인을
벗어날 수 없는
한국인
습관이 참 무섭다. 뉴질랜드에서는 수돗물을 그냥 마셔도 된다는데, 파트너와 나는 한국인으로서 차마 그렇게 못한다. 노동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아파도 꾹 참을 뿐 아니라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잘 항의하지 않는다. 나부터도 그렇다. 반면에 한국 고용주들은 어떻게든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하고 은근슬쩍 일을 더 시키려고 한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한국인들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전형적 한국인을 생각하면 ‘아재’와 ‘개념녀’가 떠올랐다. 안하무인의 가부장에 나이를 더 먹었으니 꼭 존경을 받아야 하는 부장님과, ‘저도 여자지만 요즘 여자애들은 나약해서 싫다’는 차장님도 떠올랐다. 동성애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고, 퀴어 퍼레이드를 반대하며 부채춤을 추는 것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나는 한국의 문화가 다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파트너와 여러 아르바이트만 하던 나에게 특별한 기술이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비자가 불안한 외국인이고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말까지 잘 안 통하는 우리는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 믿을 수 있는 특기는 한국어고, 자연스럽게 한국어 사용자를 원하는 고용주 밑에서 일할 기회를 얻기 쉽다. 그리고 그 고용주는 높은 확률로 한국인이다.
세상에는 한국인들만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있다. 여기서는 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인터넷이 고장 나도 어디서 고쳐야 되는지 모르겠고, 쌀 하나를 사려 해도 종류가 너무 많다. 그럴 때 좀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인 수리기사의 연락처를 받고, 뭐라고 쓰여 있는 쌀을 사야 내가 찾는 그 쌀인지 한국인 동료에게 묻는다. 한국 콘센트를 꽂을 수 있는 컨버터를 어디서 파는지, 어느 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살 수 있는지 같은 실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도 다 한국인들에게 물어물어 얻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검색도 꽤 잘했었는데, 영어쓰는 나라에 와서 한국어로 검색 해봤자 뭘 찾기가 쉽지 않다.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세상에 소시지의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내가 찾는 그 소시지가 바로 프랑크 소시지라는 걸 ‘척하면 척’ 알아줄 사람들은 한국인밖에 없다. 한국인과 교류하고 싶지 않다. 한국식 인간관계도 소문과 평판을 신경쓰는 일도 피곤하다. 그러나 내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런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그런 사람'
민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오직 잘난 사람들뿐이었다. 그 나라의 언어에도 능하고 의사소통도 잘하고 사회의 규범을 몸에 익히고 잘 적응한 사람들만이 도움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 여기 와서 주유소에서 기름 넣는 법을 몰라 다른 운전자에게 폐를 끼쳐야 했고, 쓰레기를 무슨 요일에 버리는지 몰라 또 주변 사람을 귀찮게 해야 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나도 그러고 싶었다. 서로 돕지 않고 폐도 안 끼치고 자기 일은 스스로 하며 타인과 깔끔하고 담백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사실은 한국에서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검색에 능하고 한국어를 잘하고 예의를 잘 배워서 어디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메뉴가 복잡한 카페에서 하나씩 읽어보며 주문도 잘할 수 있었고, 지하철역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 잘 알아서 지나가는 바쁜 사람을 붙잡고 묻지 않아도 됐다.
사실은 똑똑하고 세련되게 행동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았다. 분명 방법을 다 가르쳐줬는데도 학교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하는 외국인 친구가 답답했다. 일정이 있는 나를 붙잡고 복도에서 지금 당장 수업 신청을 같이하자는 게 난감했다. 길을 설명해줬는데도 내 시간을 뺏으며 같이 좀 가달라는 아주머니가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예의를 지켜 대답했지만, 도무지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는 나라를 바꿨을 뿐인데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일까. 한국에서의 성격이나 가치관과는 상관없이 지금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여전히 경계 없이 불쑥 침범해오는 한국인의 공동체 문화가 싫다. 하지만 동시에 좋든 싫든 나는 한국 같은 상황이 익숙하고 한국어가 제1 언어인 한국인이다. 어디에 가든 내가 가장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는 수단은 한국어일 거다. 혼자서 다 해내겠다고 고집은 좀 부리겠지만, 어렵거나 피로해지면 어김없이 싫어도 한국인을 찾게 될 거다. 일상에서 문제가 생길 때면 당황해서 한국말도 안 나오고 영어를 할 정신은 더 없다. 그동안 조국의 서로 돕는 인정머리가 개인을 괴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도움은 필요 없으니 참견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 이곳에 살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내가 유능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누구나 당연히 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일들이 사실은 일부만 하는 똑똑하고 대단한 거였다. 한국에서는 내가 운 좋게도 그 일부에 속해있었다.
’화장실이 어디 있어요?’라고 물어야만 그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딘가에서는 쉽게 할 수 있었던 일이 다른 데 가서는 어려워지기도 한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있는 거고, 언젠가는 그게 곧 내 얘기가 된다. 우리는 분명 한국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월세도 비싼 나라에서 당장 내일 먹을 쌀을 사야 한다면, 꿀조언을 얻어 적은 돈으로 실패 없이 장을 봐야 한다면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떠나 더욱 한국에 결속된다. 먹고사니즘 앞에서 탈한국을 결정하던 초심을 잠시 접어둔다.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더 힘차고 적극적으로 한국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