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는 포털에서 봤다며 얼마 전 내가 쓴 일간지 칼럼의 링크를 보내왔다. 언제나 글 잘 보고 있다고, 하루라도 빨리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왜냐하면, “10월 말에는 아기를 낳을테니까.” 친구의 급작스러운 임신 소식 만큼이나 놀란 것은 친구가 보내온 나의 칼럼 제목이 바로 ‘낳지 않는 것이 나의 도덕이다’였기 때문이다. ‘출산력’이라는 단어를 쓰며 다음 세대를 낳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묻는 데만 혈안이 된 ‘전국 출산력 및 가족 보건 복지 실태 조사’를 비판하고, 이런 상황에서라면 출생률이 0을 향해 가는 것이 당연하며 나 또한 미래의 인구 숫자 1을 더하는 데 보탬이 될 생각이 없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확인은 하지 않았지만 또 포털에는 메갈이니 꼴페미니 너는 어차피 결혼도 못하니 하는 악플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을 터였다. 이런 세상에서 나 하나정도는 끝내 출산을 안 하는 것이, 나의 도덕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결심을 조목조목 적어내려가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명을 세상에 데려오기로 결정하고, 아기들은 태어나며, 나의 조카들이 그러하듯이 온 세상을 새로 배우며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한 시절 비슷한 언어로 비슷하게 세상에 대해 말하던 친구가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이라는 법적인 관계를 맺어 가족이 되고, 그 안에서 아이를 길러내 나와 사랑하는 이의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는 내게 없는 욕망을 가지고 자기가 선택한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비혼에는 비출산,
비출산에는 비혼?
나는 비혼 여성이고, 출산의 의지도 없다. 출산이야말로 결혼과 관련해서는 존재했던 ‘만약에’라는 가정 조차 없었던 사람이다. 결혼이 됐든 동거가 됐든 파트너 관계를 맺게 되든 그 어떤 상상의 여지에도 출산과 양육은 존재했던 적이 없다. 이 사회가 보편으로 그려놓은 단란한 4인 가족 그림에서 ‘엄마’의 자리에 내 얼굴을 끼워넣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혼에는 비출산이, 비출산에는 비혼이 따라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최근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가 딩크족과 같은 표현들로 드러나고 있지만, 결혼 없이 아이를 낳는 삶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은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길러 미혼부가 된 연예인은 한국 사회에서 워낙 드문 일이기에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나와 칭찬과 격려, 박수를 받지만, 홀로 아이를 기르고 있는 미혼모 여성의 얼굴을 다큐멘터리가 아닌 TV 프로그램으로 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의 상황을 생각해보았을 때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 예상과 달리 갖게 된 아이를 책임지는 방식으로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결혼과 상관없는 엄마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임신과 출산, 양육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내가 낳은 아이와 나로 구성된 가족의 형태를 원하는, 영화 <매기스 플랜>의 매기처럼 말이다. 생물학적 남성의 결핍으로 불완전을 암시하는 미혼모가 아닌 비혼모. 문득 이 모든 여성들의 욕망에 대해서, 또 선택에 대해서 더 많이 듣고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혼이라는 길을 걸을 것을 명확히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더 선명해지는 생각들이다.
너는 왜, 나는 왜
과연 이제 만삭이 된 친구는 일간지 지면에 떡하니 출산을 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고 있는 나의 글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을까. 결혼은 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뒤, 부모 세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또 다른 친구는 어떨까. 결혼을 앞둔 친구는,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결혼을 하고 싶은데 그때는 이미 출산이 어려운 상황이지 않을지 염려하는 친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삶은 명쾌하지 않고, 언제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각자의 복잡하고 어려운 자리에서 자신의 욕망을 보고 하나씩 삶의 길을 선택해나가는 더 많은 친구들과 좀 더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왜, 그리고 너는 왜. 어쩌면 이건 우리가 나뉘어 걷고 있는 멀고 다른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고 있는 복잡한 세상의 지도를 그리는 일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