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영 과장 임신했대.
김동호 차장은 박은영 과장의 임신 소식을 속삭이며 아직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라고 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인 것 같다며 잠깐 안타까운 표정도 지어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박 과장이 내게 임신 소식을 밝히는 순간을 여러 번 상상했다. 속없이 축하인사를 건네고 싶지는 않아서 무슨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곤 했지만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수정체의 출현을 축하하기보다는 박 과장의 안위를 묻고 싶었지만, 대뜸 “이런. 과장님은 괜찮으세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박 과장은 부서 상사에게 임신 소식을 전했고 당연한 듯 주위로부터 축하인사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여러 날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 축하드려요!...” 나는 왜 축하해버렸을까.
박 과장은 원하던 둘째가 아니라고 내게 따로 말했다. 자신의 자궁에서 자랐지만 결국 출산 후에는 남이라며, 아이를 키우는 과정 자체가 지금도 너무 힘든데 한 명이 더 생긴다니 부쩍 우울하다고 했다. 태교를 생각하면 기뻐하고 축복해야 하는 임신이지만,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현재 첫째를 돌봐주시는 시어머니도 임신 소식을 반가워하지 않았고, 오로지 좋아한 사람은 남편 뿐이었단다. 약 3년 전 첫째를 임신했을 때는 3개월의 출산휴가와 1년 간의 육아휴직을 다녀왔지만, 이번에는 3개월의 출산휴가만 다녀올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평소에도 10년 훌쩍 넘게 남은 정년과 별개로 실질적 정년은 5년 남았다며 씁쓸하게 이야기하던 박 과장이었다. 출산휴가 이후에는 시어머니를 도와 아이를 돌봐주실 분을 따로 구할 생각이라고.
이후 박 과장이 자리에 없던 어느 회식 자리에서 임신 소식이 잠깐 등장했다. 노산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지나가더니, 박 과장과 친한 어느 과장은 웃으면서 상사에게 “그 날인 것 같습니다! 술 많이 마셨던 지난 번 회식이요! 그 날에 사고친 것 같습니다! 으하하!”라고 말했다. 박 과장의 원하지 않던 임신은 그런 ‘사고’로 회식의 안주가 되었다.
‘선택권’은 있나요?
박 과장이 출산 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적은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그렇게 우울해 하면서도 왜 출산을 하는지 궁금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도 경제적으로는 무리가 없을 형편이라서? 남편이 출산을 원해서? 모성애가 있어서? 국가적 저출산 현상이 걱정되어서? 혹은 출산을 하는 이유보다 임신 중절 수술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는 걸까. ‘생명을 지우는 수술’은 죄책감이 들어서? 수술대가 무서워서? 수술 후 부작용이 걱정되어서? 불법이라서?
박 과장의 임신 소식을 듣기 얼마 전, 한 친구는 애인과의 성관계 중 콘돔이 자궁 내에서 빠지는 바람에 임신이 되었고 바로 임신 중절 수술을 했다. 그 친구는 출산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박 과장은 수술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닐까. 친구는 여성주의를 공부하면서 임신 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왔는데, 박 과장은 어떨까. 우리의 어머니 세대에는 흔한 일이었다는데, 마흔 언저리의 박 과장은 주변의 임신 중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얼마나 있을까. 경제적으로 당장 어렵지 않은 기혼 가정에서의 임신 중절 수술 경험률이 미혼보다 높다던데 박 과장은 왜 수술을 하지 않았을까.
주변 지인들에게 박 과장의 사례를 들려주자 내 궁금증에 대한 여러 대답이 들려왔다.
A : 불법인 것이 문제다. 불법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박 과장은 출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B : 남편이 좋아했다니, 남편의 영향이 컸을 테다. 남편은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는 ‘보호자’인데 반대하니까.
C : 수술을 하기에도 막막하지 않았을까. 병원을 수소문하는 것부터 쉽지 않은 과정이다.
D : 산모의 삶이 어려워져도 임신과 출산 자체는 사실 성스럽다. 박 과장도 그런 윤리관을 가졌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낙태’가 불법인 사회에서 임신 소식을 좋아하는 남편을 앞에 두고 새로운 생명의 성스러움을 한 평생 학습 받은 박 과장이 임신 중절 수술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내가 궁금해했구나.
출산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이 생겨나는 것만큼이나 박 과장의 삶 또한 전적으로 영향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변모하는 일이라는 것을 박 과장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결국 출산이란, 특히 여성에게, 자신의 삶을 담보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 과장은 임신 중절 수술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택하지 못 했다. 애초에 박 과장은 선택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권과 생명권, 그리고 재생산권
1960-70년대 서구에서는 ‘낙태’를 합법화하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태아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논쟁과 더불어 여성의 선택권이 우선인지(pro-choice)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인지(pro-life)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선택권을 재조명하며, 선택권과 생명권의 우선성을 논하기보다는 여성들에게 ‘선택’이라는 용어가 주어지는 모순을 지적한다. 사회적 제반이 부재한 상황에서 양육의 책임은 고스란히 개인에게 넘어가고, 임신과 출산과 낙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있는 현실에서 여성의 선택이 유의미한 의미를 가질 수는 없다. 선택의 의미가 유효하려면, 사회의 제도와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서 ‘낙태’라는 단어는 ‘임신 중절’ 또는 ‘임신 중단’으로 대체되고, 논의의 초점은 ‘선택권’이 아니라 ‘재생산권’으로 바뀌어 갔다. 재생산은 기존의 생명권과 선택권의 대립 논쟁에서 벗어나 임신, 출산, 건강, 성적 자유, 성역할, 사회 제도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례로 페체스키는 여성의 재생산권을 이야기할 때 개인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개인적 권리는 몸에 대한 학대나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재생산과 성에서 능동적인 행위자 혹은 의사 결정자가 되어야 하는 권리를 말한다면, 사회적 권리란 국가, 기관, 가정, 병원, 작업장, 종교단체, 지역사회 등의 모든 수준의 사회 제도와 조직에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 대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과 동시에 사회 조직에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구조적인 조건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이를 지원하는 법, 제도 및 국가정책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1
또한 WHO는 ‘재생산건강권’을 포괄적으로 정의할 때 1)성적 건강 2)재생산 및 성과 관련한 모든 사안에 있어서 완전한 육체적・정신적・사회적 복지 3)안전하고, 효율적이며 저렴하고, 수용하기 쉬운, 선택이 가능한 가족계획 방법 4)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이라는 항목을 포함한다. 이는 여성의 재생산권이 재생산의 자유뿐 아니라 성적 자유의 확보를 포함하며, 심리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복지 차원에서도 접근해야 함을 의미한다. 2
이러한 재생산권은 ‘생명권 vs 선택권’의 논의에서 빠져있던 주어에 대응한다. 단일한 차원의 대립쌍에서 벗어나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논의의 새로운 축으로 포함하면서 가려졌던 구도를 마주할 수 있다. ‘절대적이고 순수한 생명체인 정상 태아의 생명권’과 ‘사익을 따르는 여성의 선택권’의 대립에는 여성의 삶이 없다. 생명권은 태어나고 죽는 과정뿐 아니라,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즉, 논의를 단순화하자면 ‘태아의 생명 vs 여성의 선택’이 아니라, ‘태아의 생명 vs 여성의 생명’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대립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새로운 삶이 태어나는 ‘생명권’과 산모의 삶을 짊어지는 ‘생명권’을 투명하게 마주하는 것이 편견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임신과 출산의 자유를 외치는 것, 재생산권을 주장하는 것, 나아가 여러 논의로 확장하는 것은 특정한 생명을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비로소 생명을 존중하려는 솔직한 노력이다. 그리고 Kathryn Kolbert는 이러한 솔직한 노력으로서 모든 여성과 가족들의 재생산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점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3
자발적 결정을 보장하는 자유와 법적 권리
재생산의 전 과정에 대해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쉽게 접할 수 있는 양질의 안전한 건강검진과 서비스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에 관한 교육과 현실적 미래 설계를 도울 교육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고 다양한 가족과 생활방식을 선택할 자유
양육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감소시키기 위한 경제적 지원과 복지정책
의사결정을 억압하는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재생산을 위협하는 유해환경으로부터의 자유
평등하고 공정한 가족법과 가족 정책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정치 참여 등.
각주
1.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5). 페미니즘의 개념들. pp.315-316. 동녘.
2. (사)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5). 페미니즘의 개념들. pp.315. 동녘.
3. [재인용] 최원영 (2002), 낙태 경험을 통해 본 '미혼' 여성의 섹슈얼리티(Sexuality) 인식 변화에 관한 연구, pp.5. 석사학위논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