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하기 좋은 날 8. 우리의 유산

생각하다결혼과 비혼

비혼하기 좋은 날 8. 우리의 유산

윤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래프라우더’ 공간 후원을 할 거야.

스탠드업 코미디 쇼 ‘래프라우더’를 함께 만든 친구들과 출연한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를 들은 또 다른 친구가 후기를 이렇게 전해왔다. 마지막 부분에 무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 해나 개즈비와 을지로의 바에서 60여명의 관객 앞에 섰던 우리 공연을 비교했던 게 마음에 남았던 걸까? 그렇게까지 초라한 규모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후원은 고마운 일이니까. 기쁜 마음으로 고맙다고 답하면서, 언젠가 이런 말을 듣고 또 해준 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들에게서만, 꽤나 자주 말이다.

그러고보니 몇달 전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가 잘 되면, 네가 여성을 위해 공간을 만드는 일에 투자하려고.

맥락없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다. 친구는 하고 싶었던 일을 본격적인 사업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부동산 문제에 부딪힌 상황이었고, 누군가 저기 턱 하니 투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그게 나라면 왜 안되는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왜 안돼?’는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에 소리높여 외친 뒤로, 계속 삶의 모토가 되어주고 있다. 내가 투자하면 왜 안돼? 당연히 된다. 아직 내 삶에 조차 투자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만약’을 붙이지 않았는가. 어쩌면 내뱉은 말을 미래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오늘 조금 더 열심히 살 수도 있겠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물론 그저 허황된 말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로또에 당첨된다면, 요트를 사서 세계여행을 떠날거야. 뭐 그런 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말로만 유산을 주고, 투자를 하고, 선물하는 건 누가 못해. 하지만 나는 ‘돈이 있다면, 공간이 있다면, 시간이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이어갈 수 있는 상상은 한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겨우 그런 말 조차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다른 여성들을 도울 거야’라는 말은 그가 어떤 미래를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앞으로 어떻게 쓰며, 누구에게 필요한 데 쓰며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얼마 전 많은 비혼 이모와 고모들이 종신보험의 수혜자를 조카로 바꾸고 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누구한테 유산을 물려줄 것인가? 나 역시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할 때 이 가짜같은 질문을 실제로 받은 적이 있었다. 비정규직으로 6개월간 일했던 공장에서 지급하는 연금과 관련한 서류를 작성하는데, 연금 수령인을 적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태어난지 100일 정도 지난 조카를 수령인으로 적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하지 못하고 함께 서류를 작성하던 사람들을 따라서 법적 보호자의 이름을 적어 냈던 일이, 이후로도 가끔 떠올랐다. 다행히 그 연금은 내가 받아 내가 썼지만, 아주 만약이라도 내 삶에 예기치 않은 정지 버튼이 눌린다면, 적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누구에게 나눌지를 미리 정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운전면허를 갱신하면서 장기 기증 서약을 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비혼 여성으로 여전히 윗세대인 부모와 가장 가까운 혈연으로 묶여있는 내게, 가장 전통적인 상식 안에서 떠올릴 수 있는 수혜자는 당연히 가족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 중 일부를 진심으로 친구들에게, 정확하게는 친구들이 다른 여성들을 위해 하고 있는 일에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물론 반드시 내가 떠난 뒤일 필요는 없다. 내 친구들이 내게, 또 다른 여자들이 또 다른 여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은 없지만 나중이라도 내가 무엇인가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중의 일부로라도 여성이 여성을 위해서 해나가고 있는 일들에 보탬이 되고싶다. 언젠가의 결혼, 언젠가의 남편과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는 ‘if’를 떠나보낸 뒤, 지금 나에게 남은 ‘if’는 이것이다. 이 마음의 다짐은 어쩐지 유서처럼도 보이지만, 그렇대도 상관은 없다. 나의 유산이 우리의 유산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살아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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