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이사했다. 해외에 다녀온 뒤 잠시 부모님 댁에 머물다가 여름은 작가를 위한 창작실에서 보냈고, 이제야 내방을 찾아 나선 것이다. 친구가 지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지인이 계약보다 빨리 나가게 되면서 비게 된 방에 살게 됐다. 이전 이사들이 그러했듯이 책상과 행거 같은 필수 가구는 이어받았고, 다른 가구들은 거의 늘리지 않았다. 짐도 마찬가지로 이사 용달을 부르지 않고 몇 개의 옷가지와 생활용품들을 직접 옮겼다. 내가 갖게 된 또 한 번의 임시의 방은 이전의 방들이 그러했듯이 가구나 물건이 많이 없고, 단출하다. 언젠가의 다짐처럼 캐리어 하나에 꾸려지는 삶을 살 만큼의 미니멀리스트는 되지 못했지만, 언제나 겨우 이만큼만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꽤 마음에 든다.
몇 번의 이사와 몇 번의 명절을 거치며 이제 더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결혼에 관해 묻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얼마 전에 역시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아파트로 이사해 살아가고 있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친척 어른들이 뭔가 묻고싶어하는 눈치인데, 묻지는 못하더라고. 쟤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돈이 어디 있어서 아파트로 이사를 갔지? 정확하게 회사와 직업도 모르겠으니까 돈을 어떻게 벌고 있는 거지? 이런 게 너무 궁금하지만, 나를 딱 보면 물어보지는 못하는 거야.
사람은, 특히 여성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권위를 스스로 가질 수 있을 때 어른이 되는 것 같다. 더는 무례한 질문을 받지 않고,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해 쓸데없는 오지랖을 듣게 되지 않는 때 말이다. 물론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이 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의 무례가 쏟아지게 되어있지만, 지인들에게서 듣는 것만 적어져도 일상이 조금은 쾌적해진다.
같은 친구가 이전에 더 깨끗하고 나은 집에 제대로 된 가구를 들여놓고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결혼하면 혼수로 가구를 살 테니까, 다음에 이사하는 집은 신혼집일 테니까,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게 더는 싫더라고. 지금이 임시인 것 같잖아. 지금 가장 좋고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보려고 해.
친구는 비혼을 결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현재의 상태를 미완이라고 여기지 않기, 언젠가를 위해 오늘을 유예하지 않기.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친구들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그래서 오히려 계속 임시의 거처를 오가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비혼의 상태로 살아갈 것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내가 계속 오늘의 집들을 임시의 상태로 두는 것은, 내가 그런 상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언제 어디로든 나를 옮길 수 있는 삶. 이건 분명 임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 결혼하여 결혼 상대자와 꾸릴 ‘홈 스윗 홈’을 상상하며 유예되고 있는 상태도 아니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비혼은 삶의 방식
나는 비혼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삶의 상태 모두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유예의 지점에 자신을 놓는 것과 삶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를 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의 경우를 세상이 정의하는 미혼의 상태라고 한다면, 미혼에게는 결혼이 언제나 남아있는 마지막 퍼즐이다. 생애 주기에서 빠져서는 안될 관문이므로, 조금 늦춰지는 것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비혼의 상태는 결혼 자체가 삶과 상관이 없다. 미래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결혼 때문에 현재의 삶이 영향받지 않는 것이 비혼이라는 상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의 20~30대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상태를 이르는 ‘삼포’혹은 ‘칠포’라는 표현은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을 일컫기 적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결혼하고 싶지만, 결혼이 삶의 중요한 목표 중에 하나지만 어쩔 수 없는 사회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결혼을 포기했다면, 그들에게는 결혼이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결혼하지 ‘못함’으로 인해 상실된 자리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른이 될 수 없다.
비혼은 그렇지 않다. 비혼이라는 상태는 결혼하지 않음을 선택했기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삶과 상관도 의미도 없어진 것이다. 나는 결혼과 상관없어진 내 삶이 마음에 든다. 이 삶의 방식에서 나라는 개인의 선택이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오늘의 삶을 유예하는 대신, 내 삶은 내가 선택한 방식대로.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타인의 오지랖과 참견에 흔들리지 않는 그런 어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