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하는 여자 4. 아예 창업을 해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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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하는 여자 4. 아예 창업을 해버릴까

효규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해버릴까!

나는 임신했을 때부터 아이에 관련된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이 늘 불만족스러웠다. 돈은 밑도 끝도 없이 마구마구 들어가는데, 육아용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야였다. 늘 사던 것이야 어떻게 사야 잘 사는 건지 알지만 육아용품이라는 것은 구매 노하우가 쌓일 수가 없는 분야였다. 아이를 낳기 전엔 이들 품목을 고를 일이 거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는 계속 태어나고 자라는데, 사야하는 아이템은 매번 바뀐다. 부모세대의 경험이 구매 선택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영역이란 뜻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육아용품 구매에 도움을 줄 만한 정보가 명확하게 정리 되어 있는 곳이 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최신 정보를 찾기 위해서는 매번 여러 맘카페를 헤매야 한다. 이게 짜증이 났다. 출산 이후의 복귀 커리어를 고민하는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시간을 들여서 육아 용품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100개에 가까운 출산용품 중, 딱 하나만 빼고 모두 다 내가 골랐다. (카시트 하나만 남편이 골랐는데, 내가 본 콘텐츠 중에는 카시트도 대부분 엄마가 이용하니 엄마가 사야 한다고 다그치는 글도 있었다. 아, 그럼 진짜 아빠들은 도대체 뭘 하는 걸까?) 그렇게 육아용품을 골라가면서, 육아용품 관련 서비스에 이런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다, 또는 이 서비스의 이 부분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종종 남편에게 말하곤 했다. 그런 대화는 우리 부부가 서로 나누는 가장 흔한 대화 중 하나였다. 친구들도 대부분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기 때문에, 친구들을 집에 초대할 때도 육아 이야기보다는 IT산업이나 스타트업, 어플이나 서비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나누곤 했다. 

육아를 하던 와중에도 나의 커리어 고민과 가까운 이야기들을 늘 집에서 주고받았던 셈이다. 남편과 나는 같은 회사에서 만난 사이였고, 종사하는 업계도 같아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남편도 나의 커리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운 좋게도’ 주부인 아내를 남편도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이템 제안을 꾸준히 듣고 있던 남편은 어느 날, “그렇게 그 문제가 중요하고 해결책이 어떤 건지 알겠다면 한 번 창업을 해보라”고 했다.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다. 창업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가상창업을 해본 경험도 있었고, 나름 스타트업에서 일해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내가 대표가 되어 이끄는 회사가 성장한다면, 차라리 그게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커리어도 함께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임신 기간에 살펴보았던 프로그램들도 있었다.

OO 엄마 말고, 나

임신 기간에 알게 된 ‘구글캠퍼스 포 맘스’는 보육도우미가 함께하는 창업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여기에 2기로 참여해, 나중에 창업을 정말 할지 말지는 일단 제쳐 두고,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출산 후의 무기력함에서 탈출하고 용기를 되찾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9주 동안, 나는 창업교육을 듣기 위해 6개월이 된 아이를 업고 강남 삼성역으로 향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당장 강의를 듣는 장소가 강남 한복판에 있다는 점부터 나를 들뜨게 했다. 교육이 있는 날마다 집 밖으로 나와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삼성역 일대를 지나는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예비 창업가, 창업가, VC 관계자들이 그득한 ‘스타트업 무리’에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큰 에너지를 주었다.

하지만 가장 큰 용기를 받은 부분은 따로 있었다. 이 곳에서는 나를 ‘엄마’로 재단하지 않았다. 구글 캠퍼스 직원들부터 교육을 진행하는 관계자 분들까지, 모두들 나를 ‘ㅇㅇ 어머님’ 이나 ‘ㅇㅇ 엄마!’가 아니라, 꼬박꼬박 내 이름을 붙여 ‘대표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데려온 아이가 보육도우미들이 있는 자신들만의 장소에 따로 가 있는 것에 무심결에 놀라거나 어색해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모여있다는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그 공간에서 나는 ‘나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OO엄마'만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

고백하건대, 그 전까지의 나는 엄마들끼리 네트워킹 하는 것을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아이들 교육 얘기만 하면서, 시댁 욕을 하면서, 남편 욕을 하면서 쌓이는 인맥이 과연 유의미할까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가정주부인 여성들과 ‘발전적인’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을 거라 지레 선을 그어버렸다. 이것도 어쩌면 내 안의 여성혐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산후조리원에서도 조리원 동기를 만드는 대신 말 한 마디도 섞지 않은 채 집에 돌아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난 저들과는 달라’ 라고 생각했다.

‘경력단절 여성’과 ‘가정주부’ 그리고 ‘워킹맘’은 실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구글캠퍼스 포 맘스에 와서야 깨달았다. 경단녀는 실은 가정주부이며 워킹맘이기도 했다. 누구나 가정주부이자 워킹맘이고, 워킹맘이자 가정주부였다. 한 가지 범주에만 속하는 이는 그곳에 한 명도 없었다.

그걸 깨닫고 나서야 나는 산후조리원에서 조리원 동기를 만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나는 그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고 인연을 맺었어야 했다. 모두 나의 고민과 나의 사업에 도움이 될 이야기를 해 주었을텐데. 그들과 마주하는 것을 마다했던 것을 지금도 후회한다.

아이와 함께 누워서 수업듣기

창업 교육 과정을 통해 내가 가진 사업 아이템이 과연 시장성이 있는지, 내가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아이템인지, 비즈니스 모델은 또 어떨지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가 졸려 하면 업고 돌아다니며 수업을 들었다. 아예 아이와 누워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곳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구나. 아이 때문에 내가 뭘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렇게 보육도우미를 불러서라도 교육에 참석하면 되는구나. 내가 앞으로 일을 할 때도 이러면 되겠구나. 보육도우미와 함께한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위가 이만큼이나 늘어나겠구나.’ 나의 시야가 조금씩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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