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한 워킹맘이다. 그냥 사업도 아니고 스타트업을 운영한다.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영위하기 위해 남편과 많은 조율을 하고, 스스로 만족할만한 균형을 이룬 가정 시스템을 장착했다(고 생각한다). 돈을 엄청 많이 번 것도 아니고,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낸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이 사람의 삶이 행복보단, 불행에 더 가까울 것이라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나의 삶에 만족한다. 지금 나는 행복에 가까워졌다고 확신한다. 진짜로 행복한데 굳이 불행한 척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행복하다.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나의 행복에 대한 증거 혹은 근거를 찾아가게 될 여정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눈 딱 감고 애 3년만 키워봐’ 같은 이야기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 지난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결혼도 하고, 애도 있는데, 사업까지 하는 내가 겪었던 고통을 페미니즘이 어떻게 감싸 안아주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음에도 세상이 외면해온, 당신 주변에도 있을, 수많은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 돼
나는 스물 다섯에 혼전 임신으로 급하게 결혼을 했다. 나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믿었던’ 직장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연히 축하를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다들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당황했다. 그 중 가장 선배였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
“넌 이제 인생 끝났어.”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 돼.”
나는 그가 한 이 말을 내 삶에서 처음 자각한 직장 내 성차별로 규정한다.
그 전까지 나는 회사에서 ‘여자답지 않아서 참 좋은’ 직원이었다. 새벽 4시까지 회식에 함께하고도 그 다음 날에 지각하지 않고 출근했다. ‘여자들끼리’ 모여서 떠드는 건 뒷담화 말곤 없다는 직장 상사의 눈치에, 여자 직원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조용히 묵묵히 여자 직원들과 거리를 두며 회사를 다녔다. ‘여자답지 않으려고’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 그게 회사가 판단하는 좋은 직원의 기준이었다. 그렇게 회사의 기준에 맞추어 열심히 일해온 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회사의 반응은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 돼” 였다. 나의 꼬리표는 ‘여자답지 않아서 좋은 사원’에서 순식간에 ‘임신한 여자’가 되어버렸고, “이래서 여자는 뽑으면 안돼”라는 말의 본보기처럼 취급받았다.
반대로, 남편은 동료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축하만 받았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이 세계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임신 소식을 알리며 세상 떠나가라 울었다. 친정 식구들에게 알리면서 울고, 친정 식구들도 울고, 친구들도 울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은 나처럼 울지 않았다. 남편 식구들은 ‘잘못 걸렸다’ 라고 했단다. 친구들은 ‘그러길래 조심하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잘못 걸렸다’는 소릴 듣고도 남편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남편은 나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함께 키우고 있다. 나는 늘 이 상황을 ‘운이 좋다’고 표현한다. 나는 가끔 세상 거의 모든 여자들이 잠재적인 미혼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는 여자 몸 안에서 자란다. 여자와 남자 몸 절반씩 나눠서 자란 뒤 합쳐지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이는 레고가 아니다. 여자 몸 안에서만 자란다. 그리고 내가 받는 온갖 수모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모두 내가 품어내야 했다.
네가 사고쳐서 임신한 주제에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버티라고’ 했다. 무엇을? ‘모욕’ 말이다. 예컨대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곤 했다.
“이래서 여자는 … 아, 당신 얘기하는 거 아닌거 알지?”
“그래서 남편 연봉이 얼만데? 그거 가지고 애 못 키워. 맞벌이 하면 애 이상해 지던데 어쩌냐?”
“니네 엄마는 뭐래셔? 어휴 니네 엄마도 알 만 하다.”
“임신했단 걸 사람들한테 왜 얘기해. 그냥 결혼만 한다고 하지. 쪽팔리지도 않냐?”
사람들은 나의 임신이 어떤 약점, 혹은 오물인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네 인생 네가 스스로 꼬아버린 거지. 내가 이런 말도 못하냐’는 태도로 구는 이도 있었다. 당장 친정 식구들부터 이런 폭력을 휘두르길 서슴지 않았다.
“그냥 할 수 도 있는 말인데 뭘 그리 예민하게 구냐”며, “네가 사고쳐서 임신한 주제에 이런 얘기 안 들을 줄 알았냐” 며 대수롭지 않게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로 꽂혔다. 이런 말들은 회사에서 더욱 자주 들어야 했다. 나는 입사한지 정말 얼마 안된 신입사원이었고, 사내 문화도 원래 수직적이고 강압적이었던 곳이라 입사 직후부터 나의 자존감은 뭉텅뭉텅 깎여가던 상태였다. 여기에 느닷없이 ‘임신한 여자’ 라는 정체성이 덧씌워지니 버티기가 정말 힘들었다.
실제로 아이를 키우며 커리어를 이어가시는 분은 ‘그래도 버티라’고 진심으로 조언해주셨다. “일을 못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버티는게 중요하다”라고. 그때마다 동의하기 어려웠다. 버티는게 어디 쉬운 일인가. 대신 이런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채워가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힘든데 지켜야 할 커리어라는게 과연 존재할까?”
“버텨야지만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잃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퇴사, 그리고 고소 포기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임신 5개월 무렵이었다. 몇 개월만 더 버티면 월급도 계속 받고, 출산휴가 후 육아휴직을 쓸 수도 있었는데 나는 버티기를 포기했다. 그 회사를 쉽게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입사하기 전 인턴으로 일한 경력을 세어보니 다섯 곳은 되었다. 그 후에 간신히 들어갔던 첫 직장이었지만 나는 그만두었다. 아니,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힘들면 고소를 하지 그랬어?
누군가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다. 모욕적인 언사들, 성차별적 발언들에 대해 고소를 하고 사과를 받고 보상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고소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부터 알아보았다. 아뿔싸. 퇴사 후 찾아간 노동청에서는 ‘이미 퇴사를 했기 때문에 인권위에서만 도와줄 수 있다’면서 재직 중일 때 고소했었어야지 왜 이제 와서 고소를 하냐고 했다. 재직 중일 때는 노동청이 도와주고, 인권위도 함께 움직여줄 수 있다. 하지만 퇴사한 뒤 찾아간 노동청은 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일단 다 제껴 두고, 재직 중에 회사에 성차별이나 모욕을 이유로 고소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내 삶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잠시 상상해보았다.
- 우선 그들의 얼굴을 보는 자체가 매우 힘들고 괴로우며
- 나의 상황을 녹음하거나
- 서면으로 남기는 증거제출 작업이 괴로운데
나를 위해 증언해 줄 동료가 과연 있을까?
이 세 가지는 노동청이 고소를 생각한다면 필요하다고 내게 알려준 것들이다. 물론, 재직중이었다면. 여기에 더해서 남편마저 고소 준비를 반대했다. 남편은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니 고소를 준비하다 유산이든 자살이든 할 것 같다며 극구 나를 말렸다. 남편은 호르몬과 스트레스로 인해 미친 사람처럼 울고 불고 하는 나를 바라 보는 자신이 더 힘들다고 호소했다. 갑작스러운 임신과 결혼은 남편에게도 불안하고 힘든 일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내가 남편에게 가진 서운한 부분 중 하나가 이 부분이다. 내가 임신으로 인해 겪게 된 힘든 과정들을 결국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너무 힘들면 퇴사해도 괜찮다. 내가 돈 벌어서 대학원도 보내주고, 다시 일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해주었다. 이 대혼란 속에서, 힘들면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준 남편만 믿고 나는 조용히 퇴사를 했다. 남편과 내가 삶 속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회사를 상대로 하려던 고소는 그렇게 유야무야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당장 나의 삶부터 견뎌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