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산후우울
아이를 낳았다. 틈틈히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 출산 후 조리원에 있는 동안에는 특히 더 읽었다. 아이를 낳으면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텍스트를 많이 보면 좋지 않다. 진짜 출산 후에는 별게 다 나빠진다. 그래도 조금씩 꾸준히 읽어갔다.
조리원 2주, 산후도우미 4주, 그리고 친정으로 내려가 100일 정도까지 혼자서 아이를 봤다. 남편은 서울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주말에만 친정으로 오고 가면서 나와 아이를 돌보았다. 친정에 더 오래 있을까 했지만, 시골에 처박힌 신세도 처량하고 친정 엄마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나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 글을 쓰며 다시 돌이켜 봐도 그 때는 너무나도 우울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아이를 보는 삶. 잠시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훑어보고 저 안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며 자괴감에 빠졌다. 팔 힘이 모자라 유모차를 들지 못하니 밖으로 나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유모차는 8kg, 아이가 6kg가 나가니 합치면 14kg다. 아기띠를 하고 돌아다니면 허리 근육이 약한 탓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앓아 눕곤 했다.
그래서일까, 산후조리원에서 다 빠졌던 붓기가 다시 차올랐다. 피곤에 찌든 나 자신을 보는 게 너무 싫었다. 거울 보는 일이 괴로웠다. 그래서 그 때의 나를 사진으로도 남겨두지 않았다. 한때는 자칭 타칭 셀카여신이였던 나는 출산 이후 셀프카메라를 키는 일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아이 사진만 찍었다.
아이를 점차 사랑하게 되었지만, 원망감도 함께 자랐다. 왜 나만 이러고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다 듣는 위로들, “다른 사람도 이렇게 산단다. 그러니 힘들어도 버티라” 같은 말이 어찌나 지겨웠던지. 스스로 뭘 버티나. 호르몬도 과다분비되어 내가 과연 내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이가 피곤할 때 울면 나도 같이 울었다. 그나마 내 또래면서 아이를 낳아 나와 비슷한 처지인 언니에게 카톡을 보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우울한지 모르겠다고.
언니의 조언은 이랬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 힘들어도 밖에서 힘든 게 나아. 공원 근처에 있지. 하루에 한 번은 나가. 어차피 힘드니까, 그냥 나가.
그 다음부터 매일 외출을 했다. 애를 데리고 공원에도 가고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카페에 가서 잠깐이라도 있다 오곤 했다.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우울한 건 아닐까 싶어 애써 요리를 하고 친구들을 집에 불러다가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 사람들을 만나니 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남편은 네가 그렇게 행복하게 웃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본다면서 적극적으로 요리를 해서 손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조금씩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속에서는 ‘그래도 엄마가 애 옆에 있어 줘야지.’, ‘안전하게 엄마가 집에 있어야지, 애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같은 또 다른 목소리가 나를 말리곤 했다.
이 달콤함은 중독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좋았는데, 그 사람들이 돌아가면 난 더욱 비참해지고 우울해졌다. 아이가 없는 삶이 무척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다. 승진을 걱정하며, 여행 계획을 세우며, 돈을 얼마를 모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그런 삶이 부러웠다. 아이를 낳은 뒤의 나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갔다.
다시 일 할 수 있을까?
정부에선 가정보육비용을 준다. 월 20만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내가 받는 월급은 그게 다였다. 자는 시간 빼고, 아니지, 아이를 키우는데 무슨 자는 시간이 있겠는가. 자는 시간도 없이 육아노동을 하는 나는 연봉 240만원짜리였다. 연봉 2,400만원이 아니라 월급 20만원, 연봉 240만원이다. 그 사실이 끊임없이 나를 지치게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이 돈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너무나 추상적인 것들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회사원으로, 연봉을 계속 올려가며 나의 가치를 올려가는 삶 말고 다른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모성애가 뭐라고, 일단 생겨버린 아이를 잘 키우는게 도대체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게 남는 게 없단 생각이 자꾸 들어 괴로웠다. 이것이 그렇게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면 돈이라도 많이 주던가, 아니면 경력으로 봐주던가. 그런 건 없으면서 세상은 그저 말만 번지르르했다. 모성애가 어떻고, 출산이 애국이라고 하면서. 가족의 평화? 아이가 좋은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 그게 나 자신의 행복보다 앞서는 가치일까?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긴 너무 어렸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 비슷한 거라도 해볼까 고민하며 고용노동부 워크넷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하고 사람인 사이트를 뒤적거렸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재택근무도 별로 없었고, 대부분 다단계 사업만 있었다. 그리고 월 200만원 가량을 주며 ‘이 정도면 주부로써 많이 버는거다’라는 뉘앙스의 소개도 정말 짜증났다. ‘많이 버는거다’라니, 한 돈 1,000만원 주는 것도 아니면서 생색은 얼마나 내던지.
육아서적에서 말하던 36개월이 되면 정말 난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때는 다시 커리어 우먼이 되어 아침 8시에 출발해 9시에 회사에 도착하고, 6시에 퇴근해도 7시에 어린이집에 갈 수 있는 스케줄을 소화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쉬고 난 나를 뽑아주는 회사가 있긴 할까? 아이는 내가 이렇게 일을 해도 정상적으로 자랄까? 그러면서 집안일은 집안일 대로 해야 할 텐데, 육아노동, 가사노동에 직장 노동까지 다 감당해야할 내가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을까? 파트타임으로 일한다고 해도, 돈을 생계에 보탬이 될 만큼 잘 벌 수는 있을까? 돈을 많이 버는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벌기만 하는 그 마음가짐에 집중하라는데 그게 맞는 걸까? 나를 속이는 건 아닐까? 의문은 끝이 없었다.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육아노동을 한꺼번에 마주하면서, 창업에 관심이 간 것은 어쩌면 나에게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