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의미: <파이널 판타지14 - 칠흑의 반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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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의미: <파이널 판타지14 - 칠흑의 반역자>

이그리트

디자인: 이민

이 글에는 <파이널 판타지14 - 칠흑의 반역자> 메인 및 서브 콘텐츠에 대한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 없이 게임을 즐기고 싶은 분이라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한국은 <파이널 판타지 14> 시리즈의 업데이트가 글로벌 서버보다 3~6개월 가량 늦은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 하기 전에 새로운 확장팩에 대한 평가와 입소문을 먼저 듣게 된다. 입소문을 듣고 기대감에 차오르는 경우가 있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창천의 이슈가르드>였고, 후자는 <홍련의 해방자>였다. 

<칠흑의 반역자>는 기대감을 넘어서는 설레임을 미리 안겨줬다. <칠흑의 반역자> 메타크리틱 스코어는 91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뚜껑을 열어본 <칠흑의 반역자>는 <홍련의 해방자>에 다소 지친 유저들까지 복귀하게 만들기 충분할 정도로 훌륭하다. 

알고보면
전형적이지 않은 이야기

<칠흑의 반역자>에서 모험가는 원래 있던 세계(아래 원초세계)의 첫번째 거울 세계(아래 제1세계)로 소환당한다. 함께 모험을 이어나가며 에오르제아를 구했던 '새벽의 혈맹'(아래 '새벽') 동료들이 하나하나 사라져서 그 진상을 조사하던 중이었다. 소환당한 세계는 100년 전, 빛의 범람이라는 대재앙이 일어나 밤이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오직 빛만이 가득한 세계, 빛에 잠식당한 사람은 '죄식자'라는 일종의 몬스터가 되고 이 죄식자에게 공격당해 죽는  사람은 또 다시 죄식자가 된다. 제1세계의 사람들은 이들을 피해, 또 이들과 맞서 싸우면서도 천천히 숨통을 죄어 오는 멸망만을 기다리고 있다. 

재앙의 직전에 제1세계로 크리스탈 타워와 힘께 워프해 온 의문의 인물 수정공은'새벽' 동료들과 모험가를 소환한다. 원래는 모험가만 소환하려고 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사람을 소환하는 일이 꽤 까다로웠기 때문이라고. 죄식자와 그들을 이끄는 대죄식자를 처치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모험가 뿐이라서 수정공은 '새벽'과 모험가에게 대죄식자 토벌의 도움을 요청한다. 게다가 제1세계가 원초세계의 조각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세계가 멸망하면 원초세계에 재해가 일어난다. 이미 제7재해까지 겪은 원초세계에 제8재해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과 모험가는 제1세계의 멸망을 막고 원초세계의 재해까지 막기 위해 수정공의 요청에 응하기로 한다.

여기까지는 꽤 일반적인 판타지 RPG 게임의 도입부같아 보인다. 이세계 소환, 멸망의 운명, 그리고 이를 구할 영웅인 플레이어. 하지만 스토리를 진행해 나갈수록 이면의 사정이 드러난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제공하는 주요 인물은 셋. 수정공, 아르버트, 그리고 아씨엔 에메트셀크다. 

수정공은 원초세계에서 제8재해가 일어난 지 수백년 후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려 제 1세계로 온 인물이다. 원초세계의 제8재해로 인해 영웅, 즉 플레이어가 죽었기 때문이다. 수정공은 영웅을 살리고자 크리스탈 타워와 함께 홀로 재해가 일어나기 전의 제1세계로 온 것이다. 영웅에게 희망을 걸었던 건 수정공 뿐만이 아니었다. 원초세계의 사람들은 영웅의 모험담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필요할 때 나타나주는 영웅의 존재에서 버틸 힘을 얻었고, 그랬기 때문에 수정공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기술을 함께 개발해냈다. 수정공은 이 기술을 실행할 수 있는 마력을 지닌 크리스탈 타워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동기는 이기적이지만 숭고하고 동시에 절절하다. 퀘스트 진행 중 그의 입으로 직접 듣게 되는 이야기. '나에게 소중한 단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편 아르버트는 이전 확장팩에서 종종 등장했던 '어둠의 전사' 중 마지막으로 남은 혼이다. 그 어둠의 전사들이 사실은 제1세계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여기서 빛의 범람을 일으킨 대역죄인이다. 너무 강해진 빛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그들은 아씨엔 엘리디부스의 제안에 응해 원초세계로 건너와 재해를 일으키며 두 세계를 통합하려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내놓았다. 혼만 남은 상태였던 것이다. 빛의 전사들은 그 혼마저 제1세계에서 일어난 빛의 범람을 막는 데에 쓴다. 단 한 명, 아르버트만 빼고. 제1세계에 빛의 무녀로 소환된 민필리아는 아르버트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며 그의 혼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아르버트가 100년만에 1세계에 건너온 모험가를 만나게 된다. 

기이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아르버트를 듣거나 볼 수 없지만 모험가는 아르버트의 혼을 감지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아르버트는 세계가 갈라지면서 나뉜 모험가의 혼 중 한 조각이었기 때문이다. 아르버트는 고독과 무기력감을 견디며 세계의 운명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고 후회하지만 소환된 모험가의 여정에 함께하며 모험가를 이해하게 되어, 스스로의 혼을 모험가에게 모두 걸며 결국 모험가가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힘이 된다. 

<파이널 판타지 14> 시리즈에서 꾸준히 악역으로 등장해왔던 아씨엔의 사정은 처음으로 <칠흑의 반역자>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자꾸만 야만신을 소환하는 걸 부추기고 제국의 사정에 개입해 전쟁을 일으키는 등 재해를 유도해 왔던 아씨엔들은 <신생 에오르제아>와 <창천의 이슈가르드>, <홍련의 반역자>에서 늘 최종 악역으로 등장해 왔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어렴풋한 떡밥만 있었을 뿐이다. <칠흑의 반역자>는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모험가의 여정에 동행시켜 그들의 시점을 제공한다. 아씨엔의 이야기는 풍부하고 곱씹을 점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 글에서 모두 다룰 순 없지만, 결론만 살짝 짚고 넘어가겠다. 아씨엔 에메트셀크로 인해 플레이어는 선과 악, 정의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함께하면 괜찮아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모험가는 언제나처럼 새로운 확장팩이 제공하는 지역들을 여행하게 되는데, <홍련의 해방자>에서는 알라미고와 도마 크게 두 지역을 여행하는 스토리가 사실상 분절된 것이나 다름없을 뿐더러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주인공과 조연의 개념이 너무 명확해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모든 이들이 히엔의 협력자가 되기 위해 등장하는 전개라니, 정말 힘이 빠진다). 하지만 <칠흑의 반역자>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스토리를 모두 비중있게 다루며,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퀘스트용 NPC인 줄 알았던 소소한 인물들에게까지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결국 모험의 후반부에 이르러 모두의 힘이 필요해질 때, 그들이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떤 것을 보태고자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특히 '새벽' NPC들과 함께 제1세계를 탐험하게 되면서 각각의 인물이 가진 선함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들은 모험가라는 영웅을 중심으로 뭉쳤지만, 동시에 각각이 영웅이다. 그들은 민필리아의 환생으로 제1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민필리아'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게 돕는다. '민필리아'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은 무척 감동적이다.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점점 생각이 성장하고 있는 알피노와 알리제를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다. 

황홀한 연출

스토리를 진행하며 플레이어는 때로는 다른 NPC의 시점에서 전투를 진행하기도 하고, 주어진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 대화를 이어나가기도 한다. 각각의 전투와 토벌전에 이유를 부여하는 세심한 연출은 다시 봐도 그때의 감동이 차오를 정도다. (제작진도 그걸 아는지 <칠흑의 반역자>에서는 '임무 다시보기' 기능이 생겼다.)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화면의 어떤 위치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든 컷씬에서 굉장히 고심하고 배치한 흔적이 잘 드러난다. 압권은 역시 아모로트 클리어 후 하데스 토벌전으로 이어지는 에메트셀크와 수정공, 모험가의 대면 장면. 

배경음악도 훌륭하다. 사실 <홍련의 해방자>에서는 이 부분이 정말 아쉬웠다. '대충 동양 세계'를 즐긴 글로벌 서버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런 배경음악이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아니었다. <칠흑의 반역자>는 <칠흑의 반역자> 메인 테마의 선율을 적절히 활용하고 변주한다. 메인퀘스트를 모두 클리어한 다음에는 주요 지역의 배경음악이 바뀐다. 맵이 아름다운 건 말할 것도 없다. 빛과 어둠을 오가는 컨셉에 충실한 맵을 감상하는 재미가 좋다.

입문 난이도는
꽤 있는 편

한편 이른바 '칠흑뽕'에 차서 주변인들에게 영업을 하기엔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훌륭한 스토리 및 연출과는 별개로 <칠흑의 반역자> 레벨링 던전 다섯 곳, 80레벨 던전 세 곳은 기존 레이드의 기믹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원래 <파이널 판타지 14>를 즐겼던 유저라면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지만, <파이널 판타지 14>를 아예 처음 접하는 유저라면 처음 갔을 때 꽤 곤란한 난이도다. 이를 돕기 위해 <칠흑의 반역자>부터는 NPC와 함께 던전을 돌 수 있는 트러스트라는 시스템이 생겼지만 MMORPG는 역시 플레이어들과 함께 즐기는 게 제일 재밌으니까 말이다.

물론 고질적으로 악명이 높은 지도 가독성과 풍맥 등도 처음 <파이널 판타지 14>를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좌절할 수 있다. 그나마 퀘스트 위치에 높낮이 표기가 생겨 조금 낫지만 차마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쉬움 

신규 종족으로 추가된 비에라와 로스가르의 해석은 정말 끔찍하고 아쉽다. 비에라는 여성 캐릭터만, 로스가르는 남성 캐릭터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구시대적이다. 두 종족의 '설정'과 '사정'상 여성/남성만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생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사실 핑계다. 그렇게 치면 엘레젠이나 미코테, 루가딘 등 기존 종족에서도 희귀한 부족으로 치는 부족이나 외형도 생성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 

비에라 공식 설정화.

비에라족의 기본 외형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숨만 나온다. 그야말로 란제리인 비에라의 기본 룩은 처음 출시되었을 때부터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었으니 <파이널 판타지 14>에 관심있는 유저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14>에서 이만큼 여성 캐릭터를 성적 대상화하는 옷은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다신 없길 바란다. 아무리 원형을 복원한다지만 시대에 맞는 복원을 해야 할 거 아닌가. 지금은 2019년이다. 라라 크로프트도 벗고 다니는 룩은 졸업한 지 오래다. 기본 옷이 란제리에 가까운 것도 기함할 일이지만, 고대의 유적을 지키는 수호자 종족으로 등장하는 비에라의 기본 신발이 킬힐인 건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면 비에라의 발만 먼저 등장하는 컷씬이 있는데, 거기서 하이힐을 보고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숲과 늪지를 뛰어다니며 사냥하는 세상의 어느 누가 킬힐을 신는단 말인가?

종족 뿐만 아니라 고질적인 번역의 문제도 몇 군데 눈에 띈다. 대사의 번역을 조금 더 성의있게 했더라면 좋았겠다 싶은 부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검수의 문제인 오타도 종종 있다. <칠흑의 반역자>라는 한국판 타이틀도 나쁘지 않지만, <Shadowbringer>라는 원제가 가지는 멋이나 의미와는 조금 다른 부분도 마음에 걸린다. 이를 어떻게든 보정하기 위해 스토리 후반 바우스리의 대사에 자꾸 '반역자'라는 단어를 넣은 점이 눈에 띄었다. 

수작

신규 종족의 디자인이 성차별적임에도 불구하고 <칠흑의 반역자>는 잘 만든 게임이다. 스토리는 깊고 연출은 아름답다. 그것만으로 RPG게임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기존에 <파이널 판타지 14>를 플레이했던 유저라면 이전 확장팩의 떡밥을 <칠흑의 반역자>가 거의 모조리 회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새로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이전의 떡밥을 몰라도, <파이널 판타지 14>의 세계관을 더욱 깊게 이해하고 몰입하기 좋다. '동료뽕'도 엄청 찬다. 게다가 진정한 영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플레이어를 영웅으로 호출하는 수많은 게임에서 한 끗 올라선 셈이다. 

<칠흑의 반역자>는 전 확장팩에서 결국 NPC의 주요 조력자일 뿐이었던 모험가를 다시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겨지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주인공으로 돌려놓는다. 이 점에서 추천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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