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취준을 시작한 게 벌써 3년 전이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얼른 회사에 들어가 볼트와 너트처럼 조임 당하고 싶어 안달이 난 보편적인 취준생에 지나지 않았어요. 언니들이 회사와 상사 욕을 해대면 ‘나도 욕할 회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어디든 얼른 제 자리가 생겼으면 했으니까요.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언니(라고 할게요)뿐만 아니라 제 주변 언니들도 다 ㅋㅋㅋㅋ를 연발하며 실소를 뱉을 수밖에 없던, 어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저는 정말 그랬어요. 불안하고 막연하고 두렵고 힘들고, 자꾸만 주변 친구들과 저를 비교하며 자괴하던 시간을 얼른 끝내고 싶었거든요.
취준생 신분을 버릴 수 있었던 건 당연히 첫 회사에 붙어서였어요. 진짜 기뻤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이 업계는 따로 공채가 없어 신입이 진입하는 게 굉장히 어렵거든요(신입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요). 엄청 가고 싶은 회사는 아니었어요. 일단 붙은 게 기쁜 거죠. 사실 모든 취준생이 다 그럴걸요? 경험도 안 해봤는데 미치게 가고 싶은 회사가 대체 얼마나 되며 특정 회사가 너무 좋아서 죽을 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왜 식사 약속 같은 거 정할 때도 그렇잖아요. 뭐 먹고 싶어? 싫어하는 메뉴는 뭐야? 좋아하는 거 있어? 한식? 중식? 이탈리안? 프렌치? 보통은 이러다가 식당을 정하잖아요. 똑같았어요. 죽어도 이 회사가 아니면 안 된다 이런 회사는 잘 없잖아요. 뭐 회사가 좋아서 다니나요? 먹고살려고 다니는 거지? 어른들도 그랬단 말이에요. 취업은 유행이 아니다, 하고 싶은 걸 찾아라, 직무가 중요하다 어쩌고 저쩌고요. 어른들 말은 대부분 싫지만 그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무슨 일을 하는지가 제일 중요했으니까요.
회사 다닐 마음 있는 거지?
문제는 회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회사에서 하는 큰 행사(라고 하지만 의미 없이 모두가 모이는 그런 거 아시죠?)가 있었거든요? 근데 제가 그쯤 감기몸살에 걸려 몸이 완전 메롱이었어요. 행사 전날 약을 먹고 잠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오전 10시였고 저는 모든 알람을 개무시하고 잔 거예요. 부재중은 몇 통이나 와 있고요. 정말 하나도 못 들어버린 거죠. 몸은 상쾌했지만, 그랬지만.. 제 얼굴은.. 대략 어떤 기분인지 짐작이 가시죠? 아주 오싹한 상황이었다고요.
그 행사는 서울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하던 행사였어요. 역시 사람을 굴려야 직성이 풀리는 회사는 오전에 행사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했고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죠. 어찌 됐건 저는 일단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지금이라도 가겠다, 죄송하다는 연락을 마구 했어요. 팀장은 그럼 그냥 오전엔 반차를 쓰는 걸로 하고 오후에 회사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날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오후에 회사로 출근을 하게 됐죠.
다음 날 팀장이 회사 근처 카페로 부르더라고요.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팀장 앞에 앉았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왔죠.
은순 씨, 회사 계속 다닐 거예요?
많이 당황했어요. 정말로 얼마 안 됐던 때거든요. 내가 너무 피곤해했나?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잘 안 웃는다고 그런 거야? 으레 하는 면담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질문의 목적이 대체 뭐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말을 덧붙였어요.
은순 씨가 어제 행사에 안 와서 회사 어른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 은순 씨가 회사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안 온 거라고 생각하시나 봐. 회사 다닐 맘 있는 거지?
이런 말을 하는 팀장을 어떻게 봐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일단 저 회사 어른들이 대체 누군지도 모르겠고, 한낱 사원이 회사를 싫어하는 것 같네 마네 하며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늦게라도 간다는 제게 오후에 회사로 오라던 본인의 말은 왜 빼먹는 건지 싶고.. 아니, 무엇보다 ‘아, 쟤 행사 안 왔어? 그럼 회사가 싫은가 보네. 그만두겠네’라는 흐름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저는 팀장에게 당시 상황을 다시 한번 말했고 그만둘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라는 너무 당연한 말을 재차 해야 했어요. 팀장은 너그러운 척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했죠.
여기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저는 회사 이사에게까지 불려갔어요. 사실 팀장이랑 얘기한 것까진 (물론 어이가 없어서 ‘ㅋ’ 같은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어요. 근데 이사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개소리인 거예요. ‘은순 씨 몸이 아프고 일어나지 못한 건 회사가 싫다고 몸이 신호를 준 거다‘ ‘은순 씨가 그날 얼마나 아팠던 왔어야 했다’ ‘택시비가 10만 원이 나와도 그랬어야 했다‘ 대략 이런 말들이었어요.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근데요, 언니들. 회사를 좋아해야만 회사에 다닐 수 있나요? 일이 좋아서 다니면 안 되나요? 좋아하든 싫어하든 일을 잘 해내면 되지 않나요? 제가 아파 죽어도 회사에 나가야 하나요? 편의를 봐준 것도 아니고 반차 쓰라고 한 거였잖아요? 팀장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이런 식으로 저를 불러다 얘기하죠? 어른들에게 이런 걸 다 묻진 못했지만 화가 많이 났어요. 제가 왜 그런 얘기를 들어야 했는지, 회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가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지금까지도 이해를 못하겠거든요.
제 태도가 싫었을 수 있어요. 저는 여자 막내답지 않게 잘 웃지 않으며 윗사람들 말에 맞장구를 잘 치지도 않았거든요. 근데 그건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쓴 계약서에는 ‘상사에게 무조건 웃어준다’ ‘상사 말에는 반드시 맞장구를 쳐준다’는 조항이 있지도 않았거든요. 처음에는 저도 제가 잘못한 게 있으니 모든 걸 참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저는 회사의 관심사병이 됐어요. 윗사람들은 저를 볼 때마다 트집을 잡았고 그럴수록 저는 더 화가 났고요. 제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나 싶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저는 제 휴가를 썼고, 그 또한 팀장이 말한 대로 한 거였으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제가 죽일년인 걸까요? 아직 졸업도 안 한 막내 사원 한 명을 ‘너 회사 싫지!’ 하며 괴롭힐 일이었을까요?
회사를 좋아한다고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실제로 저 회사에 오래 근무했던 많은 어른이 ‘이 회사는 좋은 회사다’ ‘이만한 회사가 어디 있냐’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사소하고 작은 일 하나 제때 처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분들에게 회사는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놀러 오는 곳 같았어요. 어차피 본인들은 실무를 안 하니까요.
일만 하고 싶다
친구들을 만나면 제발 회사에서 일만 하고 싶다는 말을 해요. 회사나 회사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듯, 엄청난 호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많은 회사가 사원들에게 소속감과 애사심을 강요하고 회사 사람들과 반드시 잘 지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불편해진다는 걸 다들 모르는 걸까요?
저희는 언제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일이 아닌 부분을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밑에서 일해야 하는 걸까요? 정말, 회사는 이렇게 다녀야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