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한 이후부터는 한동안 남자들이 더 많은 곳에서 지냈다. 한 반에 4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에 여자 학생은 5명 정도 되었던가. 교과서에 실린 이름난 과학자도 대부분 남자였다. 거의 유일한 네임드 과학자 마리 퀴리는 꼭 ‘퀴리 부인’이라 불렸다.
그래도 과학 선생님 중에는 여성이 꽤 많았고, 보통은 나머지 35명의 남학생이 나보다 덜 똑똑했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크게 마음에 거슬리진 않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앞으로도 별문제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만 잘 하면
문제 없을 줄 알았던
이야기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부터는 조금 달랐다. 자연과학을 학부 전공으로 택하고 여전히 자연과학대에 소속된 대학원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지금은 소위 롤모델로 삼을만한 여성을 찾기 힘들다. 교수는 죄다 남자다.
대학원 입학 면접에서 교수들은 남자 지원자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 있는데 생계를 유지하기 괜찮겠냐고 묻는다고 들었다. 나도 늘 내 생계를 책임져왔고,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생계부양자가 꼭 남성인 것은 아닌데 여성에게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는다.
언니들이 자꾸 사라진다. 결혼하고 남편이 유학을 가면 함께 출국하거나, 출산 후에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 내에서 성폭력 사건을 겪고 난 뒤에 해당 전공을 영영 떠나기도 한다. 박사 학위를 어렵게 마친 뒤에도 강사 자리만을 연연하다 “그 선생님 요새 공무원 준비하신대” 같은 소식을 전해 듣는다. 어느 교수한테는 이런 얘기도 들었다. “엄마는 진정한 학생일 수 없고, 학생은 진정한 엄마일 수 없다”
학계에서 살아남은 여성이 반가워 무슨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찾아가면 기대와 다른 경우가 많았다. “어딜 가든 자기 자리는 스스로 찾는 거야” 같은 말은 아주 강하고 힘이 나는 말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모든 걸 다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깨를 자주 무겁게 만들었다. 개개인이 너무 애쓰지 않아도, 커리어를 제외한 삶의 다른 부분을 아주 많이 희생하지 않아도 여성이 자기 자리를 스스로 찾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학, 페미니즘?
과학이 좋았던 것은 그것이 주는 경이감 때문이었다. 먼 옛날 언젠가는 지구 전체가 거대한 눈덩이처럼 얼어붙은 적이 있고, 이렇게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얼음층 사이의 미세한 기포 안에서 생존한 생명체가 있었다는 것.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원시 수프’에서 태어난 생명이 한없이 다채롭게 진화해나갔다는 것, 이들에겐 위계가 없다는 것, 우주의 어딘가는 빛이 빨려 들어가 탈출하지 못하는 사건의 지평선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공부할 때면 피부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인간이 만들어낸 통념과 직관의 뺨을 후려치는 과학 지식을 만날 때면 가슴이 뛰었다. 미생물과 암흑물질과 해저 산맥과 블랙홀 같은 것을 공부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리고 인간 사회의 질서가 자연의 질서에 비하면 얼마나 하잘것없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새롭게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나의 미래, 지금과는 다른 인간의 미래. 우리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그것 말이다.
내겐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오던, 그래서 받아들여 왔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었다. 이렇게 입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렇게 웃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도 더 커다란 꿈을 꾸어도 되는구나. 페미니즘은 기존의 것을 잘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세계를 상상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과학과 페미니즘은 서로 친하지 않다.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과학을 보면 자주 난감하다. 과학의 세계에 여성의 수가 너무 적고, 이들이 공부하고 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규칙이 즐비하기도 하지만 더 난처한 것은 과학이 만들어낸 지식 자체가 자주 성차별적이라는 것이다.
70kg 백인 남성의 몸에 맞추어진 각종 임상시험, 여성을 월경, 임신, 출산하는 존재로만 상정하는 의학, 남성 과학자의 상대자로 기술 오브제나 자연을 여성으로 상정하는 메타포, 여성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라는 뇌과학 지식 등, 줄줄이 말하자면 2박 3일도 부족하다.
한편 과학 전공자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을 볼 때도 난감함을 느낀다. 우선 페미니즘 논의에서 과학 분야는 거의 비어있다. 성폭력, 재생산, 교육, 퀴어 등 다른 이슈에 비해서 논의의 주제조차 되지 못할 때가 많다. 페미니즘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분야는 결국 남성 중심적인, 성차별적인 지식으로 채워진다. 기본값이 그거니까!
또 과학을 대하는 태도가 자주 이분법적이다. 과학 지식을 그대로 수용하거나(OO 연구 결과에 따르면 XX 하다더라), 혹은 완전히 거부하거나(진화생물학은 모두 나쁘다). 이는 사실 페미니스트의 태도라기보다는 사회가 과학을 바라보는 오래된 통념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과학 지식은 단단하고 객관적이어서 가치판단에서 배제되어 있거나, 배제되어 있어야 한다는 믿음 말이다. 또 과학자만이 과학 지식 생산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도 전제되어 있다.
과학, 페미니즘!
페미니즘에서 성을 섹스와 젠더로 나누어 구분하고, 이를 통해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과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성을 따로 생각한 것은 여러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때문에 섹스가 젠더와는 다르게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습득되는 성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성차에도 역사가 있다. 시대와 공간에 따라 변해왔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는 이러한 갈팡질팡 속에서 나름대로 언어를 찾으려는 여정을 다룬다. 페미니즘을 버릴 수도, 과학을 버릴 수도 없었던 언니들이 고군분투하여 발견한 반짝이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페미니즘에게 과학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과학에 페미니즘이 더해질 때 더 나은 지식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무엇보다 기존의 질서를 흔들고 ‘당연한 팩트’ ‘당연한 전제’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페미니즘의 힘이라면 이러한 페미니스트의 태도가 과학이 가진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과학에서도 주변화되었던 사람과 사회, 지식을 발견하고 더 평등하고 혁신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