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게임을 비롯한 미디어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한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성취를 위한 보상의 역할이 되거나, 누군가의 어머니/혹은 아내가 되거나, 주인공을 각성시키기 위해 희생하거나. 게임 속의 많은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의 동기 및 보상의 제공이라는 명목하에 게임의 시작과 끝에만 비중 있게 등장했고 정작 게임 속에 등장하여 주된 활약을 하는 것은 남성들이었다.
미디어 속 천편일률적인 여성 캐릭터들 사이에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여성 캐릭터들은 좁은 틀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다. 리부트된 <고스트 버스터즈>에서는 기존 시리즈와는 달리 여성 주인공 넷이 등장했으며, 넷플릭스에서는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글로우:여인천하> 등 여성 중심의 드라마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게임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2017년 E3에 발표된 게임들에선 게임 속 주인공들이 예전과는 달리 남성으로 고정되지 않고 여성/혹은 남성을 선택할 수 있는 비율이 52%에 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게임 쇼 내에서 자사 게임의 데모를 시연하는 공간에서도 성별을 고를 수 있는 게임일 때 게임사는 여성 캐릭터를 조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향성 또한 존재했다.
소위 말하는 사람다운 여성 캐릭터들은 게임 속에서 적지만 꾸준히 존재해 왔고, 그 수는 최근 들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게임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활동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더 롱기스트 저니> - 에이프릴(1999)
에이프릴의 시작은 여타 (남성)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범한 삶을 살던 소녀는 현실과 분리된 비현실적인 사건에 휘말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것이 에이프릴의 운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거대한 운명이었기에 에이프릴은 처음에는 그것을 낯설어하며 거부하기도 하고, 주변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몇 가지 사건을 거치고 나서는 그 운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노력한다. 이 과정동안 에이프릴은 유쾌한 모습을 잃지 않으며, 엔딩에서 자신의 결말이 뜻밖의 사건으로 큰 변화가 생길 때에도 그것을 덤덤히 받아들인다. 이것은 언뜻 실패로 보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플레이어의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다.
에이프릴의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평범한 남성 주인공의 영웅담과도 유사하게 보일 수 있지만, 여성 캐릭터의 시선으로 보기에 좀 더 섬세해진다. 게임 속에서, 이런 거대한 운명에 관한 서사가 여성에게 주어진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매스 이펙트> - 여성 셰퍼드 (2007~2012)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와 함께 바이오웨어사의 간판 타이틀인 SF 프랜차이즈 <매스 이펙트>시리즈 또한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 3부작의 주인공인 셰퍼드는 플레이어가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 플레이어의 아바타이기도 한 이 캐릭터는 강한 군인으로 선택에 따라 정의감이 넘치는 우주 경찰이 되기도 하고, 목적을 위해 사사로운 것들은 지나치고 때로는 상대방을 협박하기도 하는 터프한 영웅이 되기도 한다. 3편의 시리즈를 거치는 동안 셰퍼드는 동료들 및 다른 외계인들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의 선택은 주요 전개에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매스 이펙트 시리즈는 주인공인 셰퍼드에 주도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다양한 계기들을 제공한다. 셰퍼드의 이야기는 결국 우주를 구원하는 영웅의 서사로 발전하고 플레이어에게 인상깊은 기억을 남겨준다.
<언차티드> - 엘레나 피셔 (2007~)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모험물에서 등장하는 열정에 찬 여성 프로듀서라 하면 흔히 의욕만 넘치고 능력은 없어 가는 곳마다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에는 주인공에 의해 구출되는 히로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엘레나 피셔는 주인공인 네이선 드레이크와 동등한 능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엘레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네이선에게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여러 시리즈를 거쳐 네이선과 결혼을 한 이후에도 엘레나는 자신의 커리어를 유지하고 있다. 게임 플레이 도중 네이선이 엘레나를 의도적으로 놔두고 간 채(위험하다는 이유로) 홀로 행동하다 위기에 빠진 순간, 네이선을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멀리서 차를 몰고 나타난 엘레나의 모습에서 통쾌함을 느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툼 레이더> - 라라 크로프트 (리부트 후, 2013~)
다른 리뷰에서도 언급했듯이, 라라는 리메이크 전과 후가 크게 달라졌다. 리부트 전 라라 크로프트가 섹스 심볼이었다면 리부트 후의 라라 크로프트는 아마추어에서 한 명의 모험가로 성장한다. 게임 속에서 라라가 겪는 고뇌와 고통, 아버지와의 갈등을 극복하는 서사는 여타 남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으며 샘을 구출하는 모습은 기존의 남성 주인공이 히로인을 구원하는 모습과도 유사해 보인다. 리부트된 첫 작품에서 미숙하고 때로는 괴로워하던 라라의 모습은 최신작인 <라이즈 오브 툼 레이더> 에서 모험에 익숙해지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모습 위에 덧씌워지며 캐릭터에게 생동감을 부여한다.
<왕좌의 게임> - 베스카와 미라(2015)
HBO의 <왕좌의 게임>은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을 보여주기로 유명한데, 그 경향은 스핀오프 격인 같은 이름의 게임에서도 여전하다. 베스카는 주인공 중 하나인 애셔(남성)와 함께 활동하는 거친 싸움꾼이자 용병이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애셔가 움직이는 동안 바스카는 둘의 성적인 긴장감을 보여주는 대신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 방법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거칠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은 친한 친구이자 믿을 수 있는 동료로 그려지며 그 밑바닥에는 깊은 신뢰가 깔려 있다. 한편, 미라는 마졸린의 하녀로 가문이 위기에 처하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가문을 일으키려 하며 정치의 틈바구니에서 가문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여성을 대변한다. 미라는 서세이와 티리온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마졸린의 명령을 어기기도 한다.
게임을 플레이 하다보면, 왕좌의 게임 역사 속에서 이들의 움직임은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의미 없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오버워치> - 아나 (2016)
<매드맥스>를 본 사람들이라면 아나를 보자마자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매드맥스의 부발리니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 캐릭터는 메이저 게임사에서 보기 힘든 나이의 캐릭터로 등장 당시 국내 게이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제공했다.
물론 게임에서 나이가 많은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격투 게임인 <호혈사 일족>에서는 오타네 등의 노인 캐릭터들이 등장했었다. 그러나 틀니를 집어 던지는 등 캐릭터의 나이 자체를 희화화하는 기술들이 많았으며 기괴한 모습으로 묘사되곤 했다. (이 캐릭터들이 회춘하는 기술 또한 존재했다!)
그동안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늙은 여성 캐릭터는 마녀 이상의 역을 맡을 수 없었고 그마저도 비중이 커지면 희화화되기 일쑤였다. 아나는 오버워치의 부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며, 나이가 커리어를 방해하지도 않는다. 중년의 나이에도 외모는 동안이거나 몇백살을 먹었다고는 하지만 어딜 봐도 10~20대인 여성 캐릭터들이 시장에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아나의 등장은 단비와도 같았다.
되짚어본 캐릭터들을 종합해보면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 캐릭터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 필요는 없다.
- 장점만큼 단점도 존재하며 각 장단점 사이에는 합당한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
- 스토리 내에 그 캐릭터만의 서사를 부여한다.
- 캐릭터의 동기나 욕망을 드러낸다. 도덕적이지 못한 것이어도 상관없다.
거창하게 풀어썼지만 위의 조건들은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기 있는 남성 캐릭터를 하나 마음속으로 생각해보고 위의 요소를 하나하나 대입해보면 아마 크게 무리없이 위의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즉,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드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도, 대단하지도 않다는 말이다. 리부트 된 툼레이더에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던 라라의 이야기처럼, 헐리우드 영화 문법으로 익숙해왔던 아버지-아들 서사의 성별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새롭게 보일 수 있었는가 생각해보자.
이미 해외의 많은 게임사들은 다양한 타입의 여성 캐릭터들을 하나 둘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성 캐릭터들이 도구의 역할을 벗어나고 여성들이 게임 속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많은 여성들이 그 게임을 즐긴다는 사실은 <드래곤 에이지 : 인퀴지션> 이나 <어쌔신 크리드 : 신디게이트> 등으로 이미 입증된 바가 있다.
여성 게이머들은 늘 더 나은 여성 캐릭터들이 나올 수 있는 게임들에 목말라있다.
우리는 페미니즘적으로, 젠더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뇌하고, 실수하고, 성장하고, 나이든 이후에도 삶이 지워지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을 원한다. 2017년인 지금까지도 많은 미디어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어머니, 애인처럼 대상화된 존재로 남아 있어왔기에 여성들은 적은 여성 캐릭터들 안에서 어떻게든 그 캐릭터들의 의의를 찾으려 애쓰거나 아니면 매체 내에서 있으나마나한 여성 캐릭터들을 아예 배제시키고 이야기를 즐겨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