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간 연애에서 아시안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여기에 관련된 좀 더 내밀한 예시들을 살펴보자.
손을 잡을 수가 없네
한국에서는 연인인 A와 거리를 걸을 때 손을 잡지 않거나 포옹을 피할 때가 있다. 지금껏 자신이 남의 시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온·오프라인에서 목격한 외국인 남성과 교제하는 한국 여성들에 대한 각종 참신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비아냥과 욕설, 편견이 섞인 시선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반전이라면 반전이랄지, 이건 연인인 A도 그랬다.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A는 거리에서 손을 잡기를 피할 때가 있었는데 후에 A는 자신이 해당 국가를 찾은 하늘의 별처럼 많은 백인 섹스 관광객 중 하나로 보이기가 싫었다고 고백했다. 어쩌다 성매매 업소나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는 곳 근처의 지하철 역만 가도 그랬다고. 그러면서도 거기서 오는 자괴감 때문에 힘이 들 때가 있다고 토로했다.
국내에는 특히 농촌 등을 중심으로 메일 오더 브라이드를 통해 가정을 꾸리는 남성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존재한다. 교육 수준, 경제 형편, 미래 수익 등이 전반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인식인데 그 기조는 사실 그들이 메일 오더 브라이드를 얻는 이유에도 해당된다. 이렇게 메일 오더 브라이드를 얻는 남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비단 한국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A의 친척(아내와 사별 후 태국에서 미성년 여성을 데려온)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해당 국가 내에서의 인식들 역시 당연히 있다. 그리고 그런 인식들에 대한 가치 판단과는 별개로, 이는 자연스럽게 전반적인 인종 간 연애에 대한 통상적인 이미지의 형성에도 일조하게 된다.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횡행하는 섹스 관광 등 다른 여러 현상들 역시 마찬가지다. 거칠게 말해, 백인과 백인 또는 아시안과 아시안 커플과는 달리(일단 여기서는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 되는 이 두 인종만 다룬다) 백인 남성과 아시안 여성 커플의 경우 많은 국가 및 문화권에서 통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가 생기게 된다.
백인 남성의 경우 부정적인 전형화된 이미지로는 자국이나 같은 문화권, 같은 인종의 여성에게 매력을 어필하지 못하는 남성, 소심하고 외모 역시 뒤떨어지는 너드, 또는 순종적인 여성을 원하는 옐로우 피버 같은 것들이 그 이미지의 예가 될 수 있다. 한편, 그들의 상대가 되는 여성의 경우 ‘순수한' 사랑이 아닌 다른 현실적인 동기가 있을 것, 영어를 잘 하지 못하거나 때로는 가족을 매우 중요히 여기는 등 ‘아시아적인' 가치를 따를 것 (여기서 아시안 여성이 백인 남성의 출신 국가나 기타 서구권 출신이 아닌 아시아 국가 출신의 현지 여성이라면 이 폭력적인 전형화는 몇 배로 더 강력해진다. 같은 아시안 여성이라도 서구권에서 태어나 해당 국가에서 자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이 전형화에서 비껴나간다. 그 때문에 온/오프라인 상의 ‘옐로우 피버', ‘아시안 페티쉬'에 대한 수많은 고발에도 아시안 아메리칸과 아시아 국가 현지 여성의 그것은 결이 다르다)과 같은 수많은 편견이 따라 붙게 된다.
이렇게 고착화된 이미지는 인종 간 연애가 한 개인과 또다른 개인의 자유롭고 자율적인 결합이 아닌, 젠더와 인종이 전부가 되게 만든다. 나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무작위로 정해져서 태어난 한 국가의 꼬리표가 매우 사적인 관계인 연애에도 따라붙는 셈이다.
트로피 와이프
2009년 마리끌레르의 한 기사가 이 주제를 건드리면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너무나 강렬해서 이 글을 읽은 지 근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선명하다. 이 칼럼의 제목은 “새로운 트로피 와이프1)들: 아시안 여성"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지점은 필자가 어떻게 아시안 여성을 하나의 떠오르는 새로운 ‘상품'이자 ‘트렌드'로 설명하는지인데, 그 표현들은 대략 아래와 같다.
루퍼트 머독(뉴스 코퍼레이션 창업자, 거물 미디어 기업가)이나 우디 앨런(유명 영화 감독)도 가진 것, 그들이 같은 배경과 비슷한 나잇대를 가진 여성들과 이혼하고 선택한 ‘뭔가 다른 색다른 것'.
인형 같은 얼굴을 한 아시안 요정들
칼럼의 필자는 글 말미에 이런 백인 ‘거물' 남성들의 옆자리를 ‘꿰어찬'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또한 고학력자임을 이야기하면서 세계 질서에서 중국이 가진 힘과 영향력도 나날이 커지고 있음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옐로우 피버와 같은 이미지들과는 달리 백인 남성과 아시안 여성 커플이 이른바 ‘쿨'해질 수 있음을 피력하려는 듯한데, 이 시도는 이러한 특정 인종 간 연애를 하나의 ‘틀'에 넣어버리고 기존의 편견이 범벅된 이미지를 고착화시키는데 되려 일조했다.
나는 서구권 여자는 못 만나겠더라
우연히 남자친구 A, A의 형인 D, 그리고 D의 연인 E 이렇게 네 명이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자리가 생겼다. 지난해였나, D가 이전 연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고 여러모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는데 그 후에 다른 좋은 사람을 잘 만나고 있는 것 같다. D가 최근 새 연인 덕에 참 행복해한다는 이야기를 A가 지나가듯 한 적이 있다.
D의 연인인 E는 남미 국가 출신 여성이었다. 몇 년 전부터 영국으로 와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가 오가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문득 E가 도통 말을 하지 않는 걸 발견했다. 몸이 좋지 않거나 기분이 안 좋은 걸까, 하는 와중에 A가 “넌 OO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E에게 질문을 던졌다. E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양쪽 다 맞는 것 같아'라고 답하며 웃었다. 그 후에도 계속 이어진 대화들에서 E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견을 전혀 밝히지 않았다.
“각자 이유가 있겠지. 다 맞는 말 같은데.”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생각해본 적이 없어.”
뭔가 기분이라도 나쁜 걸까 아니면 그냥 원래 성격인 걸까 생각하는 찰나, D가 입을 뗐다.
“난 이래서 E랑 사귀는 게 너무 좋아. 뭘 해도 이해해주고, 자기주장을 막무가내로 내세우지 않으니까, 모든 게 너무 평탄하다니까.”
여기까지는 일단 별생각 없이 그냥 흘려듣는데, D가 말을 이어갔다.
“난 다시는 서구권 여자들은 못 만날 것 같아. 너무 자기주장도 강하고, 뭐 하나 그냥 넘어갈 줄 모르고. 페미니즘이 아주 그냥 연인 관계를 다 망쳐 버리는 주범이라니까. 그나저나, 너네는 뭐만 터졌다 하면 매일 토론의 연속이지? XX 성격이 만만치가 않잖아, 왜. 너흰 그렇게 사귀면 피곤하지 않아?”
“네가 요즘 네 에고ego에 여러 위기가 닥친 모양이로구나."
이 한 마디만 농담처럼 던지고 그래도 왠지 좀 미안한 감이 들어 E를 바라보는데, E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서 디저트를 가져와 각자의 접시에 정성스레 나눠주고 있다. 그냥 그릇을 테이블에 두고 각자 덜어 먹게 하면 될 텐데, 왜 저런 돌봄 노동을 자처하는 거지? 당황하고 있는 찰나 E가 이제는 주섬주섬 음료를 챙기더니 하나하나 컵에 따라서 여기저기 서빙까지 해주고 있다. 아니, 왜 그러세요. 여기 사람들 다 손발 달려 있고 본인이 안 챙겨도 된다고요. 거기다 여긴 내 집이에요. 마냥 행복해보이는 D의 흡족한 표정이 더 이상 좋게 보이질 않는다.
내가 일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상당수가 남성이며, 국적은 다양하나 대다수 소위 ‘1세계’ 백인이고, 대부분이 스스로를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정체화하고 있으며 학사, 석사 이상의 고등 교육을 받았다. 즉, 이들은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 내에서 인종과 젠더 문제에 대해 그나마 나은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나를 ‘친구'로 편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언뜻언뜻 농담조로 내비치는 ‘페미니즘의 영향을 덜 받은 여성'에 대한 욕망을 표현할 때가 있다. 내 출신 국가를 알 경우 일반적으로 이런 이야기는 K-pop이나, 한국 여성을 소개시켜달라거나, 아시안 여성은 참 ‘여성적’이어서 좋다던가 하는 식으로 흘러간다. 매우 불쾌하고, 역겨우며, 지금까지 상대방에 대해 느꼈던 인간적인 호감과 존경의 감정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는 매우 난감한 순간들이다. 내가 이런 순간들에서 느낀 불쾌한 감정이 불쾌함에서 그치지 않고 역겨움의 수준까지 갔다는 것은, 분명 이들이 지칭하는 대상 중 하나인 아시안 여성이 내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메일 오더 브라이드를 다루는 Upworthy의 기사 한중간에는, 한 거대 국제결혼 중개 웹사이트에서 사용하는 광고 문구가 하나 등장한다. “우리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에 의해 망쳐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긴 신음을 토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곳에서 보고 듣고 겪으며 잘 알고 있는 거였지만, 이렇게 기사에서 활자로 떡하니 옮겨져 있는 걸 보니 차라리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망상이었으면 했던 것이 뚜렷하게 실체화된 듯해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로 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갓양남'으로 뭉뚱그려지면서 자국 남성과의 연애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우월하고 안전한 것으로 여겨지는 인종 간 연애를 이루는 실체 중 특히 아시안 여성에게 치명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글로 옮기면서 가장 우려가 되는 지점은 이미 행복한 인종 간 연애를 (백인 남성과) 하고 있는 독자다. ‘나는 사회적으로든 뭐로든 성공했고, 고등 교육을 받았고, 저렇게 폭력적으로 전형화되는 아시안 여성에 대한 편견과는 모든 면에서 다르고 내 연애 역시 저런 인종 간 역학관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분들께는 꽤나 불쾌할 수 있다(아니 애초에, 왜 ‘정상적인 연애'의 범주에 들기 위해 여성이 저 수많은 체크리스트들에 체크가 된 상태여야 하는가). 내가 이민 등을 통해 한 국가에서만 지난 10년을 보낸 게 아니라, 일의 특성상 저 기간 내내 다양한 곳에서 살았기에 한 곳에서 이미 오랜 시간 정착한 경우와는 또 다를 것이고,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또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적게 오가는 국내에서는 오히려 좀 더 이런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인종 간 연애의 문제점들을 이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한국 밖 남성과의 연애가 여러 면에서 낫다고 판단하고 인종 간 연애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특히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한 경우 자국의 남성보다 서구권 출신 남성들이 이런 상식적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일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혹여 상대방 남성이 정말 소위 해당 국가 내의 현지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렇다.
그럴 거라면, 현존하는 문제들을 파악하고 인종 간 연애에 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알아서 오히려 괴롭고 이전엔 없던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너무나 높지만 그건 사실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기 전과 후에도 마찬가지이지 않았던가. 이미 이 모든 문제들을 잘 알고 또 겪고 있는 중이라도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또 자신의 이야기도 주변인들과, 연인과 나누면서 상황을 장기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또는 당장 좀 더 나은, 좀 더 안전한 연애를 위해 상대방이 자신에게 붙은 아시안 여성이라는 딱지와 가부장적 사회에서 내재화된 순종성을 탐닉하는 줄 모르고 뛰어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누가 봐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옐로우 피버인, ‘페미니즘에 망쳐지지 않은 착한' 여성을 찾아다니는 남성에게 남겨진 선택지가 ‘스스로를 교육시키고 스스로 변하는 것' 말고는 없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
1)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나 부로나 성공한 남성의 젊고 매력적인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남성의 사회적 지위 및 성공의 정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