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입을 통해 나의 말이 들리는가
동아시아의 페미니즘에 대해 각자 발제를 진행했다. 이 중 <여성과 동아시아 여성: 누구의 입을 통해 나의 말이 들리는가>라는 제목의 발제가 있었다. 보편과 특수로서의 서구와 비서구 간의 이분법적 관계를 되짚어 보고, '여성' 안에서 또다시 위계화되는 권력질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서구 vs 비서구: 지식생산자 vs 지식의 원자료
호레이스 마이너의 <나시르마 부족의 신체의례> 중 ‘구강의례’ 내용은 1950년대 미국인의 삶을 ‘카리메아(나시르마) 부족’이라고 명명, 인류학자들이 문화기술지를 작성하는 문체를 사용해 자문화를 ‘낯설게 본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이 부족의 모든 사람이 행하는 매일 매일의 신체의례 중엔 구강의례도 있다. 이들이 입 안을 관리하는 것에 관한 한 엄청나게 꼼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구강의례는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워 보인다. 내가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그 의식은 어떤 마법분말을 바른 조그만 돼지털 묶음을 입에 입어넣은 다음 그것을 형식화 된 일련의 동작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 호레이스 마이너, <나시르마 부족의 신체의례> 중
여기서 ‘나시르마' 부족은 미국을 뜻하는 아메리카의 스펠링을 American → Nacirema로 반대로 읽은 이름이다. ‘보편적’인 생활의 의례라고 여겨져 온 양치질이 생소한 부족의 신비주의적 실천처럼 묘사함으로써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묘사가 얼마나 대상화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다.
나오키 사카이의 <서구의 탈구와 인문과학의 지위> 발췌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인으로서 유럽에 조상을 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족연구 프로그램을 수립하려는 노력은 왜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는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본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왜 미국의 대학에는 유럽계 미국인 연구 프로그램에 대한 유럽계 미국인의 절박한 요구가 없을까? 왜 유럽계 이민과 그 후예가 미합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번영을 위해 기여해온 제도에 대한 지식, 문화적 성취에 대한 지식이 종족이란 관점으로 정당화되는 학술 영역을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오키 사카이 <서구의 탈구와 인문과학의 지위> 중
서구인은 보통 앎과 인식에 대한 능동적인 역할, 즉 항상 '앎의 주체' 역할을 해왔다. 즉, 연구 대상으로 규정된 적이 없기 때문에 ‘종족’의 속성을 부여받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인류 보편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한편 '서구'라는 개념이 꼭 지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근대 한국의 개화기에 남성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에 돌아와 전파해주던 때를 생각해 보자. 지식을 전파받는 이들과 전파하는 이들 모두가 (서구인이 아니라는 점만으로) “비서구인”으로 묶일 수 있는가? 전파하는 이들은 이 경우엔 '서구'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서구'란 지정학적인 면 이외에도 경제적인 면, 젠더, 권력, 계급 등 다양한 변수를 통해 중층적으로 결정되는 개념이다.
서구와 비서구를 나눌 때 대표되는 용어가 있다. 서구는 후마니타스(이론 생산자, 일반적 인간성), 즉 일반적인 인간성에 대한 지식/이론 생산자로 자신을 위치시키고, 반대로 비서구는 안드로포스(지식생산을 위한 원자료이자 사례)로 위치시킨다. 즉 서구는 보편, 비서구는 특수로서 비서구가 일반적 인간성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자 하는 서구의 의도에 의해 사용되는 원자료가 된다. 서구에 의한 비서구의 정의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페미니즘과 비서구가 무슨 상관?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서구:비서구 개념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한 이유는 동아시아 페미니스트로서 이분법적 개념과 기준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때로 1세계 페미니즘은 비서구 여성들을 ‘원자료’로 해석하며 재식민화에 가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구 백인 여성들이 아시아 여성들을 바라볼 때 ‘야만적인 남성폭력의 피해자’, ‘제국주의의 피해자', ‘전근대적 가족 체제에 억압된 자’, ‘종교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자’와 같이 무력하고 수동적인 집단으로 상정하고 바라보는 경우가 그렇다. 무슬림의 베일을 단순히 ‘억압’으로만 환원시켜 버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비서구 여성들을 시간적으로 정박된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이처럼 페미니즘 내에서도 비서구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다양한 저항의 흔적은 삭제한 채 아시아 여성을 '피해자', '수동적 주체'로만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런 시각은 여성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 계급, 지리적 위치성과 그에 따라오는 중층적이고 복잡한 권력관계들을 지운 채 개념으로서의 여성, 즉 ‘대문자 여성(Women)’이라는 단일한 ‘여성'으로 치환해 판단해버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서구 페미니즘은 비서구 여성을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려 버리는 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1세계 페미니즘이 동아시아 여성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가?"
발제가 마무리 되고 참여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서구가 아시아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동남아시아 여성들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나?", "한국에 사는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공부해야 할까?", “1세계 페미니즘이 동아시아 여성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세션을 시작하며 필요한 질문들이었다.
이어 페미니즘의 자료를 접할 수 있는 양적 기회에도, 또 자료들 간의 번역의 질 자체에도 위계가 작용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서구 페미니즘은 찾아볼 수 있는 소스가 많다. 그런데 동남아 페미니즘을 찾아보려고 하면 너무 어렵다."
"번역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도의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려면 번역의 번역본을 봐야 한다. 자료를 찾아도 번역투라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고."
이처럼 아시아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더 많은 연구와 공부를 하는 데에는 이미 '아시아'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장애물이 많다.
"비서구, 아시아 쪽 여성학자들이 만날 수 있는 커넥션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최근이 되어서야 아시아,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 등에서 만나 학회도 포럼도 하고, 그런 노력들이 자체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학회에서도 아시아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섹션’으로 만들어지며 소비되는 양상이었다.”
지금까지 자주 접해온 자료들 자체가 대부분 서구에서 온 것이다보니 그 안에서 내가 가진 편견 자체를 깨닫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영문과에서는 인도의 고전적인 페미니즘 소설도 읽고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텍스트도 읽는다. 그런데 이 실라버스는 내가 입학하기 10년 전부터 있었던 거다. ‘요즘의 인도’가 전혀 반영이 안 되어 있는 거다. 아시아에 대한 텍스트는 바뀌지 않고 그렇게 '정박'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 사이에서 어디에 내 자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동아시아 페미니스트 여성의 정체성은 혼란스럽고 헷갈린다. 서구가 되기도 했다가, 비서구가 되기도 했다가 한다."
“중앙 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와 비교해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이 나라들을 '서구'로 볼 것인가, '비서구'로 볼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서구'가 되어서 '비서구'를 판단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주로 경제적 요인과 맞물리며 소위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판단한다. 보다 구체적인사례로 결혼 이주여성,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았던 ‘엄마'에게 ‘젊은 동아시아 여성'이 만들어내는 타자화의 시선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는 참여자들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이 TV에서 재현되는 걸 보면서 '저게 맞나?'하는 생각을 했다. 저런 식으로 재현되는 걸 보는 게 당사자들한테 분명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식으로 저런 재현이 가능한 건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을 하는 건지, 그 뒤에 있는 많은 착취들을 가리는 것인지 궁금하다. 또 나 역시 그들을 보면서 타자화하는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한다."
"’타자화'하면, 엄마 생각을 하게 된다. 페미니즘 공부를 하다보면 엄마와의 관계가 더 답이 없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내 입장에서는 엄마를 보면 엄마는 착취를 당하는 것 같은데,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내가 엄마를 타자화 하는 것일까? 기혼 여성들의 문제는 기혼 여성들이 스스로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엄마가 '가르치려고 들지 마'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나는 엄마를 일방적으로 계몽하려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를 이야기 하는 이유
이렇게 헷갈리는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 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 그것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야만 페미니즘도 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피해자가 생기고, 그로 인해 또 다른 하위주체가 만들어지는 억압과 폭력은 어쩌면 동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경험 때문이다.
‘국가’라는 프레임으로 인해 고통받고 희생된 여성들의 문제로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위안부 이슈다. 참여자들은 위안부 문제와 그것의 해결을 위한 시도들도 결국 ‘민족'과 ‘국가'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우리의 여성들을 착취한 일본 남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곧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피해자성에 정박시키고 남성-국가 간의 싸움으로 만들어버린다.
"위안부 문제도 한국 남성과 일본 남성 간의 싸움이더라. ‘나의, 우리의 여성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며 공분하는 거다. 여기에 중층적인 위계가 작동한다. 제국의 남성 - 제국의 여성 - 식민지 남성 - 식민지 여성."
"‘사과를 하라’고 그렇게 요구한다. 사과하면 뭐가 달라지나? 왜 계속해서 피해자성에 갇혀야만 할까? 보상을 받고 사과를 받는 것도 '남성성'의 회복을 위한 것은 아닌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주조되는 피해자 프레임은 또 다른 하위주체를 만든다."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국민국가 프레임을 넘어서는 동아시아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고, 내가 나를 이해하고 싶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서 동아시아 페미니즘 공부를 한다. 동시에 나 스스로도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아시아 단위의 착취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한중일 여성들이 나머지 아시아 여성들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우리는 보다 나은 상황이니까’ 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좋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게 해답이 될 거라 생각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누가 내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아시아 여성들끼리 교류하고, 자기 언어로 뭔가를 쓰자. 그리고, 번역의 번역본을 그만 보자."
"지금 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동아시아가 가지고 있는 억압의 기제에 대해서 그러니까, 내가 경험하는 억압의 기제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말하고 쓰고 공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