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영문학?
2014년 가을, 이대로는 한국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 돌아가보고 싶은 마음도, 영문학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한국을 탈출하고픈 욕망이 가장 컸다. 2년 뒤, 2016년 가을에 나는 미국의 한 학교에 입학하게 됐고, 보스턴 근교의 도시로 이사했다. "왜 하필 영문학이냐"는 부모님의 애닳은 의문을 뒤로한 채.
그렇게 온 보스턴에는, 가방끈만 길어지는 맏딸의 행보에 전전긍긍하던 부모님보다도 더 치열하게, 더 끈질기게 "왜 하필 영문학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꽤 많이.
우버를 타고, 혹은 바에서, 사람들과 스몰 토크를 하다보면 반드시 거치게 되는 문답이 있다. 내가, 그리고 많은 동양인들이 미국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너 어디서 왔어 (where are you from)?
정말로 내가 당장 어디서 왔는지, 혹은 어느 도시에서 이사 왔는지 궁금한 게 아니다.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즉 나의 국적 내지는 민족성(ethnicity)을 궁금해하는 것이다. 2019년에도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 정확히는 백인들이 동양인은 당연히 외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류의 대화에 지쳤기 때문에, 보통 일리노이 주에서 왔다고 한다. 운이 좋으면 사람들은 이 때 자신의 편견을 깨닫고 부끄러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무지하고 끈질기기까지한 사람들은 “아니, 너 정말 어디서 왔는데?” 내지는 “그럼 네 부모님은 어디서 왔어?”라고 묻는다. 혹은 다짜고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하고 자신이 아는 아시아 국가들을 늘어놓는다. 그럼 나는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18년간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고 살아왔다고 설명한다. 그제서야 어딘가 안심한 백인들은 어김없이 내 발음이 너무 좋다고 칭찬한다. “동양인치고는”이라는 말을 생략한 채.
질문하는 사람이 미국인, 특히 백인일 때 "왜 하필 영문학이냐"는 질문은 “너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과 맞닿아있다. 이들의 상상력 안에서 미국이란 나라도, 영미문학이라는 분야도 백인의 영역이고 동양인은 언제나 외부인, 외지인, 외국인, 또는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아시아인의 미국 이주를 제한하던 많은 법들은 아시안을 문자 그대로 외계인alien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진짜 문학'은 백인의 것?
영미문학하면 셰익스피어나 나타니엘 호손 같은 백인 남자 작가를 떠올리는 이들에게, 동양인 여자가 영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큰 문화충격이다. 내가 주로 아시안 디아스포라 문학과 반식민주의 문학, 즉, 주로 유색인종 작가들의 문학을 연구한다고 밝히면 이들은 또 그제서야 납득한다. 내가 “진짜 영문학”을 할 리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은 학계에 팽배해 있다. 처음 영문학 공부를 결심했을 당시,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 에어>를 읽고 자랐기 때문에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했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수많은 백인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들로써는 19세기 영국의 문학작품과 21세기 한국에서 온 여자의 연관성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빅토리안 문학 세미나에서 만난 백인 동기들은 내가 그들보다 더 많은 작품을 읽었다든지, 빅토리아 시대의 식민주의 역사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힘들어했다. 서구의 식민주의적, 제국주의적 팽창의 영향으로 아시아의 많은 대학교들이 오히려 미국의 대학들보다도 더 전통적인 영문학 커리큘럼을 가르친다는 것도 이들에게는 생소한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시안계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연구분야를 바꿨지만, 그 전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내가 당연히 아시안계 문학을 연구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이렇게 학계에서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문학을 연구하지 않는 학자들은 끊임없이 그 당위성을 의심받는 반면, 아시안 디아스포라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럼 그렇지” 내지는 “순수문학이 아닌 인종 얘기만 한다”는 비웃음을 산다. 학계 주류 백인학자들이 생각하는 진짜 영문학, 또는 순수 영문학이란 현실의 삶이나 정치학과 동떨어진 미학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추상적인 이론과 미학을 찬미하는 행위는, 차별 넘치는 현실에 대한 고민이나 사회 정의를 위한 운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백인/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남성/중산층/비장애인 특권층의 전유물일 수 밖에 없다.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백인 이론가의 책을 읽으며 아는 체하는 백인 남자 동기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왜 하필 영문학이냐"고 묻고 싶다.
트럼프가 당선되는, 지금 여기의 문학
내가 미국으로 이사한 그 가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물론 대선 전에도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존재했고, 모든 것을 트럼프 당선 전후로 나누는 것은 그런 역사를 섣불리 지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당선 이후로 더 많은 이들이 대놓고, 편안하고 빈번하게 차별을 일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시내에서, 캠퍼스에서, 집 앞에서, 너무나 자주 인종차별과 위협을 당했다. 내가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길을 걷다가 폭행 당할 수 있다는 생각, 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경찰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닌다.
나에게는 문학도, 문학이론도 이런 세계를 이해하고 바꿔나가는 도구이다. 젠더, 퀴어, 인종, 식민주의를 연구하는 수많은 이론과 문학은 나에게 내 삶과 경험을 언어화하고 정체화할 기회를 주었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
2018년 가을에 나는 다시 한 번 대학원 입시과정을 거쳤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돈도 시간도 기력도 많이 드는 과정이다. 심지어 다니고 있던 학교에도 비밀로 한 채 도전했다. 내가 논문 지도를 받으려던 교수님 두 분이 모두 학교를 떠나며 나에게도 학교를 떠날 것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떠난 두 교수님도, 나와 함께 학교를 떠날 것을 결심한 내 동기도, 전부 아시안 또는 흑인 여성이다.
그렇게 떠날 것을 결심하고서야 비로소 보스턴과, 학교와, 박사과정의 때로는 교활하고 때로는 위협적인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얼마나 나를 좀먹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캠퍼스에 걸어가고, 백인 남자들로 가득한 교실에 앉아 세미나를 듣고, 대다수가 백인 남자인 학생들에게 수업을 가르치는 모든 일이 너무 힘겨웠다. 그 와중에 나는 결국 내가 원했던 다른 박사과정 프로그램에 입학했고, 박사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이 글은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왜 하필 영문학이냐 자문하고, 때로는 너무 열 받아서 왜 하필 영문학이냐 쏘아붙이고 싶은 어느 영문학 박사생의 넋두리이다. 주로 인종차별주의자인 "일부" 백인들 뒷담화를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