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학교에 대한 욕이 끊임없이 나오지만, 이런 내게도 학교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기가 있었다.
보스턴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나는 상상에 부풀어 있었다. 눈 내리는 뉴잉글랜드의 겨울, 머그에 든 커피를 마시며 벽난로 옆에서 논문 쓰기(벽난로는 커녕 거실도 없는 집에서 살았다), 지도교수님과 학회에서 패널 발표 하기(지도교수님이 학교를 떠났다), 동기들과 캠퍼스 잔디 밭에서 책 읽기(혼자 읽었다) 등. 대학원생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마는, 그래도 나름대로 장밋빛 인생을 꿈꿨다. 어쨌거나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학교 중 하나에 붙었기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내가 찾던 완벽한 학교였다. 사립학교라 상대적으로 재정이 풍부하고, 대학원의 규모가 작아 교수나 학생간의 긴밀한 교류가 가능해 보였다. 적어도 겉보기엔 교수진의 인종, 성별, 성 정체성이 다양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시안 아메리칸 연구의 정전으로 꼽히는 책을 쓴 L교수님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출판된 L의 책은 아시안 아메리칸 문학을 다루는 어지간한 책이나 논문에는 반드시 인용될 정도였다. L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라니 꿈만 같았다. 나는 이 학교에서라면 안정적이고 안전한 환경에서 생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람이 문제다
그러나 막상 와서 경험하니 내가 생각했던 학교의 장점들은 오히려 단점이 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재정은 학생들을 조종하는 도구가 되었다. 학교에서 돈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학내 근로생들 노조화와 같은 타당한 요구를 하는데도 눈치가 보였다.
그 재정마저 계속된 예산 삭감으로 인해 협소해졌다. 우리 과의 경우 복사기와 프린터 이용이 무료였는데, 어느 날 사적인 문서를 인쇄하거나 지나치게 긴 문서의 인쇄를 지양하라는 메일이 왔다. 노조화에 대한 보복이 아니냐고 연구실에 있던 사람들이 웃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대학원의 규모가 작다는 건 달리 말하면 교수의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한두 명의 교수와 관계가 틀어지기만 해도 함께 일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 처하기 쉬웠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교수 간의 친분과 알력 관계를 저울질 하고 눈치를 봐야 했다. 사람이 부족하니 매 학기 개설되는 대학원 세미나도 최대 넷에 불과했다. 네 개의 선택지 중 세 개를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그게 과연 '선택'일까? 수강신청은 그냥 가장 싫은 주제나 교수를 피하는 수준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매 학기 관심도 없는 16세기 영국 희곡 작가의 길고 지루한 작품을 읽느라 바빴다. 코스웍이 끝나갈 즈음에는 논문 주제를 구체화하고 나의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 하는데, 책장에는 16~18세기의 백인 남자 작가 책들만 늘어가고 있었다. 이래서야 한국을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어서 나는 조금씩 더 조급해졌다. 환경이 안정적이고 안전하다고 느껴지기는커녕 내가 학문적으로 정체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내 분야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불안감만 커져갔다.
결국 가장 힘든 것은 사람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학원이든 회사든 사람이 문제였다. 위에서 나열한 모든 문제들도 어쩌면 참을 만 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면.
다양성의 덫, 다양한 차별
겉보기엔 다채로웠던 교수진은 실제로 만나보니 대체로 차별과 혐오를 숨쉬듯 했다. 과 내 유일한 동양인 남자 교수는 모더니즘과 시, 그리고 20세기 영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중국어 사용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은 동양인이라 그럴 자격이 있다는 듯이 중국 시를 영어로 '번역'했던 에즈라 파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는 우리가 문학에서 “인종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찾기보다 파운드의 미학을 분석하길 바랐다. 1화에 등장한 J와 다른 백인 게이 교수들도 인종차별이나 여성혐오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소수자들이 경험하고 맞서는 억압은 그 정체성 만큼이나 다양하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경험이 같을 수 없고, 흑인과 동양인의 경험이 같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동양인 남자와 동양인 여성이, 백인 게이와 아시안 퀴어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결이 다른 억압과 차별도 결국 서로 유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차별과 호모포비아와 같은 혐오가 닮아있고 겹치는 만큼, 그에 대한 투쟁도 연대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그래서일까, 더 큰 배신감이 느껴졌다.
이런 불평을 했더니 누구는 나더러 순진한 이상주의자라고 했다. 멋대로 소수자 간의 연대를, 또는 특정한 정치적 방향성을 기대하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 맞는 얘기였지만 동시에 나는 좀 억울했다. 학교는 인종과 젠더, 성 정체성이 어느정도 짐작 가능한 사진과 이력을 내걸고 적극적으로 교수진의 다양성을 홍보한다. 그리고 학생들 역시 교수들의 인종/젠더/성정체성 구성을 염두에 두고 어느 박사과정에 갈지 결정한다.
내가 좀 지나치게 순진하게 학교의 '다문화주의 마케팅'을 믿어버리긴 했지만, 정말 나쁜 건 학문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차별과 혐오를 하는 교수진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나를 검열하고 차별을 감내할 때마다 조금씩 나의 일부를 잃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L교수님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에 첫 해를 버텼다. 그런데 도통 L 교수님을 학교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학과 행사에서도 교수님은 보이지 않았다. 박사과정 첫 해에는 그분의 강의가 열리지 않았고, 둘째 해에는 교수님의 강의가 열리긴 했지만 내가 이미 1화에 등장하는 J와 수강한 문학 이론 수업을 그 분이 맡은 것이었다.
그리고 L교수님과 만나기 위한 나의 고난의 여정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뜻밖의 고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맥락 설명이 필요하다. 대학원에 지원할 때 학생은 연구계획서 (Statement of Academic Purpose, SOP)를 제출한다. 영문과의 경우 보통 3장 내외이고, 지원동기를 적으며 자신의 연구분야와 각 학교에서 함께 연구하고 싶고 관심있는 교수(Professor of Interest, POI)를 명시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당연히 L교수님과 논문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썼다.
과마다 다르지만, 이 원서를 내기도 전부터 POI 교수에게 이메일로 연락을 취해보는 경우도 있다. 내가 처음 대학원에 지원할 때 만 해도, 이공계면 몰라도 영문과는 그런 식으로 교수에게 직접 연락을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GRE며 샘플 논문이며 쓰기 바빴던 나는 그것을 핑계로 L교수님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L교수님이 너무너무 유명해서, 나 같은 새우젓이 이메일을 보내면 답장이 오기는 할까, 교수님의 시간을 괜히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 붙고 난 뒤에는 어차피 붙었으니까 괜찮겠지, 하는 좀 방만한 마음으로 굳이 교수님에게 연락을 취해 볼 생각을 못했다. 학교에서 오픈 하우스를 열었을 때도 그 하루를 위해 서울에서 보스턴을 오갈 시간과 돈이 아까워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선택들이 중첩되어 L교수님은 내 존재 자체를 알지 못했다(나는 바다를 건너 이사까지 했는데!).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영문과 박사과정에 데인 일이 너무 많았던 교수님은 학과와 심정적으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캠퍼스나 과 행사에서 교수님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비로소 L교수님의 강의가 열린 것이다. 너무 기쁜 나머지 A와 나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춤을 췄다. 그리고 수강신청이 다가왔다.
최종 보스, 디렉터E
박사과정생이 받는 가장 흔한 질문 중 하나는 지도교수가 누구냐는 것일 테다. 그런데 우리 과의 경우 3년차에 치르는 구술시험 때 까지 정식으로 지도교수를 정하지 않는다. 3년차까지는 박사과정 디렉터 (Director of Graduate Studies, DGS)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내 디렉터 E는 수업 중의 나를 본 적도 없으면서, J의 말만 믿고 내게 "더 이상 조용해서는 안된다"느니, 수업시간에 "더 적극적으로 발표해야한다"는 둥 '조용하고 소극적인 동양인 여자'인 나를 걱정하는 말을 끊임없이 했다. 오래 마주하고 있기 싫은 상대였지만, 수강신청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E는 당연히 백인이다.
나는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매 학기 수강신청을 하기 전에 이 디렉터를 만나 무슨 수업을 들을 건지 미리 '허락'받아야 했고, 그 면담 후에 디렉터가 계정에 걸린 홀드를 풀어주면 비로소 온라인 수강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미 들었던 문학이론 수업이지만, 가르치는 사람이 다르니 배울 수 있는 내용도 다르겠다는 기대가 들었다. L교수님은 심지어 백인/유럽중심적인 이론에 대한 비판은 물론, 백인중심적인 이론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아시안/흑인 이론가의 계보학에도 정통했다. J의 수업에서 학문적으로 얻은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L교수님의 수업을 다시 듣고 싶었다. 그러나 디렉터E는 수업의 학정번호가 같아 반복 수강은 어렵다고 했다.
내가 L교수님과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E는 “안돼"라는 단호한 거부 외에 어떠한 대안도 함께 고민하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고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