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2. 그래서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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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12. 그래서 영문학

숙희

일러스트레이션: 킨지

요즘 내 책상 위에는 늘 한 권의 소설이 있다. 2015년에 출판 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패트리샤 팍(Patricia Park)의 소설 <리 제인(Re Jane)>이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 <제인 에어>를 21세기 뉴욕을 바탕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영국인 고아 소녀였다면, 패트리샤 팍의 제인 리는 한국계 미국인 고아 소녀다.

<제인 에어>에서 제인이 사랑한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그의 숨겨진 아내,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은 브루클린에 사는 힙스터 부부로 새로이 상상된다. 패트리샤 팍의 세계에서 21세기의 로체스터는 박사 논문을 끝내지 못한 대학원생 겸 고등학교 교사이고, 버사는 대학에서 (백인)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여성학 교수다. 이들이 중국인 입양아 데본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서 로체스터의 후견인 프랑스인 소녀 아델 격의 캐릭터)의 입주 가정교사로 한국계 제인을 고용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은 이 가정을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미국의 인종차별을 모른체 하는 색맹주의와 다문화주의를 비판하고, 더 나아가 미국의 군사제국주의를 지적할 여지를 남긴다.

책이 처음 출판된 2015년 부터 2020년의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책을5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다. 342장, 손에 가벼이 들어오는 무게다. 주위에 이 소설에 대해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 소설을 놓지 못했고, 지금도 이 소설에 대해 논문을 쓰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룬 내용을 바탕으로 한 논문이다). 5년 간 지겹도록 읽으면서도 끝내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지 못한 것은 이 책 한 권을 볼 때마다 내가 영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유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문학이 열어주는
시간과 공간

나는 19세기 영국, 특히 빅토리아 여왕 시기의 소설이 좋아 영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책 속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제인 에어>가 알려주었다. 버사 메이슨이 영국의 식민지 서인도 제도 출신이고 로체스터의 부가 식민지에서 온다는 것, 버사 메이슨을 인종적으로 타자화 함으로써 제인의 백인 여성성이 강조 된다는 것, 영제국의 식민주의의 역사와, 영국 여성 주체화의 과정과 그 여성성이 어떻게 식민주의에 기반하는지. 이 모든 역사가 책 한권 속에 있었다. <제인 에어>는 탈식민주의와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문을 열어주었다.

일러스트 킨지

그래서 나는 하나의 책을 볼 때마다 그 책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촘촘한 역사의 그물을 상상하고는 한다. <리 제인>의 배경은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과 뉴욕이지만, 이 소설이 포괄하는 역사적 맥락은 시간적, 공간적 경계를 초월한다. 

패트리샤 팍이 상상한 제인 리는 로체스터와의 불륜으로 인해 뉴욕에서의 삶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모국”인 한국으로 떠난다. 그가 뉴욕을 떠난 것이 9월 10일. 하루 뒤인 2001년 9월 11일, 제인의 소설 속 세상에서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알 카에다의 “테러공격”으로 인해 붕괴된다.

소설에서 이 사건은 잠시 언급 될 뿐이다. 하지만 나는 2001년 9월 11일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무수히 뻗어나간 시공간의 타래들을 쫓아갈 수 있다. 2001년에 이러한 “테러”가 일어난 원인은 1991년 걸프전부터 시작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습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중동(Middle East)”라고 알고 있는 서아시아에서 벌어진 미국의 군사 제국주의적 팽창과,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제인 리의 삶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단지 혼혈이라는 이유만으로 “양공주의 딸”이라 놀림 받고 괴롭힘 당했던 제인은 스무해 가까이 지난 후 돌아온 한국에서 전혀 다른 대우를 받는다. 백인과 한국인 혼혈인 제인은 평균적인 한국인보다 흰 피부를 칭송 받고, “네이티브 스피커”라는 이유만으로 쉽사리 취직한 영어학원에서 커리어가 승승장구한다. 그는 미드 <프렌즈>에서 영어 이름 “챈들러”를 따온 남자친구와 서울의 거리를 다니며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느낀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패트리샤 팍은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의 흔적을 드러낸다.

하지만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설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태원부터, 효순이 미선이 사건에 대한 언급까지, 패트리샤 팍은 독자들에게 한반도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존재를 끊임없이 주지시키며 문화 제국주의라는 추상적인 영향을 넘어선 미국의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군사 제국주의를 지적한다. 제인이 미국에서 놀러 온 백인 친구의 서울 관광을 담당한 날, 그들은 미군에게 살해당한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며 시작된 광화문의 반미 집회를 지나친다. 제인은 시위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과 무관한 사건으로 여기지만, “양공주의 딸" 제인의 삶은 효순이, 미선이의 삶과도 관련되어 있다.

소설은 이러한 연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점과 점을 잇는 것은 연구자인 나의 일일 것이다.

소설 속의 역사
역사 속의 여성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국사시간에 늘 졸았다. 국사 선생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에 흥미가 없었다. 역설적이고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한국 근현대사를 다시 공부했다. “양공주”라 불린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이야기를 할 때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미국의 군사 제국주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는 일본의 제국주의와도 맞닿아 있는데, 미군을 남한에 지속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일본군이 제도화했던 “군 위안부” 제도를 이용하여 미군 기지 주변의 기지촌에 “미군 위안부”를 만들어 기지촌 여성을 유치하고 관리했기 때문이다.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는 미국 영토 밖에 존재하는 모든 미군기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가 살해당한 동두천 주변에는 캠프 케이시가 있다. 2002년의 효순이와 미선이를 그리면서, 우리는 그보다 꼭 10년 전 마찬가지로 동두천에서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윤금이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30년이 지난 지금, 기지촌에 일하는 여성 중에는 이주여성이 많다. 동두천 기지촌의 경우, 2018년 두레방 활동보고서 기준으로 이주여성의 95%는 필리핀 출신이다. 현재까지 계속되는 미군기지 근처의 한국인과 이주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은 한국 정부가 가담한 미군의 군사 제국주의가 앞서 언급된 서아시아는 물론,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문제임을 알려준다.

2014년 6월 25일, 미군 위안부들은 정부를 상대로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배송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3년 후, 2017년 1월 20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부승소 판결을 내리며 미군위안부가 국가폭력의 피해자임을 증명했다. 2018년 2월 8일에는 항소심이 있었고,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기지촌에서 벌어진 성매매 조장과 인권 침해 행위는 한국 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러스트 킨지

<리 제인>은 제인이 뉴욕으로 돌아가며 끝이 난다. 지난 주말 뉴욕은 1월임에도 불구하고 영상 15도를 웃도는 날씨를 유지했다. 호주에서는 네 달째 산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인류에 의해 초래된 부정할 수 없는 기후변화가 세계 곳곳에 재앙처럼 흔적을 남기는 와중에, 미군은 세계에서 환경 오염의 가장 큰 주역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 내 미군기지 역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여 미군기지가 모두 반환 될 경우 오염 정화비만 1조원이 드는데, 이는 모두 한국정부가 부담해야 한다. 2001년의 녹사평역 기름유출 등, 한국정부의 자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기지에 의한 환경파괴는 계속되고 있다.

제인은 뉴욕으로 돌아가지만, 뉴욕 플러싱의 한인타운과 동두천 미군기지는 제인의 생각만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역사의 증인으로
영문학하기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화를 어떻게 구성할 지에 대해 여러모로 고민했다. 처음에는 내가 3년을 버틸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유색인종 여성학자와 작가들의 글에 대해 쓰려 했었다. 다만 여러 종류의 문제점에 봉착했다.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번역되지 않은 책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원주민이든, 동양인이든, 흑인이든 관계없이 영어로 쓰인 데다가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텍스트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은 지나치게 영문중심적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시리즈 내내 비판했던 서구 백인중심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돌고 돌다보니 “왜 영문학이냐"는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내게 문학은 언제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나와 세계의 관계성을 고민하는 공간이었다. <리 제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아가고 19세기 영미문학부터 21세기의 문학을 읽는 나에게 그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비록 한국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리 제인>의 이야기로 연재를 마치게 된 것은 <리 제인>의 역사성을 통해서 미국 군사 제국주의와 한국 정부의 여성 착취의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역사의 증인이 된다. 나는 그 무수히 많은 맥락들을 따라가면서, 그리고 때로는 거스르면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영문학이다.

연재를 가능하게 해 준 핀치와, 너그러운 인내심과 다정함으로 글을 다듬어 준 에디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또, 글의 뉘앙스를 담아 보다 살아있는 텍스트로 만들어주신 일러스트레이터 님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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