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의 시 읽기>의 대문을 처음 열어줄 작품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예요. 사실 '실비아 플라스' 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그 치열한 시 쓰기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시인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상상하게 합니다. 플라스는 두 아이가 다음 날 먹을 아침을 넉넉하게 챙겨놓고, 아이들 방으로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접착테이프로 문틈을 꼼꼼히 봉한 뒤, 오븐에서 새어나오는 가스에 의해 천천히 질식되어 죽어갔다고 해요.
플라스의 자살과 관련된 대표적인 두 인물을 들자면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테드 휴즈)을 꼽을 수 있을 거예요. 바통을 이어받듯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행해왔던 여성억압은 플라스의 전 생애동안 떼어낼 수 없는 피부처럼 달라붙어 그녀를 옥죄었습니다. 그녀의 여러 작품들에서 고스란히 이에 대한 고발이 이뤄집니다.
그 중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가 <아빠>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녀의 시를 단순히 그의 삶의 곤란과 곤혹의 기록이라는 식으로만 치환해서는 안 됩니다. 플라스는 분명 어떤 작가적 소명을 가지고,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그 주변을 치열하고 치밀하게 응시했을 테니까요. 시적 언어에 대한 응시와 더불어서 말이에요. 실비아 플라스의 그런 순간들과 시 쓰기가 얼마나 깊은 곳까지 닿아있는지, 시 <아빠>를 함께 읽으면서 감각해 볼까요?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는 시인이 여덟 살 때 당뇨합병증으로 죽었다고 해요. 아버지의 죽음은 시인에게 평생 큰 트라우마가 되어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물론 시인과 시적 화자를 즉각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겠지만, 시 안에도 시인의 개인적 서사와 다르지 않은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시의 목소리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아요. 죽이기 전에 먼저 죽어버린 아빠(아버지)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칠 년 동안’ ‘빨아 마시 흡혈귀’인 또 다른 아빠(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그 지점이죠.
당신을
내가
죽여도
되겠는지
내게서 말(言)을 빼앗아간 ‘독일인’ 같은 ‘아빠’가 ‘나’에게 행했던 억압과 폭력을 시적 화자는 여러 층위의 비유를 통해 폭로해요. 유대인에 대한 독일 군인의 폭력으로, 장화로 얼굴을 걷어차는 자의 무자비함으로, ‘내 예쁜 붉은 심장을 두 개로 찢어놓은 악마’ 등으로 말입니다. ‘나’는 아빠에게 따져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물음은 이런 것일 테죠. 내게 왜 그랬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고, 그런 당신을 내가 죽여도 되겠냐고. 하지만 ‘아빠’는 내가 묻기는커녕 물을 수 있는 언어를 얻기도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남은 모든 질문들은 이제 남겨진 자가 고스란히 다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비극이죠.
이 시의 ‘아빠’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진짜 아빠가 아니면서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는 자는 ‘나’의 남편으로 추정되죠. 그는 결혼이라는 제2의 억압체계 속에서, 진짜 아버지가 그러하듯 그 체계의 주관자이자 주체로서 ‘나’라는 대상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인 것으로 보이니까요. ‘검정 옷을 입은 남자./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라는 구절을 보더라도, 결혼식 장면을 연상시키죠. ‘검정 옷’은 턱시도를 상징하고, ‘그렇게 하겠다고(I do)’는 서양 결혼 예식의 공식적인 서약 맹세에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거든요. 결국 ‘아빠’는 실제 아버지이면서 남편, 그리고 어쩌면 더 나아가 시적 화자를 억압하는 모든 남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도 확장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아빠의 자리에 ‘남자’를 기입해 넣은 것을, 좀 더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의도로 볼 수도 있어요.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라고 시적 화자는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미 죽은 아빠를 죽일 방법은 없으니까, 그와 닮은 누군가를 대신 죽이는 거죠. 마지막 연, 마지막 행에서도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고 외치는 부분이 나오는데, 원문은 ‘You bastard, I'm through.’라고 쓰여 있습니다. ‘I'm through’는 ‘나는 너랑 끝났다’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끝냈다는 뜻에 더 가깝죠. 그러니까 이 시 전체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저 마지막 문장이 자칫 잘못 읽힐 수도 있도록 번역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억압해 왔던 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오랜 강박을 이제는 기어이 끝내고 또 끊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어내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다시는
무력해지지 않겠다
물론 그 강력한 마지막 선언을 위해 시적 화자가 일부러 ‘그’를 그 폭력의 대물림의 자리에 앉혔다고 볼 수는 없겠죠. 그 마지막 선언의 순간은 숙명처럼 부과된 고통을 힘겹게 견디며 심적 혼란에 시달리던 끝에 도달한 희미한 빛과의 맞닥뜨림에 가까울 거예요. 완벽하고 환한 빛 안에 들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 하나의 선언을 통해 그 검고도 깊은 관계의 수렁을 빠져나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화자가 도모하는 의지적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다시 약해지지 않으려는 지속적인 다짐과 선언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적 화자는 이제 그 선언을 하기 전의 무력한 억압상태로 회귀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에서, 이 시가 도달한 마지막 지점은 의미가 깊을 테죠.
그리고 이 시 안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장 도드라지는 억압 기제는 다름 아닌 ‘언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빠는 독일인인 반면, 화자는 유대인으로, 화자의 친구는 폴란드인으로 그려지는 데서 ‘아빠’와 ‘나’ 사이를 단절하고 위계 짓는 분할선이 바로 언어라는 것을 알 수 있거든요. 시 초반에는 시적 화자가 ‘아빠’ 앞에서 말은커녕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재채기도 못’하는 상황이 드러나 있죠. 6연에서는 ‘나, 나, 나, 나,’하면서 말을 더듬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고요. 특히 중반 이전까지의 화자는 ‘나’가 누구이고 ‘나’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말하지 못해요.
사실 6연의 ‘나, 나, 나, 나,’라는 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어디에서 어떤 저항의 싹이 트고 있었는가 하는 게 달라져요. 전 그 표현을 시적 화자의 저항적 전환의 기미가 드러난 대목으로 보고 싶어요. ‘말’이라는 걸 하려고 끝없이 시도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숨쉬기도, 재채기도 못하던 화자가 어찌됐건 어떤 말이든 시작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말을 더듬으면서, 말하기를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되풀이하면서, 그 들끓음과도 같은 행위가 종국에 가서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너와 끝났어.’라는 말로 폭발하게 되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언어적 억압에 눌린 채 힘겹게 비어져 나온 그 곤란과 참담의 더듬거림은 자신을 온전한 형태로 꽃피우기 위한 씨앗으로, 차고 어두운 땅 밑에서 이미 제 덩치를 키우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이것은 슬픔과 곤혹과 분노의 더듬거림이 주체적인 자기변혁의 발화로 거듭나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