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3 -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생각하다문학독서

다시 줍는 시 3 -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어떤 아침에는>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1, 20쪽.

 


나는 매일 아침 다르게 깨어난다.

어떤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왕창 울고, 어떤 아침에는 눈을 뜬 채로 이불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 1년 동안, 매일 아침 깨어나는 일은 가슴에 작은 절망들을 매다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침을 위해서 잠들기 전 베개를 탁탁 치며 다짐의 말들을 한다. 좋은 꿈꾸게 해주세요, 내일 괜찮을 거야, 잘 할거야. 그러나 아침에 잠에서 깨는 순간 꾹꾹 눌러 놓은 다짐의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아침을 맞이한 내 얼굴 위로 어떤 절망들이 쏟아져 내린다.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를 들여다보는 건 무척 어렵고 고된 일이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아침은 내게 그 일을 강요한다. 눈을 뜨자마자 왕창 울었던 아침, 그 전날 아주 좋아했던 사람으로부터 대차게 까였다. 눈을 뜬 채로 이불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던 아침, 그 전날 아주 좋아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리고 근 1년간의 아침. 작년 #문단_내_성폭력 해쉬태그 운동 이후, 나는 시에 대한 사랑도 시를 읽고 쓰는 방법도 잃어버린 채로 지내고 있다. 왜인지 사랑을 잃어버리면 삶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사랑을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선택지는 지금까지의 사랑을 그만두고 도망치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간 내가 무엇인가를 사랑했던 시간들을 시간에 엉겨있는 의미들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어쩌면 확신도 필요하다. 다시는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 그것 없이도 내 인생이 풍요롭고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다는 확신. 두 번째 선택지는 다시 사랑해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때에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실패의 기억들을 무릅쓰고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 힘겨운 사랑을 지켜낼 나의 삶 자체를 꾸려 나가는 힘.

세 번째 선택지는, 이것을 선택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어떻게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것이다. 나는 사랑을 포기할 용기도 없고, 다시 사랑할 힘도 부족해서 여즉 머뭇거리고 있다. 사랑을 포기할 용기가 없는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시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일련의 사건들로 나는 문학이고 시고 정나미가 다 떨어졌다. 그렇지만 누가 나에게 이제는 문학을, 시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기가 어렵다. 다시 사랑할 힘이 부족한 이유는 지난 실패의 기억이 크고 새로운 실패의 가능성이 무섭기 때문이다. 진술서와 탄원서를 언제 어디서든 일필휘지로 쓸 수 있을 만큼 성폭력 이슈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음에도, 나는 #문단_내_성폭력 해쉬태그 운동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믿었으며, 그러므로 내가 어떤 제도나 질서의 유지에 관여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그냥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무 것도 안 하면 죽는다

그렇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면 죽는다. 가끔 잠들기 전 베개를 탁탁 치며 다짐의 말을 할 힘도 없는 밤이 있다. 그런 날은 아무 것도 못하고 잠이 든다. 그리고 나면 밤도 아침도 그리고 꿈도 지옥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옥이 아닌 삶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친구들은 한국 문단 밖에서 잡지를 만들고, 어떤 친구들은 등단을 거부하고 한국 문단을 낱낱이 까발리는 팟캐스트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 작은 지면과 만나게 되었다.

작년 이후 무엇이든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문단 내 성폭력을 함께 고민하는 좌담회, 한국 문학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자리 등에 참석해보곤 하였다. 그때 남은 두 가지 기억이 있다. 한 가지는 문단 내 성폭력 좌담회에 갔을 때의 기억이다.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자신이 고민했던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꼿꼿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 나가는 게 좋아서 고개를 들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는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두 번째는 한국 문학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자리에 갔을 때의 기억이다. 강연자가 강연 끝에 질문을 받는다고 하길래, 고민 끝에 손을 들고 물어봤다.

저는 그 이후로 매일 절망감이 들고 어떻게 다시 한국 문학을 공부하고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강연자는 단단한 얼굴로 이야기하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대답했던 것 같다.

한국 문단의 기득권, 남성들에게 우리의 언어와 문학까지 빼앗길 수는 없지요. 계속 우리의 언어와 문학,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이때 ‘지켜 나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재생 불가능할 정도로 빻은 한국 문학과 문단을 매일 같이 걱정하고 온 힘을 다해 책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보다 이는 우리가 독자 그리고 창작자로서 목소리를 지키고 그로부터 우리 존재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켜 나가기.’ 나는 이를 위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구체적인 삶의 면면들로부터 작품을 언어화하고 작품의 세계를 의미화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읽고 쓰는 일.’ 핀치의 <다시 줍는 시> 시리즈에서 내가 지면에 소개하고 이야기 할 시들은, 어느 날 어떤 순간 나의 가슴을 세게 치고 지나갔던 시편들이다. 내가 여성/퀴어이기에 나의 가슴을 치는 시들은 핀치에서 글을 읽는 사람들의 가슴 역시 치고 지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공명할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 나가는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최승자의 <어떤 아침에는>이라는 시는 오직 4연 때문에 골랐다.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사전을 찾아보니 ‘속절없이’라는 단어는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매일 같이 내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절망 역시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나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시를 사랑하는 마음을 단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시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떻게 나와 삶을 지속해 나가야할지 모르겠어서, 절망.

작품 속 ‘어떤 아침’들은 시적 화자의 존재와 그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어떤 아침은 그에게 세상에 대한 좌절감을 매달고, 어떤 아침은 그에게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망감을 매단다. 어떤 아침들이 매달아 놓은 생각들이 기어코 그를 누르고, 그는 결국 자신과 세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자 한다. 그는 가만히 숨죽인다. 그렇게 도통 살 수가 없어 숨죽일 때, 한 풍경이 다가온다. 그것은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또 찧는 풍경이다.

속절없이

내가 나와 시에 대한 사랑을 그만두고 싶을 때, 그리하여 숨죽일 때, 내게 다가오는 풍경은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기억들로부터 비롯된다. 온 몸을 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얼굴로, 여자들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풍경.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입을 열어 말을 하는 풍경. 죽지 않고 사는 풍경. 그렇게 보리를 찧고 또 찧는 일의 힘으로 지구는 돈다고 시인은 이야기한다.

여자들의 보리 찧는 풍경은 아침에 내리는 절망을 모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어도 밤에 베개를 두드리는 내 손길에 힘을 부여한다. 그리고 나도 보리를 찧게 한다. 우리 최승자부터 다시 시작하자. 앞으로 핀치의 지면을 통해, 사랑하는 시편들을 소개하고 그 시편들에 나의 삶과 경험 그로부터 비롯된 생각과 느낌들을 기입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나는 등단한 경험이 없으며 혼자 시를 읽고 쓰는 습작생이다. 나는 퀴어고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대학 내 성폭력 문제와 문단 내 성폭력 문제에 관여된 바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시작하는 시 읽기가 나로부터 출발하여 어디에선가 보리를 찧고 있는 여자들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작업을 통해 잃어버린 시에 대한 마음을 하나씩 주울 수 있을 것 같다. 지면에 소개하게 된 최승자의 <어떤 아침에는>은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다시금 마음을 줍고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필코 그렇게 만드는 시라고 생각한다.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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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IES

다시 줍는 시

01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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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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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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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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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향하여, 친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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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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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차가 끓는 시간, 언 발이 녹는 시간,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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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명과 나의 비명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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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가능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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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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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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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사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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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를 넘겨주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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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사이를 가만히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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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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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슬픔의 힘으로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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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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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팍하고 사랑스러운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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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나누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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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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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1 : 박서원과 고통으로 세계와 자신을 파멸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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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2 : 김소연과 고통으로 삶의 중심에 다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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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소호가 이경진의 입술을 열고 말을 불러 일으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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