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19. 청춘이라는 시

생각하다문단 내 성폭력

다시 줍는 시 19. 청춘이라는 시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지금 와 대학 시절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대학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시네마떼끄에서 살았다. 학교에는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영화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시네마떼끄였다. 나도 제대로 된 취미 하나 있으면 좋지, 영화에 한 번 관심을 가져볼까? 하고 호기심에 들어간 곳이었다. 온통 푸른색의 영화관에는 작은 스크린과 관객석이 있었고 그 뒤로는 기계실과 공용공간 그리고 쪽방이 있었다. 학교에 친구가 거의 없었기에 수업 전후로 비는 시간이면 시네마떼끄를 찾아갔다. 테이블에 앉아 키노나 씨네를 읽거나 쪽방에 들어가 오래된 비디오를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안전하고 온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대학이라는 낯선 환경이 주는 아득함과 마음 붙일 사람이 없는 쓸쓸함 때문에 당시의 나는 늘 우울하고 불안했으며 그 상태로 오래도록 부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네마떼끄에서 영화도 참 많이 보고 책도 잔뜩 읽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거나 낭비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빡빡하게 학점 채워 수업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쉬었던 적이 없었는 데도, 시네마떼끄에서의 시간만큼은 지켜서 누리고 싶었다. 자주 예술 작품을 가까이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무엇인가 쓰거나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삶의 여러 면면들이 몸으로 느껴지던 때였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념들을 족족 페이지에 옮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토록 감각적으로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었을 때, 나는 비현실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스스로가 좀 더 현실에 본격적으로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비현실감은 약간의 죄책감으로 이어지곤 했다.

청춘의 끝

삶의 구체적인 줄기를 구성하는 것보다 삶의 아름다운 취향과 기준을 세우는 데 몰두하던 시간들이었다. 당시 좋아하던 시편들은 주로 감각적으로 극도로 예민하며 무용한 비유들로 가득찬 것들이었다. 그러한 시편들과 진실로 공명한다고 느꼈으며 그것들을 내 손으로 만들어 보기 위하여 애썼다. 그때의 나는 아름다운 것이 최상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무수한 지식들을 흡수하면서도 그로부터 명확한 가치관을 세우거나 신념에 맞추어 실천하며 살아갈 생각을 하지 못 했다. 삶과 사람에 대한 판단은 최대한 유보하였고 결정하고 실행해야 하는 많은 문제들은 끝까지 유예시켰다.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내 어리석고 불투명한 가치관과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움직임이 지금껏 문단의 상황을 밝은 눈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스스로의 발등을 찍고 싶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무한히, 무한히 늘어진 시간 사이를 하염없이 걸어 다니며 그로부터 관념과 상상의 세계를 넓히는 데만 집중하던 시절이었다. 그러할수록 나의 두 발은 현실의 땅으로부터 더욱이 떠오르기만 했다. 당시의 나는 언젠가는 모두와 작별하고 어디론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느 시점에 어떠한 방식으로 삶이 끝나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는 마음이었다. 무책임하고 그러므로 불안하며 덕분에 자유로운 시절이었다. 아름다운 청춘 시절이 끝났다. 혹은 게으르고 개념 없던 자아 과잉의 유아기가 종결되었다. 오늘 살펴볼 이제니의 시편 <발 없는 새>는 아름답고 불안하며 쓸쓸한 청춘에 대한 스케치다.

이제니가 본 청춘

대학 시절 사랑하던 감독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1990)에는 영혼에 청춘을 품은 배우 장국영이 나온다. 그리고 이 유명한 대사,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 번 땅에 내려 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이제니는 발 없는 새라는 제목 아래에 청춘 시절을 스케치한다. 그의 청춘은 몸과 마음을 내려 둘 데 없는 고아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존재다. “청춘은 다 고아지. 새벽이슬을 맞고 허공에 얼굴을 묻을/때 바람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지. 이제 우리 어디로 갈까./이제 우리 무엇을 할까. 어디든 어디든 무엇이든 무엇이든./청춘은 다 고아지. 도착하지 않은 바람처럼 떠돌아다니지.”

그의 청춘은 상실을 쫓아다니며 슬픔으로 부푸는 가슴과 제멋대로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또 다시 사랑할 사람을 찾고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쉬고자 하는 사람이다. 청춘에게 누군가 부재한 자리는 사라진 단춧구멍 같고 청춘은 그곳을 들락날락하며 너와 나에 대해 생각한다. 청춘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상실과 사랑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만다. “난 사라진 단춧/구멍 같은 너를 생각하지. 작은 구멍으로만 들락날락거리/는 바람처럼 네게로 갔다. 내게로 돌아오지. 우리는 한없이/둥글고 한없이 부풀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해.”

또한 청춘은 현실을 산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계속 그것을 꿈꾸는 존재이며,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꿈꾸기 때문에 결국 현실의 삶으로부터 무한히 멀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구체성이 결여된 삶을 지속해 나가면서 청춘은 잠과 꿈의 경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 “나는 거기 누워 꿈 같은 잠을 잘 거야. 잠 같은/꿈을 꿀 거야.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내가 어디로 흘러와/있는지 볼 거야. 누구든 한번은 태어나고 한 번은 죽지. 한번/태어났음에도 또다시 태어나고 싶어하는 사람들. 한번 죽/었는데도 또다시 죽으려는 사람들. 제대로 태어나지도 제/대로 죽지도 못 하는 사람들.”

아득히 지나고 나서야

청춘은 높은 온도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어디로 어떻게 표출할지 몰라 계속 헤맨다. 그 감각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더 높은 온도와 깊이를 욕망하게 되니, 청춘의 내부에는 답이 없는 질문들로 가득하게 된다. 이제니의 청춘은 걸어 다니는 시처럼 자신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문장들을 받아 적게 된다. 그로 인해 헛된 비유와 소용없는 문장들로 가득 찬 상자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대답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해서 질문으로/끝나지. 청춘은 다 고아지. 헛된 비유의 문장들을 이마에 새/기지. 어디에도 소용없는 문장들이 쌓여만 가지. 위안 없는/사물들의 이름으로 시간을 견뎌내지.” 아름답고 쓸모 없는 문장들로 가득 찬 상자가 되어버리는 것이 청춘인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본다면. 이토록 고단한 삶에서 그 자체로 시가 될 수 있는 시절을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청춘 시절이 아득히 지나고 나서야 그 시절에 대한 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청춘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 청춘 시절은 통찰하고 그려 내기 어렵다. 이제니도 청춘 시절을 지나 <발 없는 새>를 썼으리라. 덧붙여 작품 <발 없는 새>에는 “청춘은 다 고아지.”라는 문장이 반복되는데, 이는 시편 <고아의 말>과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이 말들을 따라가면 다시 고아의 해변으로”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시편. 청춘이 머물던 해변의 땅을 쫓아가보는 것도, 이제니의 <발 없는 새>를 풍요롭게 읽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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