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의 시 읽기 3. 김언희, <캐논 인페르노>

알다

페미의 시 읽기 3. 김언희, <캐논 인페르노>

[웹진 쪽] 희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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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희 시인의 시집 『보고 싶은 오빠』에는 섹스, 입, 이빨과 관련된 표현과 묘사들이 유독 많아요. 시집 표지 그림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죠. 웃는 입이 있는데, 얼굴은 없어요. 입술 안쪽의 가지런한 이가 보이고요. 시 <보고 싶은 오빠>에서처럼 ‘오빠, 공짜로 넣어줄게’하고 말하면서 웃는 입술인 거죠. “봐, 웃고 있잖아, 걱정 말고 들어와, 나의 입속으로!” 하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저 이빨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무는 이빨, 물고 늘어지는 이빨, 절단하는 이빨, 분쇄하는 이빨로 말이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게 바로 바기나 덴타타Vagina dentata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빨 달린 질' 말입니다. 이건 바바라 크리드가 페미니즘 영화비평 『여성괴물』에서도 심도 있게 다루는 내용이에요. 크리드는, 프로이트가 아버지에 대해 느낀다고 말하는 남자아이의 거세불안을 비판하면서, 그 아버지의 자리에 어머니가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프로이트의 분석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페니스가 어머니에게는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되면서, 자신도 어머니처럼 거세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갖게 된다는 것. 이때 남자아이를 거세하게 되는 자는 당연히 아버지이고요. 즉 어머니는 페니스가 없는 결핍의 존재이면서 무능의 존재이기도 하다는 주장입니다. 페니스를 가진 자도, 페니스를 절단하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자도 아버지라는 것이죠. 이렇게 어머니-여성은 철저히 소외당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구 남성 중심의 정신분석 전통 안에서입니다. 

여성은 이미
너무 잘났기 때문에

바바라 크리드는 이를 비틀어 말합니다. 여성을 소외시킨 것은 그들 남성의 두려움의 결과라고. 여성이 가진 능력은 공포스러울 만큼 이미 너무 거대하여, 아버지 중심의 팔루스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별 것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려야 하기 때문이죠. 이런 이야기는 기존의 남성 중심 정신분석에 대한 정신분석으로도 보이기도 하네요. 중요한 건 여성이 거세된 자가 아니라 거세하는 자라는 점입니다. ‘없음’과 ‘할 수 없음’의 존재가 아니라 ‘있음’과 ‘할 수 있음’의 존재라는 점입니다. 이빨 달린 질, 바기나 덴타타가 바로 그것의 증거인 거고요.

이 시 <캐논 인페르노>는 바기나 덴타타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줘요. 외치지 않고 나지막이 주술을 외죠. 제목 뜻 그대로 ‘지옥의 변주곡’을 물 흐르듯 흘려보낼 뿐입니다. ‘머리 가죽이 벗겨질 때까지 나를 빗질해대는 가차 없는 빗살’은 ‘옆집 개를 톱질하고 온 전기 톱’의 톱니로 고조되는 듯하다가 다시 ‘죽은 사람의 틀니’로 하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강이 아닙니다. 그것은 끝없는 하나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죠. ‘내 배때기를 푸욱 찔러라 찔러’ 하고 말하는 목소리. 이것은 죽은 사람, 귀신의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귓속에서 태어나는 목소리이므로 떨쳐낼 방법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 목소리는 이런 의미를 담았을 겁니다. 너의 그 잘난 페니스로 나를 찔러봐, 찔러봐, 괜찮아, 안심하고 찔러,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너 그거 좋아하잖아, 어서 찔러봐, 으응?

공포의 거울

그런데 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배때기’는 ‘마룻바닥’에서 ‘뒤통수’로 변주되다가 마침내 ‘발이 푹푹 빠지는 거울’이 됩니다. 찔리기만 할 것 같은 무력한 사물에서 덮치는 사물이 되어버리는 거죠. 덮치는 ‘사물’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해야 맞겠네요. 바바라 크리드의 ‘여성괴물’처럼요. 왜냐하면 그 거울은 곧바로 ‘역청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발이 빠지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발이 쩍쩍 들러붙고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공포의 거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발이 푹푹 빠지는 거울이/발이 쩍쩍 들러붙는 역청의 거울이 있다'라고 서술하는 부분은, 바기나 덴타타의 본래적 의미인, 절단하는 것으로서의 이빨 달린 질보다 더 고차적인 공포를 주는 것 같아요. 절단이 된다고 할 때는 절단되어 떨어져 나간 부위만 포기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거든요. 그런데 들러붙고 붙들린 상태가 계속된다면, 고통은 고통대로, 불안은 불안대로 그것은 하나의 현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죠.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목소리와도 그 맥락이 연결됩니다. 귓속에서 끝없이 태어나는 목소리,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목소리 말이죠.

마지막 세 개의 행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내 두 손이 뭔 짓을/하게 될지/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당신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빠져버린 그 고통과 공포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에게 또 하나의 불안을 쐐기 박듯 던져주는 겁니다. 이보다 더한 게 있을 수 있다고. 나도 모르는 내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그러므로 당신은 이대로 얌전히, 착하게 잘 살아가라고. 그것 말고 뭘 더 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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