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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카테고리의 인기 기사

다시 줍는 시 1 -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신나리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그녀가 일어났다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돌았다 일어선 그녀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나는 온종일 그녀를 바라보며 맴돌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운 5월의 피렌체 공항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흰 벽에 기대어 선 그녀의 목걸이는 빛나고 또 다른 사랑을 위하여 그녀의 목걸이는 이륙을 준비한다 피레네 산맥을 자동차로 넘어온 나 또한 다음 차례로 지상을 떠나지만, 묻지 않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돌았다 일어선 그녀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나는 맴도는 그녀를 바라보며 온종일 맴돌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구름은 내게 내 사랑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 박상순,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Love Adagio』, 민음사, 2004, 32-33쪽.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2017년의 다이어리 첫 번째 장에는 한 해의 다짐이 호기롭게 적혀 있다. “1. 휘둘리지 말자. 2. 당황해도 침착하게!” 달이 넘어갈 때마다, 혹시나 잊을까 하여 1월의 페이지로 넘어가 다짐들을 가슴 속에 새기곤 했다. 그러나 올 한 해는 기록할 만큼 타인에 휘둘렸고 마음 운영에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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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2 - 아름다운 세탁소에 대한 상상력

신나리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는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지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네 친구, 그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 골목 가득 옥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설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 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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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3 - 우리 다시 최승자부터 시작하자

신나리

<어떤 아침에는>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 최승자, <어떤 아침에는>,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1, 20쪽. 나는 매일 아침 다르게 깨어난다. 어떤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왕창 울고, 어떤 아침에는 눈을 뜬 채로 이불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 1년 동안, 매일 아침 깨어나는 일은 가슴에 작은 절망들을 매다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침을 위해서 잠들기 전 베개를 탁탁 치며 다짐의 말들을 한다. 좋은 꿈꾸게 해주세요, 내일 괜찮을 거야, 잘 할거야. 그러나 아침에 잠에서 깨는 순간 꾹꾹 눌러 놓은 다짐의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아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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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4 - 포기에 대하여

신나리

<호명> 당신이 부르시면 사랑스러운 당신의 음성이 내 귀에 들리면 한숨을 쉬며 나는 달아납니다 자꾸 말을 시켰죠 내 혀는 말랐는데 마당에서 키우던 개를 이웃집 개와 맞바꿉니다 그 개를 끌고 산으로 가 엄나무에 매달았어요 마당에는 커다란 솥 이 준비되었어요 버둥거리던 개가 도망칩니다 이리 와 이리 와 느릿한 톤 불확실한 리듬 어딘가 숨었을 개가 주인을 향해 달려갑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을 향해 사랑이라 믿는 걸까요 날 이해하는 사람은 나를 묶어 버립니다 호명의 피 냄새가 납니다 개 주인은 그 개를 다시 흥분한 사람들에게 넘깁니다 이번엔 맞아 죽을 때까지 지켜봅니다 평상에서 서로 밀치고 당기는 사람들 비어 가는 접시와 술잔 빈 개집 앞에 마른 밥 몇 숟가락 아버지는 나를 부르고 나는 지붕 위로 올라갑니다 옥수수 밭 너머 신작로가 보입니다 흐르는 구름 너머 골짜기 개구리 소리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동경하지 않아요 당신이 부르시면 날개 달린 당신이 부르셔도 - 김이듬, <호명>, 『표류하는 흑발』, 민음사, 2017, 111-112쪽. 사람들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자주 그런데, 그럴 때면 외로워지니까 담배를 피우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물론 시집도 읽는다. 아주 가끔 운이 좋으면 말이 잘 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인이나 시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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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13.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신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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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12.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신나리

두 이야기 친구 넷이 모여 ‘사라진 것들’에 대해 말을 나누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늘 또 슬리퍼를 사야 되네.” 1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어느 날 문득 퇴근해서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갈아 신으려고 보면 슬리퍼가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한때 나도 시계가 자꾸 사라져서 힘들었거든.” 7이 1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7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1은 7의 등을 토닥여준다. “분명히 전날 밤 퇴근할 때 끼고 왔던 장갑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찾으면 없는 거야.” 장갑이라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 아니냐고 친구들은 말하고, 5는 자신이 장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장갑이 저절로 ‘사라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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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6. "미래가 온다"

신나리

*이 책에는 각주 대신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기법)가 사용되었음을 밝혀둔다. - 김현, <미래가 온다>, 『입술을 열면』, 창비, 2018, 190-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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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22. 속절없이 우리는 사랑으로

신나리

시인 김행숙의 네 번째 시집 『에코의 초상』은 이토록 아름다운 시로 시작한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물결처럼//우리는 깊고/부서지기 쉬운//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인간의 시간」) 오랜 시간 김행숙의 작업은 인간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 탐구의 과정을 시로 그려내 왔다. 기나긴 여정 속에서 시인은 인간의 본질에 사랑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시집을 열면 울려 퍼지는 시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본질에 사랑이 있다고 믿고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는 인간에 대한 실패와 절망을 경험한 것일까? 우리는 나 아닌 존재와 마주하고 진정으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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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마지막. 이소호가 이경진의 입술을 열고 말을 불러 일으킬 때

신나리

3월 12일 화요일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침에는 엄마와 아빠가 또 큰소리를 내고 싸웠다./내가 스물 아홉이나 먹어서 이런 일기를 쓰다니 참 내 인생도 안 됐다./나는 엄마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어린 시절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던 거야./그래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아주 나쁜 선택을 했다./그리고선 지금까지 처벌을 받고 있다./그 이후의 불행에 대해, 그녀는 시정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똑같이 살고 있다./이건 한심하고 멍청한 일이야./이런 생각을 해본 건 처음이다. 나는 집에서 작업실로 걸어가며 홀로 했던 생각을, 그날 오후 일기장에 적었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아무...

다시 줍는 시 9. 그녀(들)의 가능세계

신나리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지금은 기억에 없는 어떤 시절에 나는 누런 소파에 누워 젖병을 물고 있었다. 그곳은 한가로운 공기가 오가던 꽃집이었다. 어쩌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는데 아가인데도 울지 않고 가만히 엎어져 있어 신기했다고 한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되는대로 귀를 뚫어버리던 시절에 나는 누런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밀크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곳은 전화벨 소리가 바쁘게 울리던 꽃집이었다. “도대체 왜 꽃을 사는 거야? 허영과 사치를 선물하는 거야?”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집에나 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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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7. 보리차가 끓는 시간, 언 발이 녹는 시간, 교차!

신나리

일상 나는 아침 8시 반에 일어난다. 눈을 뜨고 이불을 개고 책상 위에 놓인 위장약을 두 알 먹는다. 책상 위에는 어제 두었던 물 잔 하나. 거의 매일 나쁜 꿈을 꾸고, 깨어나도 꿈들이 선명한 경우가 많다. 휴대폰 메모장에 간밤의 악몽을 기록한다. 근래 내가 어떤 스트레스를 어떤 방식으로 받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표. 아침을 먹는다. 시리얼과 과일을 먹거나 현미밥에 인스턴트 김. 밥 먹고 바로 도시락을 싼다. 샌드위치나 유부초밥. 준비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 책상에 앉는다. 뉴스도 보고 sns도 보면서 잠을 깬다. 욕실에 들어가서 머리 감고 세수하고 이 닦고 화장하고 옷 입고. 출근! 종일 글 읽거나 글 쓰거나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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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24. "여자인간"

신나리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든 것 나는 페미니스트다. 나는 내가 여성이며 페미니스트인 것이 좋다. 앞으로도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인간 개인과 사회 구조에 저항하고, 여성들과 연대하고 노력하여 이 세계의 가부장제를 박살내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퇴행적인 대학본부와 성폭력 가해자 교수, 문단 내 성폭력, 일상에서 마주하는 폭력적인 경험들까지.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가 나의 삶의 굴곡을 만들고, 결국은 나를 페미니스트로 만든 것이다. 가끔은 너무 화가 난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싶지 않아. 나는 소수자이고 싶지 않다. 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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