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했어야 할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 놓는다. 나는 사랑했던 집단으로부터 배척과 적대를 당한 적이 있다. 대학 시절, 나는 친구를 돕기 위해 양성평등센터와 성폭력심의위원회의 교수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차례 우리를 모욕했다. 이후 나는 우리를 공격하던 사람으로부터 명예훼손 죄로 형사 고소를 당하기까지 했다. 대학은 내게 여성학을 가르쳐주고 여성 연대란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해준 최초의 공간이었다. 그러한 대학에서조차 인간으로, 여성으로 보호와 존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 일로 나는 아주 큰 상처를 받았고 공동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것
나는 스스로를 설명할 때 ‘상처’나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경험과 사유들이 그 단어에 묶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그 때의 일을 상처와 트라우마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그러한 단어들을 통해, 그 사건이 학교 본부와 몇몇 교수들의 잘못이었음을 명확히 말하고 싶다. 또한 그러한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를 약한 사람,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을 자신이 있다.
대학에서의 경험을 통해 마음에 새기게 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힘든 사람들끼리 함께 있으면 더 힘들어진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어떤 집단에도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것. 당시 나에게는 연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도 완전히 마음을 주고 속사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각자의 짐만으로 너무나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사건 이후 나는 학교를 가는 일에 구토감을 느꼈고, 이후 대학원에 가서도 누군가 나에 대해 알고 있을까,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는 강박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곁에 있을 자격
그 이후로 내게 공동체는 언제나 삶의 화두였다. 가족들과 잘 지내지 못했으며 연인들과 항상 결국 헤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나는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싶었다. 나는 친구들을 정말로 사랑했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들의 삶은 어려워져만 갔다. 친구들 중 절반 이상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한 친구들의 곁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친구들의 우울에 쉽게 전염되었고, 스스로가 위태로워질 때마다 친구들을 밀어냈다. 또 가끔은 친구의 미래에 희망이 없어 보였고 그렇게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면 친구의 곁에서 떨어져 나왔다. 누군가의 미래에서 희망을 볼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자격이 없었다.
친구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싶다는 소망과 믿음이 무너져 내리면서 힘든 사람들끼리 함께 있으면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과 그 어떤 집단에도 마음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은 확고해져만 갔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생각은 나의 존재를 가두었다. 두 가지 생각에 매몰될수록 나는 상처 입은 사람,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되어 갔다. 또 상처에 민감한 사람,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은 사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 갔다. 두 가지 생각은 나를 봉인해갔고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만 살아갔다. 당연히도 나는 아주 빠르게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공동체
얼마 전 진행해오던 일을 매듭 짓고, 지리산에 다녀왔다. 첫날 게스트하우스를 찾기 위해 산길을 오르던 중 낯설고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내리쬐는 볕과 하늘거리는 풀 냄새 가운데 웬 청소년들이 하나 둘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내게 꾸벅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실상사 작은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지리산 산내에서는 이웃을 만나면 꼭 인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듣게 되었다. 또 첫날 저녁 게스트하우스 옆 1인 연구소에서 열린 영어 수업을 청강했던 일도 꽤나 즐거웠다. 포포 선생님의 수업을 레이첼, 피지와 함께 듣게 되었는데, 럭키하게도 팥 아이스크림과 삶은 감자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지리산 산내에서는 이처럼 약 50개의 소모임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나의 마음은 복잡하게 부풀었다. 휴식을 위해 찾아간 지리산에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공동체는 서로 인사하고 공부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살아 숨쉬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느새 나는 공동체와는 아주 먼 사람이,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스스로를 잠가버린
정한아의 시집 『울프 노트』에는 미모사에 관한 두 편의 시가 있다. <미모사와 창백한 죄인>, <어떤 봉인>. 앞선 시편은 미모사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너무 예민한 것들 앞에서는 죄인이 된다/숨만 크게 쉬어도 잎을 죄 닫아걸고 가지를 축 늘어뜨/리는/미모사” 시인은 미모사란 너무나 예민하고 연약하며 까다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누구나 죄책감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시인의 목소리에는 미모사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사랑과 증오가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토록 미모사에 대한 버거운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바로 뒤의 <어떤 봉인>은 시인의 미모사란 곧 시인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다. 시인의 미모사에 대한 사랑과 증오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였던 것이다.
<어떤 봉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그때 너는 눈꺼풀을 닫았지/그러자 세계 전체가 일순 물러났다” 시인에게 미모사는 스스로를 잠가버린 존재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쓰는 존재, 세상과 접했던 모든 기억들을 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존재.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존재. 시인은 앞선 시편에서처럼 미모사에게 화를 내거나 경멸의 말을 쏟아내지 않는다. 시인은 미모사의 이름을 부르며 미모사가 얼마나 아팠기에 스스로를 잠가버렸는지를 헤아려본다. “미모사. 봉인의 속도가 존재를 대체해버린/미모사. 모든 감각이 통각인/미모사.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말하지 않을”
나는 이 글을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하고 다듬으며 썼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잊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모두 쓴다. 그리고 다시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갖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잠가 버린다. 나는 미모사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또 미모사로부터 나를 밀어내면서 이 글을 썼다. 나는 이제 내가 왜 어떤 순간 스스로를 봉인해버렸는지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 봉인으로부터 언젠가 나갈 것이라는 것도 기대한다. 나도 인사하고 말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살고 싶으니까. 나는 당신도 나와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이 글을 썼다. 정한아가 그러했듯 나도 어떤 미모사들 곁에 서겠다. 이름을 부르면서 가만히. 미모사의 말을 듣고, 미모사를 만날 날을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