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진은영: 아름답고 정치적인 페미니스트 (상)

알다한국문학인터뷰

시인 진은영: 아름답고 정치적인 페미니스트 (상)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여성 시인 인터뷰 시리즈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기 위하여 기획되었다. 인터뷰가 여성 시인과 독자가 만나 서로의 삶을 읽고 나누는 통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세 번째 인터뷰이 진은영 시인은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시집으로는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 『우리는 매일매일』(2008), 『훔쳐가는 노래』(2012)가 있다. 핀치의 <다시 줍는 시>시리즈에서 진은영 시인의 작품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소개한 바 있다. 오랫동안 진은영은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싸우고, 아름다우면서도 정치적인 시를 쓰기 위하여 분투했다. 여성 시인, 여성 지식인, 그리고 우리의 따스하고 든든한 벗인 진은영에게 질문을 던지고 귀를 기울였다.

 

연서

신나리 제게 늘 시인님의 작품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집니다. 이토록 끝없이 연서를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진은영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힘들어서 그런 시들을 썼던 것 같아요.(웃음)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문제점과 인간적 허약성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많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혐오하게 되기도 하고요. 아마 그건 그 사람의 사랑스러운 구석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텐데...

제게는 한 사람의 영혼 속 사랑스러움이 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꽁꽁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먼 곳에 있는 사람, 가닿지 않는 연인에 대한 편지를 씀으로써 내가 발견하지 못한 사랑스러운 영혼에 대해 계속 환기하려 했던 것 같아요.

신나리 왜 그것에 대해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진은영 일단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사랑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경험들이 있고요. 또, 현실은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쓸 만큼 늘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잖아요. 굉장히 누추하죠. 그런데 그 누추한 것 속에서 불현듯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게 시인인 것 같아요. 

사진 조아현

최근에 송경동 시인의 시집 중 <시인의 말>에서 ‘우연히 오게 되었지만….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라는 글귀를 읽고 무척 감동했어요. 송경동은 가장 척박한 노동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사람이잖아요. 늘 그런 곳에 있으면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아이러니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인이라는 존재들은 그 희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의 열망을 버리지 않는 게 아닐까, 살기 위해서. 고백하자면 나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못 견딜 것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신나리 작품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혹은 노동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아가씨’라는 시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나 일상에서 아가씨라는 단어는 때 묻은 채로 사용되곤 하는데요. 왜 굳이 이 시어를 자주 사용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진은영 낡고 때묻은 단어들을 시적인 공간으로 가져와서 새로운 느낌을 주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 시를 배우는 곳에 가면 우정, 사랑 같은 단어들은 관념적이면서 낡은 단어이기에 사용하지 말라고 하거든요. 저는 그런 단어들을 시 안으로 끌어오려고 했던 것 같아요. 또 편향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들의 느낌을 깨고 흐트러뜨리는 게 시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가씨’라는 단어는 마초적인 느낌을 줄 때가 많은데, 저는 여성 시인이잖아요. 여성 시인이 그 단어를 쓸 때 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어요. 여성 시인이 그 단어를 쓸 때 만들어내는 역전의 감각을 실험해보고 싶었고요. 그 묘한 자장을 좀 즐기기도 했고요.

신나리 작품에 ‘가슴’이라는 시어도 자주 등장하잖아요. 특히 이 시어는 남성 시인들에 의해 관습적인 방식으로 굉장히 많이 사용되어 왔죠. 이 시어 역시 구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진은영 음, 그랬으니까 많이 사용했겠죠. 나는 딸이 셋이고 막내가 아들인 집의 장녀거든요. 아버지가 3대 독자인데 어머니가 딸 셋을 연달아 낳아 집안에 고부갈등이 많았어요. 그래서 여성이라는 것과 여성의 신체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시 속에서 여성의 신체는 항상 대상화되지 여성의 눈으로 응시하거나 이 신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잖아요. 그래서 그 작업을 시 속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가슴이라는 건 특히 관능성을 갖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남성들에 의해 대상화된 방식으로 많이 쓰이잖아요. 

사진 조아현

저는 여성이 여성의 신체에 대해 아름답게 쓰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기 성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일이 주는 독특성이 있지요.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의 <니일, 젊은 애인의 죽음>이라는 동성 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덟 줄짜리 짧은 시가 있거든요. 앨런 긴즈버그는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이었던 애인이 죽은 이후에,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의 육체의 부분들을 다 호명하는 시를 썼어요. 근육과 탄탄했던 엉덩이 그리고 성기까지 얘기하면서 그 모든 것이 다 잿더미가 되어버렸다고 쓴 시가 있었는데, 저는 그 시가 참 좋았어요. 죽음에 대해 말한 다른 많은 작품들 중에 그 작품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시인이 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이에요. 그 느낌이 너무나 강렬했거든요.

신나리 여성이 여성의 신체의 관능성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서 그런지, 작품 속 말하는 사람의 성별 혹은 섹슈얼리티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요. 시인님께서 작품의 퀴어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그리고 퀴어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도 궁금해요.(웃음)

진은영 그건 전혀 몰랐어요. 앞서 이야기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 때문에 항상 남학생들에 대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떤 종류의 성적인 대립의 감정을 느꼈던 거죠. 성적인 대립의 감정이 존재를 각성하게도 하지만 존재를 부자유하게도 하잖아요. 성차를 확정하고 대립시키는 일의 필요를 알고 있었고 의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흐트러뜨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섹슈얼리티를 모호하게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거죠. 다른 이유로는 역시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죠. 모든 사랑이 긍정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사랑을 얘기하면 남녀의 사랑만 이야기하잖아요, 그 와중에 이성애 아닌 사랑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는 비가시화되고요.

풍경과 감각

신나리 시인님의 작품을 읽으면 뚜렷한 삶의 비극이 보여요. 시인님께서는 왜 삶의 비극과 그로 인한 불행, 슬픔에 마음을 두게 되시는지 궁금해요.

진은영 시인으로 살고 철학을 전공했으니 삶이 그렇게 안정적이고 평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 나는 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요. 그래서 나의 삶 말고 세계에 펼쳐져 있는 다양한 삶의 결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거죠.

신나리 작품에서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느껴져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통감각’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진은영 몽골족들이 유럽에 진출했을 때, 어떤 마을에 가서 사람들을 죽여놓고 널빤지로 덮은 다음, 그 위에서 자기들끼리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실 확인이 안 될뿐더러 유럽인들의 동양인 혐오가 드러나는 이미지죠. 그렇긴 하지만 저는 이 이미지가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에서는 누군가 밑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그 위에서 만찬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끔찍한 풍경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편안한 만찬의 이미지를 상상하곤 해요. 그러면 그 아름다운 이미지 하나를 위해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게 되죠.

신나리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세요. 전에 김행숙 시인을 인터뷰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시인님께 친구들이란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하네요.

진은영 문단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다른 작가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지내지만. 문단의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세계를 일깨워주는 사람들이었어요. 같은 나이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미래파로 묶이긴 하지만, 김행숙 시인의 시세계와 제 시세계는 다른 점이 있잖아요. 김행숙이 보여주는 시적인 세계가 내게 친근해서가 아니라 새로워서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물론 자주 만나는 친한 친구들도 있어요. 그런 친구들은 가족 같은 친구들이에요. 나는 일반적으로 가족에게 얻는 보살핌을 친구들에게 다 받았어요. 저는 20대부터 많이 아팠어요. 급히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엄마, 아버지가 안 달려오면, 혼자 어떻게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그럴 때면 친구들이 응급실에 데려다 주고 옆을 지켰어요. 그 친구들이 없었으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많이 아팠기 때문에 누군가의 배려와 도움이 항상 필요한 상태였는데 친구들이 다정하고 살뜰하게 도와줘서 살았던 것 같아요. 정말 친구들이 소중해요.

의도치 않은 파열 내기

신나리 저는 처음 시인님을 뵈었을 때 정말 짓궂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너무 재밌었어요. 작품 속에서도 시인님 특유의 위트와 시니컬이 느껴져요. 위트와 시니컬을 자랑해주세요.

진은영 저는 작품에서만 좀 위트가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현실에서는 하나도 안 재밌거든요. 제가 유일하게 사람들을 웃길 때는 제가 엄청나게 심각하고 진지할 때에요. 내 유머는 내가 의도할 때는 하나도 발휘가 안 되는데 내가 가장 진지하게 말하는 순간에 사람들을 웃기는구나, 그런 느낌.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죠. 사람들이 웃으니까.(웃음) 

사진 조아현

시니컬한 면이라고 한다면,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무시무시한 얘기를 하는 사람 같아요.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때에도 가만히 있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과격한 얘기를 해서 상황을 얼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어떤 순간에 나도 모르게 의도하지 않은 파열을 내는 바람에 스스로도 곤란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신나리 작품 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시니컬함 혹은 지리멸렬함도 느껴져요. 시인님이 스스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진은영 작은 일을 해도 자부심이 크고 스스로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다소 연극적으로 느껴져요. 혹시 내가 그런 종류의 자기 기만에 빠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들곤 해요. 그런 건 우스꽝스럽잖아요. 과도하게 연극적인 사람들을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때문에, 남들이 좋게 평가해줘도 제 스스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마는 태도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신나리 저는 자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자기를 경계하는 마음의 균형을 맞추기가 무척 어려운 것 같아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다 보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해지지 않나요.

진은영 네, 가혹한 것 같기도 하네요. 예전에 동료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상을 받으면 신나고 기쁘기보다는 ‘아, 내가 너무 엉망은 아니구나’ 이런 안도감이 든다고요. 저도 상 받을 때 그 친구가 말한 것과 비슷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좀 각박한 것 같기도 하지만 좋은 점도 있어요. 다른 사람의 평가에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 거죠. 다른 사람의 칭찬에 반응이 격렬하지 않다는 건 다른 사람의 비난에도 지나치게 심각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는 자기한테 너그럽다고 할 수도 있고요.

신나리 작품 속에서 본인의 시를 ‘어릴 적 소풍 가서 먹다 잊은 복숭아 깡통 넥타’의 맛에 비유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진은영그 구절은 복숭아의 맛이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 요지였죠. 시도 그래요. 한밤중에 깨어나서 읽어보면 굉장히 잘 쓴 것 같은데, 대체로 아침에 일어나서 읽어보면 ‘아, 이것은... 진정한 복숭아 맛이 아니올세’하는 생각이 들죠. 가끔 ‘이 복숭아 넥타 괜찮은 걸’이라고 생각할 때는 독자들이랑 만나거나 독자가 내 시에 대해 자기가 여기서 공감해서 어떤 마음의 느낌을 받았다고 피드백을 줄 때예요. 그럴 때면 이 소풍에 복숭아 넥타를 갖고 오기를 잘했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죠.

이 글은 1월 11일 공개될 <시인 진은영: 아름답고 정치적인 페미니스트(하)>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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