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9.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2 : 김소연과 고통으로 삶의 중심에 다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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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29.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2 : 김소연과 고통으로 삶의 중심에 다가가기

신나리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고백하자면 나는 이 문장을 받아들이고 종이에 쓰기까지 긴 망설임의 시간을 보냈다. 가능하다면 여성과 고통을 멀리에 두고 싶었으니까. 서로 가장 먼 곳에 두 단어가 위치했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나는 여성을 고통과 연관된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 여성을 고통에 종속시키고 여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눌러 앉힐까봐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에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은 여기 두 명의 시인 때문이다. 박서원과 김소연. 두 사람의 목소리는 너무 가슴 아파서 외면하기가 불가능하고, 또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글을 고통을 제외하고 설명하는 일은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써본다. “여성의 고통은 어떻게 시가 되는가.”

박서원을 만난 김소연

젊은 시절 김소연은 박서원을 발견하였다. 김소연은 과거 그의 시집을 읽고 받았던 인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직 20대였던 그 시절의 나는 이 시집에게 크게 힘을 얻어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에 기대로 가득할 수 있었다. 입게 될 상처와 허름해질 육체와 부끄럽게 되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게 될 모든 풍상들에 기대를 잔뜩하고 있었다.”(김소연, 2014) 김소연에게 그는 ‘여성성’이란 세계가 얼마나 강하고 따뜻하고 무한한 아름다움을 가졌는지를 알려 준 시인이었다. 많은 여성주의적 목소리를 내는 시인들 가운데, 김소연은 그의 목소리가 세상에 저항의 몸짓을 보내며 자기 자신에게 역시 저항의 몸짓을 보내는 아주 후련하고 여성다운 것이라고 느꼈다. 김소연이 박서원의 시집이 가진 힘을 표현한 이 문장은, 역으로 젊은 시절의 김소연이 얼마나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를, 그러하기에 밝은 눈으로 박서원을 발견하고 가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소연은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구분하기, 이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세상의 모든 생물체들로 둔갑시키기, 말하기 시작한 것은 거침없이 계속 말하기, 이러한 것들로 종국에는 고통을 흔쾌히 쓰기를 박서원에게서 배웠다. 김소연이 그에게 물려 받은 유산들은, 시인의 시에 녹아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김소연의 시는 침묵 속에서 시가 될 문장들을 길어 올리고, 지옥 같은 세계와 구제불능인 사람들을 끓는 몸으로 써내고, 세상과 자신에게 무자비하고 엄혹한 사유들로 끝까지 달리며, 김소연은 이러한 것들로 바람부는 곳에 앉아 고통을 노래처럼 쓰는 시인이 되었다. 김소연이 박서원에게 발견한 것은 자신이 미래에 써나갈 시였던 것이다.

삶의 저변에서
 삶의 중심으로 

물론 김소연은 박서원과는 명백히 다른 목소리로 엄연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냈다. 앞서 소개한 박서원이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상처받은 개인의 깊고 쓰라린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시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이와 달리 김소연은 폭력적인 세계에서 상처받고 또 상처 주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망가져버린 개인의 삶의 면면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시 세계를 만들어냈다. 또한 박서원이 고통을 드러내는 일을 통해 세계와 개인을 파멸로 몰아붙였다면, 김소연은 고통을 드러내는 일을 통해 삶과 살아있음의 감각을 입증해내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박서원의 시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때, 김소연의 시는 상처받은 개인을 둘러 싼 삶의 저변들을 그려내며 삶의 중심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세계, 사람, 그리고 세계와 나와 사람들이 뒤섞인 시간을 그려내면서 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시집 『i에게』에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이 세계와 그로부터 고통받으면서도 삶을 지속해 나가는 징그러울 정도로 억척스러운 자신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응시해온 i가 등장한다. i는 나쁜 생각을 일삼지만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부추로 부추전을 해먹느라 결국 나쁜 짓은 못하고 마는 일상을 지낸다.(「경배」) 또 i는 내게 소중하지 않고 나보다 약한 것들에 상처를 내며 살아가다가, 문득 상처주고 상처받는 가운데 자신이 돌이킬 수 없이 이미 망가져 버렸음을 깨닫기도 한다.(「손아귀」) 그리고 i는 또다른 i에게 묻기도 한다. 우리 사이에 분명히 존재하는 악의와 죄가, 나를 죽은 채로 미쳐가는 나무처럼 만들고 너를 웅크린 채로 엉엉 우는 돌처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i에게」) 그리고 i는 나는 스스로와 서먹하게 지내고, 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고, 늘 사는 게 무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또 다른 i에게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i에게」)

위로도 구원도 아닌
고백을

나는 여성들이 고통에 골몰하거나 고통을 중심으로 자신을 정체화 하거나, 고통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너무 어렵고 아프고 또 우리를 손쉽게 죽음으로 내몬다. 그러나 골몰하지 않거나, 그것으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거나, 쓰거나 표현하지 않는다해도 언제나 고통이 있다는 것, 이 세계에서 여성이 고통받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 자신이 경험한 진실을 고백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 고백이 자신의 삶을 덜 행복하게 만들지라도 말이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김소연을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김소연은 문학과 고통을 중첩시키는 가운데, 죽음으로 달려가기보다 삶과 뒤섞이며 자신의 존재 그리고 이 세계에서의 여성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아주 귀중한 시인이기 때문이다. 아니, 김소연이 박서원을 발견하였듯, 자기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자신의 고통을 중심으로 삶의 저변을 탐색해온 사람이라면 김소연을 발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통과 상처로부터 자신의 서사를 구성해온 사람, 덕분에 늘 조금은 울적하고 억울한 얼굴을 하게 되는 사람, 입을 열면 하소연을 하고 마음을 드러내면 한스러움이 묻어나오는 것이 지긋지긋하지만 결국은 진실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겠다.

그리고 자신을 발견해준 사람들에게 김소연은 그 어떤 위로나 구원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망가진 채로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망가진 채로 쓰는 것이 이렇게까지 구차하다는 이야기를 숨김 없이 해줄 것이다. 또한 망가진 자신을 드러내면서까지 이 세계에 자신을 심고자 하는 사람들의 멋쩍은 삶의 욕망에 대하여, 아주 가끔은 강하고 아름다워도 보이는 이 집념에 대해서 고백해줄 것이다. 애저녁에 이 세계의 원리를 모두 알아버린 사람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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