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불꽃>은 사바 타히르의 데뷔작으로 발간되자 마자 뉴욕 타임스, 아마존 등에서 베스트 셀러로 등극하며 평론가와 대중 모두에게 뜨거운 호응을 끌어낸 작품이다. 한국인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진, 이프리트 등의 이슬람 설화를 기반으로 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작품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판타지 세계관은 낯선 만큼 매혹적이다. 이미 영화화까지 진행 중으로, 한국에는 2019년 문학수첩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마셜 제국의 피지배층 스칼라인 라이아는 제국의 정예군인 마스크의 습격을 받아 조부모를 잃고 오빠 다린이 체포되는 현장을 가까스로 도망쳐나온다. 라이아는 혼자서만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다린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저항군에 찾아간다. 라이라는 다린을 구해주는 대신 첩자 임무를 수행하기로 약속하고 마스크를 양성하는 블랙클리프의 총사령관의 노예로 잠입한다. 한편 총사령관의 아들 일라이어스는 제국의 부조리함과 잔인함에 환멸을 느껴 탈영을 계획 중이지만 사람의 생각을 읽고 예언을 행하는 복점관 케인에게 꼬여 탈영은 커녕 제국의 차기 황제를 뽑는 트라이얼에 나가게 된다. 일라이어스는 곤경에 처한 라이아를 우연히 몇번이나 구해주고 둘 사이에는 적을 향한 증오 외에 다른 감정이 싹튼다. 저항군이 자신을 기만한 것을 깨달은 라이아는 그들이 정해준 길을 버리고 일라이어스와 함께 다린을 구하러 떠난다.
영혼을 자극하는 죄책감
죄책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작중 마셜 제국 최고의 대장장이 텔루만은 말했다. “깊은 늪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드는 죄책감”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도록 영혼을 자극하는 죄책감”이 있다고. 라이아는 이야기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전자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후자인 죄책감이다.
라이아의 첫번째 죄책감은 오빠 다린이다. 라이아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라고 외치던 다린이 마스크에게 붙잡혀 가면서 내지른, 비명에 가까운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다린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다린은 자신을 위해 희생했는데 자신은 다린을 버렸다는 죄책감, 무참히 죽고말 것이 분명한 다린을 두고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쳤다는 수치심이다. 쇠약해진 할머니와 할아버지조차 자신보다 용감히 무자비한 마스크에게 맞섰는데 어리다고는 하나 건강한 육체를 가진 자신이 한 일이라곤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다 살 기회를 좇아 몸을 빼고 달아난 것 밖에 없다는 부끄러움이다. 라이아의 죄책감은 마음 속에서 다린의 목소리를 빌려 라이아의 모든 행보를 따라다닌다. 다린을 구해야 한다고, 더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속삭인다. 라이아는 그것이 떳떳지 못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형벌이라고 생각한다. 라이아에게 라이아 자신은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을 만큼 초라하다.
다린, 미라, 이지, 일라이어스,
그리고 변화하는 라이아
두번째 죄책감은 뛰어난 저항군 지도자였던 어머니 미라에 대한 죄책감이다. 암사자라고 불리며 무수한 공적을 세우고 저항군의 역사를 새로 쓰다시피한 어머니의 결기와 용기를 라이아에게도 당연히 기대하는 저항군에게 라이아는 전혀 그렇지 못한 자신이 그들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롭다. 자신은 어머니와 같은 기지도 무예도 없고 아버지처럼 포용력이나 인망이 있지도 못하며 일찍이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저항군 활동을 했던 언니 리지처럼 강단있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다린과 같은 영민함과 침착함도 없다. 라이아는 스스로를 겁이 많은 만큼 비열하고 무능하기까지한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라이아는 자신이 암사자의 딸로 여겨지는 것이 불편하고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놓인 것처럼 불안하다. 정의를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치다 죽은 부모님을 볼 낯이 없다는 생각에 마냥 괴롭기만 하다. 자신은 불의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을 뿐더러 소중한 다린의 목숨을 내팽개치기까지 했으니까.
라이아를 옭아매는 세번째 죄책감은 잠입한 총사령관 사택의 또다른 노예인 이지이다. 라이아는 저항군의 첩자인 자신과 엮이면 이지의 안전은 물론이거니와 목숨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최대한 이지와 거리를 두고 이지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모두 거절하려 한다. 하지만 이지 또한 알고 있다. 라이아가 들키면 이러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곱게 죽을 수 없다는 것을.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지는 라이아를 힘껏 돕는다. 이지에게 라이아는 처음 만난 친구에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다가, 라이아가 하려는 일이 옳은 일이기 떄문이다. 이지는 그리 오래 알지도 않은 라이아를 위해 그렇잖아도 살얼음판 같은 자신의 안위를 건다. 다린이 그랬듯이, 라이아를 위해 희생한다. 이지의 희생은 라이아에게 다린이나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는 달리 일종의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지에게 느끼는 죄책감으로 인해 라이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라이아의 마지막 죄책감은 일라이어스다. 마주칠 때마다 번번이 도움을 주던 일라이어스는 급기야 라이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 일라이어스가 죽음을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건 라이아는 죽을 것이 분명했기에 정당화하려면 충분히 정당화하여 자신이 살 길을 고를 수 있었는데도 일라이어스는 라이아를 삶의 제물로 삼지 않았다. 앞서 다린과 이지처럼 일라이어스는 라이아를 위해 희생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일라이어스를 향한 죄책감은 이제, 라이아를 각성하게 한다. 라이아는 그토록 부끄러워하고 스스로의 비겁함에 몸부림치던 시간들이 그저 괴로워하는 데에만 쓰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라이아는 다린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이지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지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아왔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라이아는 더이상 무력함에 사로잡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고, 나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줄 누군가”, “나를 구해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죄책감에서 솟아오른 것
키넌이 성심으로 챙겨준 삶의 기회를 기꺼이 이지를 살리는 데 쓰고, 자신으로 인해 죽음에 처하게 된 일라이어스의 처형장으로 뛰어들어 그를 구하고, 적이었던 그에 대한 불신을 넘어 다린을 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굳게 청하면서, 라이아는 명실상부한 암사자의 딸이, 미래를 발설하는 복점관 케인의 말처럼 “힘과 원기로 가득한” 사람이 된다. 라이아는 죄책감으로 말미암아 희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되었고, 그런 라이아는 죄책감의 재에서 솟아오른 불꽃이다. 작품의 끝에서 라이아는 이제 막 다린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날 뿐이지만 그는 기필코 다린을 구해낼 것이다. 깊은 늪과 같은 끔찍한 죄책감에서 능히 자신을 구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