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역할을 해내는 다수의 여성들이 나오는 여성 서사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아메리카노 엑소더스>는 단비 같은 작품이다. 주인공 아멜은 비록 남자이지만, 그 외 비중이 조금이라도 있는 등장인물은 모두 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만화의 의미있는 서사는 모두 여자들이 이끈다. 박지은은 군더더기 없는 작화와 능수능란한 연출로 판타지 마법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매끄럽게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2014년부터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기 시작하여 2019년 196화로 완결되었다.
줄거리
천재지변이 없는 낙원 같은 땅을 약속하는 대신 마력을 세금으로 걷어가는 영지나무가 지배하는 세계의 마법사 아멜은 피치 못하게 여장을 하고 활동하지만 사실은 남자이다. 40여년 전 탈주한 황혼새벽회 때문에 영토를 유지하는 마력의 균형이 깨지자 마력이 강한 영주 가문들은 거름 회수단을 꾸려 그들을 추적한다. 아멜은 남자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회수단의 동료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를 고수한다. 어머니대의 원한과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업보로 아멜은 거름 회수단의 동료들과 반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계속해서 전 리더인 로네의 직간접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아멜과 동료들은 단순히 귀족들을 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황혼새벽회의 목표가 사실은 영지나무를 죽이는 것이고, 심지어 아멜의 어머니 에스프레소가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전과는 달리 서로 동지애가 생긴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협공에 나선다.
목표이자 족쇄, 엄마
사로잡힌 악몽이 있는가? 몇년에 걸쳐 늘 똑같은 곳 똑같은 사람 똑같은 내용으로 괴롭히는 묵은 악몽 말이다. 악몽이 무슨 말을 하는가? 로네의 악몽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복수해달라고 말한다.
로네 펠트너는 거름 회수단이었던 현역 시절 주인공 아멜의 어머니인 평민 출신 에스프레소에게 무참히 패한 것에 대해 몸과 마음에 큰 상흔을 가지고 있는 귀족 영주 요한나의 딸이다. 요한나는 딸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여 자기의 바람과 못다한 숙원을 대신 이뤄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어머니이다.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낳은 딸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이나 갖지 못한 것이 있으면 딸이 그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하며, 그러한 성취가 곧 딸의 행복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못다한 한을 대신 풀어줘야 하는 데에 딸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딸을 별개의 인간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딸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점을 지적하면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매정하게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 적반하장으로 언성을 높이는 경우도 많다. 그 점에서 작품 전체의 최상급 악역인 에스프레소는 자식인 아멜이 자신에게 한낱 수단에 불과했음을 선뜻 인정하는 산뜻함이라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요한나는 로네를 오직 자신을 위해 사정없이 로네를 몰아붙이고 그것이 잘못인 줄도 깨닫지 못한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요한나는 로네의 목표이자 족쇄가 된다.
철이 들 무렵부터 침대에 누운 어머니가 복수해달라고 말하는 똑같은 꿈에 줄곧 시달린 로네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복수를 종용받고 계획하는 상황에 지쳐 있다. 로네가 리더 자리를 두고 아멜과 벌였던 결투에서 굴욕적으로 패한 것을 자꾸만 곱씹으며 아멜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도 스스로의 설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복수를 강요하는 어머니의 의지를 자신에게도 불어넣으려 분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은퇴를 앞둔 아멜이 은근히 건넨 화해가 진심이라면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뜻을 내비치는 부분에서 로네는 앵무새처럼 복수를 부르짖는 어머니와 달리 당한 것을 되갚아주는 데에 큰 열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아멜의 독수리를 죽이려 하고, 아멜의 위치를 빼돌려 위험에 빠뜨리는 등 뒷공작을 폈던 것과 별개로 로네에게는 아멜과 아멜의 가문에 복수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 삶의 전부가 아니야
로네의 삶을 관통하는 목표가 복수나 어머니의 인정이 아니라는 것은 마지막 정면돌파의 수로 둔 아멜과의 결투에서 패하자, “결국 난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실패 뿐인 인생”이라며 자책하면서도 망설임 없이 다음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어머니의 복수에도 자신의 설욕에도 실패하여 타의든 자의든 스스로를 이끌었던 목표를 모두 잃어버렸을 것 같은 로네를 움직이는 것은 복수해달라며 세뇌한 어머니도, 복수의 대상으로 쭉 증오했던 아멜도 아니다. 로네가 바라보는 것은 내내 같이 있어주었던 친구, 딜마다.
딜마를 위한 로네의 다음 행보는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투에서 패배한 후 실의에 빠져 되는대로 잡은 얄팍한 목표가 아니다. 애초 결투를 계획할 시점에서 로네는 결투에서 지면 영지나무의 영토를 떠나 황혼새벽회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각종 병에 걸려 죽어가는 딜마가 영지나무의 영토 바깥에서는 살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영주의 딸이자 거름 회수단의 일원에서 황혼새벽회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한 탈주가 아니라 가문 전체를 몰락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일임에도 로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긋 웃으며 떠난다. 아멜에게 일격을 날리며 외쳤던 “망할 할망구, 노망난 노친네, 네 뜻대로 사는 건 여기까지”라는 말처럼, 결투의 결과가 어떻든 로네는 그 결투로 오랫동안 자신을 옭아매왔던 어머니를 떨쳐내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로네에게 딜마는 이제껏 묶여있던, 복수라는 짐이 치워지고 나면 가장 먼저 뛰어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오래 살 생각이 없다는 딜마에게 그렇다면 나를 위해 살아달라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고 말하는 로네는 벗어날 수 없는 “거지 같은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딜마에게서는 벗어날 생각은 손톱 만큼도 없었고 이후 재앙 같은 상황에 맞닥뜨려 “마법을 못 쓰니까, 지위를 버리니까, 아무 쓸모없는 인간 하나만 남았다”며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는 순간에도 마음 속에서 딜마를 잡고 있었다. 로네에게 딜마는 악몽을 깨뜨리는 단 하나의 지지대였던 셈이다.
요한나는 로네를 내몰았다. 딜마는 언제나 로네의 옆을 지켰다. 로네는 요한나도 딜마도 최선을 다해 찾아갔지만 로네에게 한결같이 마음과 곁을 내준 것은 딜마였다. 딜마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요한나는 망가진 딸일망정 기어코 해낸 복수를 즐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폭주하는 딸에게 직접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로네가 악몽에서 깨기 위해 무엇을 골랐을지 요한나는 결코 알 수 없다. 딸은 어머니가 아니다. 어머니가 없어도 딸에게는 자기 자신이 있다. 로네에게 딜마라는 친구가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