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의 꽃은 불복종: 오온

알다여성 주인공

공정의 꽃은 불복종: 오온

꽈리

사소한 칼, 사소한 자비로 이어지는 라드츠 시리즈의 문을 연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는 작품의 재미나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형식 면에서 크게 주목받은 소설이다. 성별을 구분하여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모두 ‘she'로 통일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모든 인물을 여성형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만으로 기존의 독서 경험이 얼마나 읽는 이의 상상을 제한하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재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2016년 아작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거듭되는 행성 병합을 통해 성장한 라드츠 제국의 마지막 병합지인 쉬스우르나 행성 올스에 파견된 저스티스 토렌 호의 대위 오온은 우연히 발견된 금지된 총기가 윗선의 개입으로 인한 것임을 직감한다. 때마침 올스를 방문한 라드츠의 군주 아난더 미아나이의 여러 몸 중 하나에게 해당 건을 직접 보고하지만 아난더 미아나이는 오온의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을 몰살하라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만을 내린다. 오온이 저스티스 토렌 호로 돌아온 뒤 함선을 방문한 또다른 아난더 미아나이들은 위험분자라며 저스티스 토렌의 인공지능에게 오온을 사살하게 한다. 사랑하는 오온을 제 손으로 살해한 함선의 인공지능은 패닉에 빠져 명령을 내린 아난더 미아나이를 쏘아버린다. 함선에 있던 다른 미아나이들은 자신이 함선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저스티스 토렌을 자폭시키고, 폭파 직전에 빠져나온 인공지능의 몸 중 하나가 아난더 미아나이에게 복수하고자 브렉이라는 이름으로 20년에 걸쳐 기회를 노리다 실행에 돌입한다.

정의를 믿고
원칙을 실천하는 사람

상관의 부당한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명령 불복종은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저항이자 동시에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명백하다는 점에서 아주 용감한 저항의 형태다. 모든 저항이 이제껏 다져온 사회적 기반, 앞으로의 생계, 심각한 경우 목숨까지 담보로 삼기 마련이지만 현재 몸담고 있는 조직에 저항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그 조직이 내세우는 기치에 공감하고 옳을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다.

오온은 빈한한 가문 출신의 장교로 가문의 영향력이 큰 라드츠 제국으로서는 이례적인 인물이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적성검사에서 유력 가문 출신이 아닌 딸들은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온의 출신을 탐탁지 않아하는 동료들에게 명문가 출신 스카이아트와 친밀한 관계라는 사실은 연줄을 대려는 지저분한 수로 여겨지고, 병합지 올스에서 행성 토착민들 사이의 경제적 계층을 차별하지 않고 공정하게 진행한 각종 행정처리는 융통성 없고 이해력이 부족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공평함은 올스의 대사제나 저스티스 토렌에게 존경심을 자아내지만 대부분의 라드츠 장교들에게는 오온을 적대할 또다른 단초를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오온이 적극적으로 차별에 대항하거나 드러내놓고 배척하는 분위기에 맞서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평가가 어떻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을만큼 무심하고 둔감한 인물도 아니다. 오온은 다만 계층으로 나뉘는 권력차에 대해 전적으로 수긍하지는 않으며 라드츠 제국이 공식적으로 내세우는 공정한 정의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는다. 병합 과정에서의 살육은 피치 못할 것이라고 해도 라드츠인이 되는 순간 시민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원칙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실천한다. 그리하여 그 원칙에 반하는 명령을 들었을 때 명령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의를 제기한다.

불복종의 불씨 

또한 오온은 처음으로 온당치 못한 명령을 수행한 자신을 합리화하여 그 후에 또다시 맞닥뜨리는 옳지 못한 지시에 저항한다. 즉각 나서서 반대하지는 못하더라도 한 번을 두 번으로 만들지 않는다. 두번째 기로에서 오온은 기꺼이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허망하게도 무언가 이루어내기도 전에, 변화를 만들기도 전에 하늘 같은 라드츠 군주에게 이의의 운을 떼다 살해당한다. 그래서 오온은 헛되이 죽었는가? 오온의 작은 불복종은 저스티스 토렌의 불복종이라는 후폭풍을 낳는다. 저스티스 토렌은 아난더 미아나이의 몸 하나를 죽이는 것에서 시작하여 제국을 양분시킬 거대한 태풍의 씨앗이 된다. 오온에게, 혹은 저스티스 토렌에게 그럴 생각이 있었건 없었건 오온의 유지는 저스티스 토렌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어쩌면 오온은 저스티스 토렌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수행한 제국 분열이라는 결과까지는 감당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온은 계층적 특권은 갖지 못했더라도 라드츠의 가치관을 내재화한 사람이고, 이미 기득권인 대위였으며 아난더 미아나이를 절대자로 숭배하는 것이 체화된 라드츠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오온은 하늘 같은 군주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난 본능적인 반발을 감지하고, 그간 수호해왔다고 믿은 가치에 반한다는 순간적인 깨달음을 놓치지 않았다. 권력의 힘 앞에서 부조리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디지 않았다는 것이 오온의 패착이자 특기할만한 미덕일 것이다. 오온이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면, 폭파되는 저스티스 토렌 호를 무사히 빠져나갔더라면, 오온은 아마도 저스티스 토렌이 복수심에 불타 무시했던 부정의 요소들을 한층 면밀히 따져보았을 것이고, 저스티스 토렌보다 분명한 도덕적 의무감을 가지고 아난더 미아나이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편한 답을 거부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부조리 앞에서 한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여자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나만 침묵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을 숱하게 보았을 것이다. 오온을 고결하게 만드는 것은 한번 타협한 자신을 정당화하여 무마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민하며 던지는 의문들이다. 그것이 정말로 합당한지,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했는지, 이 사태에서 이득을 보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는 척 침묵하기를 강요받는 쪽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옳은지. 오온은 거듭 의문을 던진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가장 편한 답안을 집어들지 않는다.

오온은 원칙주의자이고, 원칙 이전에 그것이 세우고자 했던 기본 가치를 따르는 자이다.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명령을 따른다는 원칙에 우선하는 가치를 지키겠다는 표명이다. 공정함의 가치를 내세운 것은 라드츠 제국이지만 그것을 믿고 직진한 자는 오온이었다. 오온이 믿은 것은 라드츠 제국이 아니라 공정함이라는 정의다. 오온이라는 사소한 공정함을 거쳐 라드츠 제국은 분열을 맞는다. 작은 개인의 가치 수호는 커다란 해일로 퍼진다. 사소하지 않은 불복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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