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이후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작품들은 모두 <진주 귀고리 소녀>와 비교당하기 마련이지만, 2014년 아르테에서 나온 <라스트 런어웨이>는 그보다도 데뷔작 <버진 블루>가 떠오르는 작품이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이 도망나와 도착했다고 생각한 곳에서 또다시 도망쳐야 하는 과정을 그리고 거기엔 사회가 약자에게 가하는 억압이, 그 억압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주인공의 신념이 있다.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없이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아 애쓰는 여자 주인공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소설을 관통하는 테마다.
줄거리
영국인 아너 브라이트는 약혼자와 결혼하기 위해 미국 오하이오 주로 가는 언니와 대서양을 건넌다. 극심한 뱃멀미로 아너는 두번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도착한지 며칠 만에 언니를 병으로 잃는다. 형부가 될 예정이었던 콕스가 죽은 형의 부인과 결혼하자 아너는 정착을 위해 잭 헤이메이커와 결혼한다. 아너는 몰래 도망 노예들을 돕다 집안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혀 마찰을 빚는다. 결국 그는 임신 중인 몸으로 도망쳐나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한동안 머물며 보살펴준 사람이자 지하철도의 역장인 벨 밀즈의 모자가게에서 해산하고 머문다. 아너를 위해 벨의 가게를 방문한 또다른 역장인 리드 부인을 노예사냥꾼 도너번이 도망 노예라며 잡아가려 하자 벨은 도너번을 사살한다. 아너는 그곳에 머물며 신념에 반해 눈을 감는 대신 새로운 방법을 찾아 딸과 잭과 함께 서부로 떠난다.
여성이 신념을 가진다는 것
아너 브라이트는 퀘이커 교도로, 사람이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노예가 없던 영국에서야 추상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신념이 미국에 다다라 실제로 노예제가 산업과 경제와 제도에 얽혀 있는 현실과 맞닥뜨리자 아너는 그것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한다. 신념과 현실이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이 신념을 가지고 살기 위해선 대부분 싸워야 하고 대개 목숨 혹은 그에 비등한 무언가를 걸어야 한다. 세상과 역사 전체와 맞붙어야 하는데, 있는 것이라곤 자신 하나 뿐일 때도 많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은 어떨까? 도망치는 것으로도 무언가 지킬 수 있을까? 용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잠자코 감내하지 않고 자리를 떠버리는 것은 그에 동조할 수 없다는 단호한 표현일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의 자리를 없애는 어리석은 회피일까.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래의 형부가 될 뻔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된 콕스의 집에서 헤이메이커 집안으로, 지난 트라우마와 위법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유로 사람을 돕지 않으려는 시가에서 분명한 연대자인 벨 밀스의 모자가게로, 아너는 도착지라고 여겼던 곳에서 거듭 도망친다. 자기 자신이 있을 곳을 잃어버렸다는 느낌 때문에 영국에서 도망친 아너는 닿는 곳마다 어떻게든 그곳에 뿌리내리려고 한다. 자기 자리를 만나 땅에 발을 딛기를 원한다. 자신의 꼼꼼한 퀼트처럼 꼭 붙들어주는 자리를 찾고자한다. 그러나 그런 아너가 가는 곳마다 번번이 도망쳐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신념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서 아너의 신념은 비웃음만을 산다. 아너가 지키려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의 이상론일 따름이라고 치부된다. 도망 노예를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은 볼 수 없다. 노골적으로 아너에게 관심을 표하는 도너번이나 퀘이커 교도로서의 윤리보다 안전을 확보하는데 급급한 헤이메이커 가 사람들에게 아너의 신념은 시간이 지나 미국에 적응하게 되면 너 또한 이해하게 될 것을 모르고 섣불리 늘어놓는 허울 좋은 생각일 따름이다.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그렇듯 아너의 신념은 주변과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것으로 못된 버릇처럼 모두를 위해 곧 그만두어야 할 뜬구름잡는 소리 취급을 받는다.
최대한의 저항
그럼에도 아너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현실이 강요한다고 해서 가뿐히 귀를 막고 없는 셈 치지 않았다. 어려움을 부당함 앞에서 방패 삼아 안주하지 않았다. 아무 입장도 없는 콕스, 억압 그 자체가 화한 도너번, 방관만을 종용하는 잭과 같은 남자들처럼 비겁하게 등돌리지 않았다. 쉽고 안전하게 신념을 내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바를, 옳은 바를 실천해내기에는 아너가 할 수 있는 것도 가진 것도 너무 적었지만 아너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너는 노예제를 없앨 수도 도망 노예를 모두 구할 수도 없었지만 할 수 있는 한 굴복하지 않았다. 그 끝에서 도망치는 것은 아너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소중한 이불도 반짇고리도 전부 두고 헤이메이커 가에서 도망칠 때 아너는 단순한 도망자에서 신념을 지키려는 실천가로 거듭난다. “도망치는 것과 달려 나가는 것의 차이”를 아너는 그 뒤에야 배워가게 되지만 헤이메이커 가 사람들처럼 부당함에 눈을 감고는 살 수 없다고 떠나온 데서 이미 아너는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도망 노예로 스쳤던 버지니와 재회하여 함께 도망치는 밤은 끝없이 자기 자리를 찾아 정처 없이 방랑하던 삶이 의미를 갖는 순간이고, 허공에 붕 뜬듯 부유하던 아너가 방황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개척에 나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저 발 붙일 자리만을 찾아 달아나는 데 바빴던 와중에도 쓸려보내지 않았던 신념이 키워낸 결실이다.
그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도운 것은 벨 밀즈와 리드 부인으로 이어져있는 여성연대이다. 십여년 간 같은 지역에서 살며 지하철도의 부분이었던 두 사람은 아너를 위해 리드 부인이 벨의 가게에 와서야 겨우 처음 만난다. 거의 반대랄만큼 다른 이력의 두 여자 사이에서 아너는 역시 둘과는 다른 과거사를 쌓아온 사람임에도 “퀼트가 제자리에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도망치기 바빴던 아너가 마침내 같은 신념을 갖고 지키는 여자들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편안함을 얻은 것이다. 벨은 자칫 좌절로만 끝날 수 있었던 아너의 도망을 지켜준 사람이고, 리드 부인은 아너의 도망이 뚜렷한 달려 나감이 되도록 숨통을 틔워준 사람이다. 두 여자의 도움으로 아너는 더이상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신념을 지켜나갈 용기를 얻는다. 아너의 신념은 벨과 리드 부인의 신념을 지치지 않게 하고, 벨과 리드 부인의 신념은 아너의 신념이 사라지지 않게 할 것이다.
여성이 신념을 가지고 살기 위해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키는 것이다. 아너는 지켰다. 아너와 벨과 리드 부인의 도움으로 도망친 버지니도 지킬 것이다. 여자의 신념은 그렇게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