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더, 다시: 레이첼 왓슨

알다여성 주인공

다시, 한번 더, 다시: 레이첼 왓슨

꽈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근 몇년 들어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이 많아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작품의 대표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널리 알려진 책이다. 알콜중독자 남성이 아니라 알콜중독자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귀중한 이유 중 하나다.

줄거리

알콜중독자 레이첼은 친구 캐시의 집에 얹혀 살며 실직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일 통근열차를 탄다. 전남편 톰은 이혼하기 전부터 만나던 애나와 결혼해 딸까지 있지만 레이첼은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기차가 예전에 살던 집을 지날 때면 몇 집 건너 이웃인 메건과 스콧의 집을 바라보며 알지도 못하는 그들을 행복한 부부라고 멋대로 상상하며 동경한다. 메건이 스콧이 아닌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레이첼이 목격한 다음날 메건이 실종된다. 공교롭게도 메건이 실종되던 밤 레이첼은 술에 취해 톰을 찾아갔다가 심하게 다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레이첼은 메건의 외도를 제보하며 실종 사건에 점점 개입한다. 메건의 시신이 발견된 뒤에도 여전히 사건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레이첼은 알콜중독 증세라고 여겼던 것들이 전부 톰의 거짓말이고, 메건의 외도 상대이자 살해범이 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레이첼은 애나를 찾아가 톰에게서 벗어나자며 청하고 때마침 도착한 톰은 두 여자를 위협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레이첼과 애나는 서로를 도와 톰을 없앤다.

바닥

레이첼은 인생의 밑바닥에 있다. 바닥을 딛고서야 위로 올라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바닥에 닿아도 박차고 올라갈 힘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힘이 빠진 다리로 수도 없이 바닥을 차며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발버둥치면 언젠가 수면에 다다를지 손 하나 까딱할 기운마저 소진하고 묻혀버릴지는 모르는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밑바닥이 무너져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수도 있다. 레이첼은 몇 개의 바닥에서 재차 떨어졌다. 번번이 절망했다. 매번 다시 허우적댔고 결국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레이첼은 하락 곡선에서 자신을 상승궤도로 돌려 놓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첼은 직장에서 잘렸고, 남편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갈라섰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고, 우울증에 걸린데다 지독한 알콜중독을 앓고 있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통제력을 잃고 폭력적인 행동까지 한다고 한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을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살고 있는 집은 순전히 친구 캐시의 호의로 얻게 된 것이지만 언제든 캐시가 더이상 친절을 베풀지 않기로 하면 갈 곳이 없어지는 처지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매일매일 갈 곳도 없이 통근열차를 타고 오가면서 레이첼이 하는 것이라고는 술을 마시는 것과 자책하는 것 뿐이다. 레이첼은 끝없이 과거만을 회상하며 과거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톰과 행복했던 시간만을 상기하고 톰에게 집착적으로 군다. 레이첼은 현재를 받아들일 마음도 없고 상황을 개선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레이첼을 동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레이첼이 지긋지긋하다. 레이첼은 무책임하고 한심하고 나약하고 게으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레이첼은 그렇게 생각한다.

과음하고 불쾌한 기분으로 깨어나며 레이첼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은 평소와 달리 건강에 좋은, 균형잡힌 식사를 해볼 생각을 한다. 톰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력서를 써볼 생각을 하고, 남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는, 쓸모있는 일을 해볼 생각을 한다. 그리고 실패하고 자책한다. 자학하며 술을 마시고 하지 말아야 했을 일들로 얼마쯤 또 삶을 망가뜨리고 나면 레이첼은 다시 결심한다. 술을 마시지 않고, 톰에게 연락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돌보자고. 레이첼은 또 실패하고, 또 자책하고, 또 시도한다. 마음을 다잡고, 시작하고, 실패하고, 자책하고. 늘 새로이 결심할 때마다 캐시를 붙잡고 이제 정말 달라질 거야, 새로 마음을 먹었어, 공표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레이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레이첼이 얼마나 끝없이 실패하면서도 다시 끝없이 시도하는지 레이첼만이 안다. 스스로에게 온갖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스스로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레이첼만이 안다.

나는 나를 놓지 않는다

이것이 기존의 남성 알콜중독자 주인공들과 레이첼이 다른 점이다. 레이첼은 더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결심하고 시도한다. 숱하게 실패해도 결코 놓지 않는다. 못된 습관을 끊지 못하는 남자들은 더 나아지기로 결심할 때마다 주변인에게 거하게 떠들어댄다. 자기가 이번에야말로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얼마나 몰라보게 달라질 것인지, 앞으로 깜짝 놀랄 것이라는 둥 마치 신탁을 내리는 것처럼 큰소리를 친다. 그렇게 새로 먹은 마음가짐을 떠벌리는 것으로 자신이 이제껏 해왔던 행동이 아니라 앞으로 바뀔 바람직한 모습에 걸맞는 대우를 바란다. 가족과 친구들이 자신을 기특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떠받들기를 원한다. 스스로 변하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 주변인에게 내리는 축복인 것인양 의기양양해 한다. 그리고 실패하면? 화를 낸다. 실패한 자신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실패한 횟수만큼 훈장이 되어 이 내가 그렇게나 달라지려고 시도했다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을 무기로 휘두른다. 시도했다는 사실은 더이상 시도할 이유가 없는 최고의 근거가 된다.

레이첼은 아니었다. 레이첼은 결과만을, 달라지지 못한 자신에 절망하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달라질 모습만을 생각했다. 레이첼은 자신의 문제가 자신의 것임을 알았다. 타인에게 알아달라 인정해달라 요구하지 않았다. 레이첼이 원한 것은 달라진 자신에게 돌아올 달라진 대우가 아니라 달라진 자신 자체였다. 그리고 레이첼이 되고 싶었던 달라진 자신은 과거의 자신, 우울증과 알콜중독과 톰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이 있기 전의 자신이기도 했다. 결국 레이첼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레이첼은 자신이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취급이나 받을 사람이 아니라며 자아를 바깥에 떠넘기는 숱한 밑바닥의 남자들과는 달리, 레이첼은 밑바닥을 헤매면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지 않았다. 수도 없이 자신이고자 했다.

수렁에서 기어나온 레이첼은 과거의 미움을 제쳐두고 남편의 외도 상대였던 이의 안전을 염려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톰이 아무리 망가뜨리고 왜곡해왔어도 그것이 레이첼의 본질이다. 레이첼은 끈질기게 덤벼들어 본래의 자신을 되찾았다. 수없이 자기 자신이고자 한 여자, 어떤 최악의 상황에도 스스로인 여자, 그게 레이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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