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출신 소설가인 제인 하퍼의 <드라이: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은 2015년 출간 전부터 빅토리아 프리미어 문학상 수상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작가가 2011년 커티스 브라운에서 진행하는 문예창작 프로그램에 지원하며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한 후 첫 작품인 이 소설은 전 세계 26개국 판권 계약했다. 2017년 출간과 동시에 아마존UK, 뉴욕타임스 등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고, ABIA 문학상 수상, 인디북 문학상 수상 등에 이어 영국 CWA 골드 대거 상에도 노미네이트 되었다. 한국에는 2017년 알에이치코리아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강에서 죽은 채 발견된 엘리 디컨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핍박을 받은 끝에 에런 포크는 쫓겨나듯 아버지와 고향을 떠난다. 20년 후 그 당시 함께 어울리던 친구 루크가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에 장례식에 참석하러 고향에 돌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은 그대로다. 루크의 결백을 믿고 싶은 루크의 부모는 금융수사관인 에런에게 루크가 정말로 가족들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이 맞는지 조사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애런은 과거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루크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응낙하여 마을의 담당 경찰인 라크와 함께 진실을 좇는다. 에런은 루크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이 20년 전 엘리가 죽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막연한 예감에 시달리는 와중 엘리의 아버지와 사촌에게서까지 의심받으며 사적 테러를 당한다. 에런과 라크가 사건을 파헤치기를 거의 포기할 무렵, 에런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실마리를 발견한다.
여자아이의 죽음
여기 안타까운 죽음이 있다. 횡령을 눈치챘다는 이유로 입막음을 위해 살해당한 여자,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바람에 역시 입막음을 위해 살해당한 어린이, 범인을 은폐하기 위해 가족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울 목적으로 살해당한 남자. 그리고 여기 또 하나, 안타까운 죽음이 있다. 학대와 폭력을 피해 떠날 계획을 짜다 들키는 바람에 살해당한 여자아이. 앞서의 일가족들과는 달리 죽음의 진실도 알려지지 못한 여자아이의 죽음이 있다. 엘리 디컨이다.
엘리는 주인공 에런과 풋풋한 첫사랑에 빠질 무렵에 살해당했다. 엘리는 꿈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고 희망 또한 있었으며 그들을 한데 묶어 끌고 나갈 힘도 있었다. 상처만을 준 집을 떠나기 위해 엘리는 돈을 모았고 계획을 세웠고 실천했으며 경솔하게 떠벌이지도 않았다. 엘리는 치밀했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따졌다. 착실하게 준비했으며 차근차근 떠날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엘리는 응당 새로운 미래를, 폭력과 억압이 없는 곳에서의 출발을 가질, 학대의 사슬을 벗어날 자격이 있었고 그만큼 노력했다.
그러나 엘리의 준비가 너무나도 치밀했고 성공적이었던 까닭에 엘리의 아버지, 맬 디컨은 엘리가 집을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맬은 이미 엘리의 어머니가 떠날 때의 상황을 겪어본 탓에 떠나려는 엘리의 미세한 준비들을 알아차렸다. 만약 엘리가 그만치 성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건실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십대들이 그러하듯 한순간 터져나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훌쩍 집을 뛰쳐나왔더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일단 벗어나는 것만을 염두에 두고 떠나왔더라면, 엘리는 어쩌면 바라던 대로 자유를, 학대자가 없는 미래를, 꿈꾸던 새로운 정착지를 만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엘리는 꼼꼼하고 똑똑했기 때문에 떠나고 난 이후를 대비했고, 그 때문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분통터지게도, 엘리의 죽음은 자살로 기정사실화 되기까지 한다.
누군가에겐 '감히'
맬 디컨이 엘리가 떠나려는 것을 눈치채고 강가에 서 있는 엘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소위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상태였다. 맬은 감히 자신의 딸이 자신을 떠나려는 것에 분노했고 뻔뻔스럽게도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했다. 맬에게 엘리는, 딸은 자신의 소유물이었고 마음대로 휘두르고 때리고 함부로 다루어도 되는 존재, 자신을 무조건 받들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딸이 주제넘게 자신의 영역에서 탈출하려고 하니 평소에도 폭력적이기 그지 없는 심산이 뒤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맬 디컨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엘리를 살해했다. 화가 난다는 이유만으로 강물에 딸을 익사시켰다. 딸을 살해했음을 뒤늦게 인식한 맬은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엘리의 옷과 신발에 돌멩이들을 채워넣어 엘리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한다. 살해당한 엘리는, 지옥에서 빠져나와 살고자 했던 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죽음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비록'
따라서 엘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비록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야 한다. 비록 살해당하고 말았지만, 비록 탈출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비록 끔찍한 아버지와 집을 떠나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지만, 비록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지만, 비록 엘리가 그토록 살고자 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안타깝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엘리는 자신의 최선으로 삶을 꾸려가고자 애썼다.
하여 다시 한번 비록으로 돌아온다. 비록 가정에서 받은 것이라곤 폭력과 폭언으로 점철된 학대 뿐이었지만, 비록 떠나기 위해서 몇달이나 일을 하며 돈을 모아야 했지만, 비록 갓 첫키스를 한 남자아이와 헤어지게 될 것을 알았지만, 비록 태어나 자란 고향을 아마도 영영 떠나야 하겠지만,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엘리는 떠날 계획을 세웠다.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삶이 결과보다 과정이라면 엘리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삶을 살았다. 엘리는 아버지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여자아이이지만 단순히 그뿐은 아니다. 엘리는 딸을 살해하고도 감쪽같이 시치미를 떼버리는 아버지 아래에서 짓눌리면서도 스스로를 놓지 않은 생의 투사다.
비록으로 시작하는 어떤 마음들이 있다. 비록에서 비롯된 역경이나, 고난이나, 불행과 상처 같은 것이 있다. 사람을 갉아먹고 옭아매고 희망을 뒤틀어버리고 삶을 등지게 만드는 비록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리 강하고 철저할지라도 엘리가 그랬던 것처럼, 억압받다 탈출한 많은 여자들처럼, 그것을 넘어서려 시도해볼 수 있다. 비록 시도에 그칠지라도 생은 그 순간 나를 깔아뭉개고 후려치는 억압자가 아니라 바로 내 것이 된다. 벗어나려고 애쓰는 숨 하나하나가 나의 삶으로, 나의 투쟁의 기록으로, 어쩌면 운이 좋으면 빛나는 미래로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