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다리가 달린 집>은 고대 슬라브족 신앙과 슬라브족의 동화가 곳곳에 녹아 있는 다정한 소설이다. 작가 소피 앤더슨이 어린 시절 할머니가 지어내 들려준 바바 야가라는 민담의 주인공을 소재로 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되었다고 한다. 서정적인 흑백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어우러진 동화적인 감성에 푹 빠질 수 있는 이 책은 야가의 자리가 바바 할머니에게서 여자아이 마링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모계 계승 서사의 한 종류로 더욱 흥미를 갖게 한다. 한국에는 2018년 B612 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마링카의 할머니 바바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들어주며 저승문으로 안내하는 야가이다. 마링카는 바바 야가의 후계자로 어릴 때부터 야가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다. 그러나 하룻밤만을 머무는 죽은 사람들과만 교제하고 거듭 만날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과는 우정을 나누지 못하며 집이 불쑥 이동하는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야가의 삶이 마링카는 탐탁지 않다. 어떻게든 하룻밤 이상의 친구를 갖고 싶었던 마링카는 할머니와 집의 눈을 피해 니나라는 소녀의 영혼이 떠나지 못하게 숨겨버린다. 한차례 소동 끝에 저승문으로 떠나야 하는 바바 야가와 헤어져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충격적인 사실과 함께 혼자 남겨진 마링카는 바바 야가를 다시 이승으로 데려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바바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링카는 정해진 운명과 자신이 줄곧 가고 싶어 했던 미래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이야기하고 싶어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단 하루씩 밖에 만날 수 없다면 귀중한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게 될까, 어차피 하루 뿐일 인연에 무심해지게 될까? 하루씩 쌓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함께 풍요로워질까, 고작 하루치 남은 기억에 쓸쓸해지기만 할까? 바바 야가는 전자의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어린 마링카는 후자의 허전함을 견딜 수 없는 어린 아이다. 마링카는 하룻밤만에 이루어지는 교감을 이해할 수가 없다. 마링카는 오래도록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갖고 싶다. 살아있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마링카의 꿈이다.
마링카는 어려서부터 야가가 될 운명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다른 미래는 꿈도 꿀 수 없는 마링카는 그저 지겹기만 하다. 야가가 되고 싶지도 않다. 바바 야가는 마링카가 야가가 되지 않을 가능성은 추호도 없다는 듯 마링카가 자신의 후계를 이을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바바 야가와 닭다리가 달려 수시로 뛰어다니는 집 사이에서 마링카는 점점 불만이 쌓인다. 아직 죽은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도 없는 마링카는 매일 밤 죽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잔치에서 홀로 외롭기만 하다. 곧 떠날 죽은 사람들 말고 다음날 다시 만날 수 있는, 언어가 통하는 살아있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마링카가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한 죽은 사람은 마링카 또래의 니나라는 여자아이의 영혼이다. 마링카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니나를 저승문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한다. 니나를 만나기 직전 떠나온 곳에서 드디어 살아있는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을 뻔했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니나를 붙잡아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마링카는 니나에게 니나가 죽은 것을 숨기고, 니나가 니나의 언니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고, 심지어 니나의 영혼이 소멸될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 살아있지는 않더라도 겨우 꿈에 그리던 친구가, 이야기할 수 있고 다음날에도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달콤함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링카는 니나를 끝의 끝까지 놓지 않다가 자신도 니나처럼 희미해지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끼고 바바 야가에게 잘못을 털어놓는다. 그 와중에도 니나를 걱정하며 참회하기 보다는 왜 자신이 희미해지는지를 추궁하는 데 관심이 쏠려 있다. 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인지!
이기
바바 야가에 대한 분노와 원망, 니나에 대한 죄책감과 걱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그날 밤 마링카가 알게 된 진실은 거듭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바람에 바바 야가가 직접 저승문 너머로 데려다주고도 떠나지 못한 마링카를 손녀로 삼아 키웠다는 것과 마링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영혼들과 마찬가지로 야가의 집에서만 실체를 갖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로 인한 충격에서 채 헤어나오기도 전에 바바 야가는 이승에 지나치게 머문 탓에 약해진 니나를 데려다줘야 한다며 마링카를 남겨두고 저승문 안으로 떠나버린다. 혼자가 된 마링카는 외롭고, 바바 야가가 그립고, 철없이 군 자신이 원망스러운 와중에도 이제 절대로 집에서 떠날 수 없다는, 살아있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자신이 꿈꾸던 미래는 물거품이 되고 꼼짝없이 야가의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절망한다.
때문에 이후 마링카가 원로 야가를 찾아가고 몇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온갖 방책을 찾아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바바 야가를 저승문 너머에서 데려오려고 애쓰는 것은 바바 야가를 사랑하고, 그를 다시 만나고 싶고, 마지막으로 퍼부은 말이 후회되고, 예전의 생활이 행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바바 야가가 돌아와서 죽은 사람을 인도해야 자신이 야가로서의 의무를 지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가 더 크다. 마링카는 필사적으로 바바 야가를 되살리려고 궁리하는 와중에도 무너져가는 집을 외면하고, 살아있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욕심에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야가의 삶보다는 산 사람의 삶에 들어가려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고, 진심어린 원로 야가의 충고를 흘려듣는다. 마링카는 바바 야가를 잃고도, 줄곧 자신을 돌봐준 집이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도 반성이라곤 할 줄 모르고 깊이 생각하지도 않는다. 딴에는 저승문을 열고 바바 야가를 데려올 그럴듯한 책략을 세우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도 않는다. 애초에 틀렸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어
그러나 이기적인 마링카는 어줍잖게 남을 헤아리는 척 하지 않는다. 집의 호의를 냉큼 받아들고 원로 야가의 친절도 덥석 붙들어 바바 야가를 도로 데려오고 자신은 야가가 되지 않겠다는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저승문을 한 번 넘어서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원칙 따위는 마링카가 알 바가 아니다. 일단 저승문을 열기만 하면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무식한 믿음을 무엇도 흔들 수 없다. 결국 망설임 없이 뛰어든 저승문 너머에서 마링카는 바바 야가를 데려오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대신 자신이 바라던 미래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기반을 획득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육체로, 마링카가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임에도 흔들림 없이 욕심에 솔직한 마링카가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마링카는 철이 없고 똑똑하지도 않고 마음이 넓거나 사려깊지도 않다. 피치 못할 상황에서야 양보하고 궁지에 몰려서만 불의에 선을 긋는다. 자신 밖에 모르는 마링카가 생명과 친구와 원하던 미래를 쟁취한 것이 눈부시지 않은가. 때로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아야만 비로소 열리는 길도 있다.